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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리아나 Mar 17. 2022

올챙이 적을 기억하는 개구리

나는 우울한 어린이였다.



"어른들은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다.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다.” - 어린 왕자 中


최근의 기억력은 좋지 못하지만 어린이였던 나에 대한 기억이 생생한 것은 괴로운 일이다. 대개 기억에서 가장 강렬한 것은 이미지 보다도, 그때 느낀 감정이기 때문이라고 과학이 증명한 바 있다.


나는 슬퍼지면 냉정해졌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이 슬펐다. 내 기억 속의 어린 나는 스스로에게도 타인에게도 따뜻한 말을 해본 적이 없다. 따뜻한 말이 어떤 것인지는 알았지만 그런 말을 하면 약해질 뿐이라고 여겼고 ‘왜 말을 예쁘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에 명쾌한 답을 얻은 적도 없었다. 나는 진정으로 혼자였기에 약해지면 안 되었다. 숱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내뱉으면서 내비치는 감정만은 모두 거짓이었다. 누군가 내미는 손에 들려진 것은 가식뿐이라고 여기며 차라리 다시는 그 손이 다가오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편하다고 착각했다. 사람에 대한 강한 불신과 적대심은 실망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시작됐다.


9명의 식구가 함께 사는 대가족으로 살면서 집안사람들이 내가 있는 집으로 모였고, 자연스럽게 어릴 때부터 어른들과 함께 지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들킨다.

은연중에 아이들이 눈치가 없고 자신의 미세한 표정 변화와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라고, 혹은 대놓고 티를 내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착각이다. 작정하고 속이는 사람이라면 들키기 어렵겠지만 무시하는 태도에는 싸늘한 공기가 깔린다. 아이들이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알아본다는 말은 사람이 가진 동물적 감각 중 하나가 ‘눈치’라는 생각에 힘을 실어준다. 사실은 대부분, 아이들이 두려운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부정적인 의도를 숨기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어린이였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이 어른이 될 것이라는 사실도 잊어버리는 듯하다.


서울숲 어딘가

조롱당한 아이는 어둠으로 숨는다.

비웃어진 아이는 나아가지 못한다.

무시당한 아이는 표현하지 못한다.


나는 종종 ‘버릇없는’ 어린이였던 과거를 객관화해보고 합리화도 해본다. 아동심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모든 아이들이 그럴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아이가 갖고 있기에 다분히 이질적인 냉랭함에는 아픔이 숨어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자신에게 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서지 못했다. 때문에 감정이 뒤엉켜 슬픔과 외로움이 모두 불신과 분노로 변질되면서 본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표출되었다.


“나를 좀 봐주세요 나 힘들어요 저 여기 있어요 저 좀 도와주세요.” 이 말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스스로 혼란을 분석하기 어렵다. 왜 외롭고 슬픈지, 왜 화가 나는지,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 없음으로 오는 정신적인 고독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스스로 파헤쳐 볼 방법을 몰랐다. 가르쳐줄 어른도 내 곁에는 없었다.


어느 날에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과거를 회상하다가 깨달은 것은, 내가 원래 표현할 줄 모르는 아이가 아니라 표현하는 것이 무엇인지 배운 적이 없는 아이였다는 것이다. 감정에 있어서 비 문명인과 다름이 없었다. 끌어 오르는 무언가, 벅차오르는 마음을 무엇으로도 표현할 길이 없었다. 나는 진정으로 ‘말하는 법’을 몰랐다.


아이들은 대개 본능이 지배해서, 행동이 언어가 된다. 알아봐 주길 바라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아픈지, 얼마나 힘들고 외롭고 슬픈지. 그러나 타인은 겉으로 보이는 행동만으로 나를 판단한다. 그것이 가족이라고 해도 말이다. 가족도 어찌 됐든 타인이라는 것을 너무 어릴 때부터 깨달았다. 관계의 최전선인 가족과의 관계가 어려우니, 대인관계도 똑같았다. 타인에게 내 안에 숨은 상처를 알아주길 바라는 것은 이기적인 마음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아프게 터득했다.


우울을 겪는 아이들은 도움을 청하는 방법을 모른다. 내게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본인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도 모르기 때문에 도움을 구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이해하기에 우울이라는 감정은 너무도 복잡하고 어렵다.


거기서부터 아주 조금 자란 나는, 고마운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고 관계의 이로움을 느끼게 되니, 너와 나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가 ‘말’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믿어도 되는 사람과 아닌 사람을 미리 구별하고 피하거나 대처할 수 있는 능력도 생겼다. 이제는 고민을 토로하는 소중한 이들에게 나 자신에게 해주고 싶었던 치유의 말들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이는 혼자 자랄 수 없다. 혼자 자란 아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그때보다 한치도 자라지 않은 마음을 품고 살아가야 한다.


어린 내게 해주고 싶은 것은 그저 말을 거는 것이다. 대체 왜 그러는 것이냐고 다그치거나 스스로도 알지 못할 기분을 묻기 전에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함께 이야기하고 현재의 기분을 만든 원인에 대해서 파헤쳐 보는 것, 거기서 누군가 해주길 바라는 것과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

원래 이상한 애라며 방치하지 않고 행동을 만들어낸 감정을 구체화하고 감정을 이끌어낸 배경을 찾아내어 네 탓이 아니라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납득시켜주는 것. 그 모두를 할 수 없다면 적어도 도움이 될만한 책 한 권 쥐어 주는 것. 그것이 나에게 필요한 어른의 모습이었고 내가 되어야 하는 어른의 모습이다.


환경은 끝도 없이 변화하고 치유는 남은 자의 몫이다. 어쩌면, 내가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잘 기억하는 것이 평생 나 자신을 돌보고 주변을 돌보라는 신의 뜻일지도 모르겠다.


귀하는 어떤 아이를 품고 사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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