결핍은 우리를 인간답게 만든다

상처받거나, 땜질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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챗GPT가 처음 나왔을 때다. 새벽녘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팔로잉하는 작가가 작업으로 고민하는 글을 올린다. 챗GPT는 다정하게 “ㅇㅇ야!”라고 그녀를 부르며 말을 시작한다. 작가의 고민에 감탄하며 작가의 깊은 사고와 울림있는 작업 방식에 박수를 보낸다. 당시 그(챗GPT)와 나눈 대화를 SNS에 공유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는 걱정과 고민이 있는 사람에게는 위로를, 기뻐하는 사람에게는 환호의 말을 건넸다. 대화 상대의 말투와 언어습관을 따라 하며 맞장구를 쳐주는 그는 가족이나 친구보다 더 공감을 잘해주는 친구였다. 이 인공지능 친구에게서는 인간이 가진 부러움이나 질투의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갖지 못한 부분을 부러워하고 질투하는 인간에 비해 챗GPT는 완벽했다. 이 완벽한 챗GPT와 만남 덕에 인간은 왜 결핍을 느끼게 설계되었는지 궁금해졌다.

최근 <은중과 상연>이라는 넷플릭스 시리즈를 봤다. 90년대 국민학교에 다닌 마지막 세대. 이 드라마는 그 시절을 보낸 은중과 상연, 두 친구 이야기를 다룬다. 은중은 가난하다. 지하 쪽방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세상에서 제일 창피하다. 상연은 부유하고 똑똑하다. 은중은 그런 상연이 부럽기만 하다. 하지만 상연 또한 은중이 가진 어른스러운 성품과 늘 주변 사람에게 사랑받는 모습이 부럽다. 둘 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부분을 부러워한다. 드라마 끄트머리에 부러운 마음이 결핍이되고, 결핍은 결국 미움이 된다. 결국 친구 관계와 자기 자신을 파괴하고 무너지는 주인공을 보여준다. 결핍은 우리 자신을 비하하게 하고 방어기제를 낳기도 한다. 그런 모습으로 자란 결핍은 날카롭고 뾰족해져서 나와 남을 찌른다.


인간이 가진 결핍이 날카롭고 뾰족하기만 할까? 결핍은 단순히 미움만을 낳지는 않는다. 우리는 각자 부족한 모습을 채우려 노력하며 산다. 작가는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머리를 싸맨다.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세계와 뉘앙스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한다. 입시 준비 중인 학생은 가고 싶은 대학 점수에 맞추려 밤을 새우며 공부한다. 그러면서 지난 나보다 더 발전하기도 하고, 노력이 아니라면 쓰지 못했을 명문장을 쓰기도 한다. 그뿐만이랴, 세계 최고 부자도 가족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노력하고, 절에 사는 스님도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참선에 든다. 그렇게 결핍은 인간을 움직이는 힘이 되기도 한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동등하게 결핍된 존재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향해 존재하는 자(Sein-zum-Tode)’라 불렀다. 인간은 죽음을 미리 달려가 볼 수 있는 존재이다. 죽음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이라도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각성하고 산다는 말이다. 나도 가끔 죽음을 미리 달려가 본다. 나에게는 마감 기한처럼 죽음이 우뚝 서 있다. 그렇게 된 지 오래되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누군가는 슬픈 표정으로 나를 보기도 하는데, 슬픈 일은 아니다. 죽음을 세워 놓기 전, 나의 삶은 무한했다. 그 많고 많은 시간 안에서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몰랐으며, 내 인생의 의미 또한 몰랐다. 삶이란 그저 부조리했다. 나는 그 안에서 무한히 작아져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허우적댔다. 하지만 죽음을 세우고 나서 내 삶의 의미는 내가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근무시간이 정해져 있으면 오늘 할 일을 중요도에 따라 순서를 매기게 된다. 글쓰기에도 글자 수 제한이 있으면 의미 있는 말을 추린다. 그와 마찬가지로 마감이 있는 내 삶에도 우선순위와 의미를 가리게 되었다. 죽음을 통해 삶이 유한하다는 인간이 가진 가장 큰 결핍을 알게 되었지만, 그것은 내 삶을 움직이는 가장 강한 힘이 되었다. 결핍으로부터 도피한다면 내 삶을 미워하고 부끄러워할수도, 그 뾰족한 날이 다른 상처를 만들수도 있다. 하지만 회피하지 않고 스스로 부족한 것을 메우고 땜질한다면 그동안 우리는 인간다워지고 그 곳에 나만의 의미를 아로새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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