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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수험서에서 홀로서기

청년들의 홀로서기 응원가 2절

* 이 글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로 나가기 위해 홀로서기를 준비하는 여청년과의 만남을 소소하게 정리한 글입니다.


오늘은 H와 온라인 코칭을 하는 날. 우리는 2022년 세운 계획을 서로 공유하기로 했다. H 덕분에 나도 미뤄두었던 플래너를 꺼내 올해 계획을 정리해보았다. 적극적인 H가 자신의 계획을 화면에 먼저 공유해 주었다. 난 이런 태도 좋아한다. 둘이 있는데 빼는 것은 싫다.


임용고사 준비를 하는 H는 전공(원서), 한국사, 교육학 이 세 가지 영역의 공부 계획을 세웠다. 한국사는 한 달 후 자격시험에 응시해서 합격하면 끝이다. 전공과 교육학은 양이 방대해서 지속적으로 하지 않으면 감당이 안된다. H의 데일리 공부 계획은 대략 오전에는 영어 통사론 원서 3개 챕터, 오후에는 한국사 2강, 저녁에는 교육학 1강을 공부하는 것이다. 나는 H에게 계획한 것을 실행하는데 문제가 있는지 물었다. H는 오전에 원서 읽고 정리하는 것은 잘하는데, 점심 먹고 나서 조금 쉰 후에 한국사 공부에 빨리 착수하지 않는는 것이다. 소파에 누워있거나 유튜브를 보다가 뒤늦게 시작하게 되고, 시간에 밀려 교육학은 못 보는 날이 많단다. 나는 H가 전공영어는 재밌고, 한국사는 부담스럽고, 교육학은 어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점심 먹고 나서 한국사를 빨리 시작하지 않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되니?"

H는 커다란 눈동자를 굴리며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 이유를 생각해 보지는 못했네요. 음... 한국사 한번 시작하면 2강 정도 하는데 분량이 꽤 되어서 3시간 이상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그거 하고 나면 너무 피곤해져요."


전공책은 잘 펴는데, 한국사 책 앞에서 머뭇거리는 H. 시간 문제는 아니다. H는 오전 전공 공부도 이미 3시간 정도 하고 있다. H는 한국사의 무엇이 두려운 것일까?


한국사능력검정 시험을 준비하는 똑똑한 방법


한국사 수험서는 대부분 시대별로 영역별로 요약된 자료를 공부하고 바로 기출문제를 푸는 식이다. H처럼 독서를 좋아하고 언어적 소양이 높은 아이들은 말로 풀어낸 스토리텔링을 좋아하지 요약된 내용을 공부하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요약(要約)은 말이나 글을 읽고 요점을 잡는 일이다. 요약을 하는 것 자체가 공부지 요약된 것을 공부하는 것은 공부가 아니다.


여기 어떤 똑똑한 대학생이 취업에 필요해서 한국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국가 교육과정인 2015개정 교육과정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중학교 역사는 한국 전근대사를 중심으로 다루는데, 수업들으며 내신 준비도 할겸 노트 정리를 좀 해두었다. 고등학교 한국사는 근현대사를 중점적으로 다루니까 새 노트 말고 중학교 때 쓰던 노트 계속 이어서 정리했다. 거기에 초등학교 때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노래 좀 불렀고, 방학 때 역사 관련 서적 좀 읽고, 독후감을 써뒀는데 이것은 학교생활기록부 독서활동상황에도 입력해두었다. 부모님이 좋아하시는 사극을 옆에서 기웃거리며 몇 편 보았는데, 시청률 올려주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자막으로 제공되는 왕, 주요 인물, 각종 기관이나 제도를 정리했다. 정리한 내용은 반만년 역사에서 새발의 피지만, 역사적 사실을 시각적, 맥락적으로 이해하게 하므로 다른 시대 공부할 때 도움이 되었다. 학생이 이 정도 준비했으면 수천 년의 역사를 20여 개 강의로 쪼개어 요약정리한 한국사 수험서를 공부할 수 있는 기본을 다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여기에 신입생 시절 역사 관련 교양 수업 한 개 정도 들었다면 금상첨화다. 그저 자신에게 뭔가를 가르쳐주려고 안달난 한국적 교육 환경을 똘똘하게 잘 엮어낸다.


그러니까 한국사 공부 전에 자신의 한국사 공부 역사를 먼저 정리해보면 좋다. 3일 만에 한국사 공부하고 끝냈다고 하는 이들에게 현혹되어 공부를 미루면 안 된다. 그들은 복리로 부어둔 적금을 3일 전에 찾았을 뿐이다. 부어둔 적금도 없이 며칠만에 반만년 역사를 끝내는 것은 국격을 떨어뜨리는 일이니 가급적 그러지 말자. 한국의 역사보다 내 역사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노트나 기록이 중요하다. 사료가 없으면 역사도 없듯, 기록이 없으면 나도 없다.


공부의 진입장벽 낮추기 전략


H는 오늘 한국사 5~6강을 마쳐야 한다. 그런데 스케줄 표에 5~6강의 내용이 없다. 읽고, 노트하고, 말로 정리하고, 기출문제를 풀겠다고 했는데, 무슨 내용을 공부하는지가 없다. 이렇게 되면 점심 먹고 한국사 책 펴기까지 상당한 정신적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일단 공부를 시작하기 전까지 한국사 공부시간이 블랙박스처럼 느껴진다. H가 어린 시절부터 쌓아온 한국사 관련 사전 지식을 인출할 수 있는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제 한국사 공부시간이 재미없고 지루하다는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점심 먹고 바로 공부에 착수할 수 있겠는가? 만날 때마다 싫었던 기억만 있는 사람과 선뜻 데이트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H에게 한국사 공부가 영어 원서처럼 매력적으로, 편안함으로 다가오게 하는 방법이 없을까?

H의 공부 계획에 공부량과 절차는 있지만 내용이 빠져있다. 실체를 모르는 대상에는 접근이 쉽지 않다.


나는 H에게 계획표에 공부할 챕터 숫자만 쓰지 말고 해당 제목이나 내용을 쓰라고 했다. 예를 들어, 어제 3~4강을 공부한 후, 5~6강의 내용을 잠깐 훑어 보며 스케줄 표에 5~6강의 주요 내용을 써주는 것이다. "1. 고대 사회: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2. 고대 경제: 토지, 조세, 무역" 이 정도는 써줬어야 한다. 여기에 한 번쯤은 들어봤던 청해진, 장보고, 골품제도 등등 관련된 키워드를 스케줄 표에 써둔다. 역사 시간에 아무리 졸았다 해도 장보고가 바다에서 활약한 것은 다들 안다. H에게도 고대사회, 삼국시대, 골품제와 같은 말이 전대미문 난생처음 듣는 말은 아닐 것이다. 5~6강은 책의 저자가 구분한 챕터일 뿐 한국사 시험에 합격하는데 그다지 중요한 정보가 아니다. 내일 이 시간에 무슨 내용을 공부할 것인지를 나에게 미리 알려주고 그게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라고, 나도 그동안 부어둔 적금 좀 있으니 찾아 쓰면 된다고 안심시켜 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러면 점심 먹고 바로 한국사 책을 펴 들 수 있다.


공부량이 많아서 피곤한 것은 양을 줄이거나 중간에 휴식을 주면 된다. 그러나 어려워서, 하기 싫어서 시작에 엄두를 못 내는 것은 공부에 대한 심리적 진입장벽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심리적 장벽을 낮추기 위해서 내가 도전하는 대상과 관련해서 가지고 있는 자원을 적극적으로 치밀하게 활용해야 하는데 이를 교육학에서는 사전학습 회상(Stimulating Recall of Prior Learning)이라고 한다(Gagne, 1985). 오늘 내가 해야할 과제는 나에게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너도 이미 이 내용과 관련된 상당량을 알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말해주어야 한다. 그러니까 H야,

매번 새로운 책으로 공부하기보다는 기존에 공부하던 자료를 같이 활용해야 한단다.

그러기 위해 너의 공부역사를 담아낸 사료를 잘 만들어 두는 것이 중요하겠지?

공부할 내용에 대한 자신의 사전 지식을 정리해보아야 한단다.

계획표에 공부시간+공부량뿐만 아니라 공부 내용을  간략히 써두어야 한단다.


이러한 계획표는 마치 선생님이 수업을 시작하면서, 얘들아 어제 우리 이런 것 배웠는데, 오늘은 이어서 이런 거 공부할 거야라고 말해주며 내용의 수직적 계열성을 확인해주는 일이다. 혼자서 공부하는 이들은 스스로가 자신의 선생님이 되어 사전학습회상 작업을 해줘야 한다.

 

H가 아침마다 보내주고 있는 학습 스케줄러. 안시켰는데도 <수정할 점>까지 들어있다. 인강 듣고 바로 노트정리하겠단다. ^^


제로에서 시작하지 않기


H야, 공부가 주는 심리적 압박감이 나를 짓누르게 하면 안 된단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가 재밌다고 했지? 그 책 펴 드는데 드는 힘만큼으로 한국사, 교육학, 임용 준비 책을 펼 수 있도록 해줘 봐. 힘들지 않아야 오래 공부할 수 있어. 그러기 위해서 공부하는 자신을 인격적으로 존중해주길 바란다. 공부가 너를 겁주게도 못하게, 두렵게도 못하게, 놀라게도 못하게 해야 한다. "괜찮아, 제로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야. 이미 난 수업을 통해, 책을 통해 많은 것을 공부해왔어. 그것들에 좀 더 튼튼하고 정교한 구조를 만들고 살을 붙여 나의 것으로 만드는 일을 오늘 아주 조금 할 뿐이야."라고 생각하고 편안하게 하루 공부를 시작하게 해 주어라. 수험서 공부에서 홀로 서는 그날까지 교수님이 응원할게.



참고문헌


Gagen, R. (1985). The Conditions of Learning and Theory of Instruction(4th ed.). New York, NY: Holt, Rinehart & Wins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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