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갈함은 오랫동안 돌본 것에서만 나올 수 있다.
한 십 년 전, 퇴직하신 교수님 댁을 방문한 적이 있다. 구축 아파트로 정남향에 앞뒤 베란다가 모두 있고, 현관 한 켠에 키 작은 화분들이 옹기종기 앉아 손님들을 맞아주는 정겨운 집이었다.
거실로 들어서니 가구나 물건들이 오래되었지만 깨끗하게 관리되고 제자리에 똑바로 놓여 있어 보였는데, 정갈하시고 배려심 있어 존경받으실만한 두 분의 성품을 볼 수 있어 감동이었다. 화장실을 사용하면서 감동은 경탄으로 바뀌었다. 오래전 유행했던 옥색 몰딩이 촌스럽기보다 기품 있어 보일 정도로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타일 줄눈에 곰팡이 자국하나 없는 것은 물론, 세면대나 목욕용품 등 어느 곳에도 습기 하나 없었다. 오래되었지만 낡지 않았고 매일 닦고 관리해서 깨끗하고 흠이 없는 느낌이랄까? 촌스러울 수밖에 없는 옥색 화장실이 신비롭고 영적이기까지 했다. 이 날 나는 이 두 분을 롤 모델로 삼기로 했다.
올해 대학 입학 30주년, 나 포함 여덟 명의 친구들과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5년 전 스페인을 다녀와서 또다시 여행을 갔다는 것은 대학 4년간 같은 기숙사에 살며 같은 공부를 하면서 조율된 편안함이 있기 때문이다. 로마에선 영혜, 피렌체에선 선희, 파리에선 미란이와 호텔 룸메가 되어 자기 전에 수다를 떨었다. 정치 이야기, 직장 이야기, 종교 이야기, 아이들 키우면서 깨달은 지혜들... 새로운 이야기들이지만 편안한 화자들로부터 듣는 이야기는 피로감이 없다.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이십 대 서로의 철없음과 흑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관계는 탄탄해 보였다. 어떤 것은 굳이 기억을 해내어 민망하기도 하지만, 어떤 것은 긴 세월이 지나는 동안 잊어준 것 같아 고마운 그런 관계다.
나이가 지긋하신 가이드의 인솔 하에 30년 지기들과 포로 로마노에서 콜로세움까지 걸었다. 이천여 년 전부터 제 자리를 지킨 로마제국의 웅장한 돌 덩어리들을 보러 전 세계 사람들이 로마를 찾는다. 모든 유적지는 낡고 무너진 모습 그대로 보여주며 오래됨을 자랑해야 사람들이 찾는다.
하지만 인간과 물건은 다르다. 오래된 사람들과 물건들은 매일 닦고 광을 낼 때 사람들이 찾는다. 역사가 느껴지지만 흐트러짐이 없음에서 나오는 위엄과 정갈함의 미덕이 있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에서도 어떤 유대인들은 매무새를 챙겨야 하는 이유를 알아낸다.
"가능하면 매일같이 면도를 하게. 유리 조각으로 면도를 해야 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 때문에 마지막 남을 빵을 포기해야 하더라도 말일세. 뺨을 문지르는 것도 혈색이 좋아 보이게 하는 한 가지 방법이지. 자네들이 살아남기를 바란다면 단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어. 일할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야." (빅터 플랭클의 죽음의 수용소 중)
매일 2만보 가까이 걸은 까닭인지 우리의 관절이 노화된 까닭인지 다리 아프다는 친구들이 많아졌다. 다음 여행은 크루즈로 가보자는 이야기도 나온다. 나의 롤 모델 교수님은 이제 여든이 되셨지만 안경을 쓰지 않으신다. 외출하고 돌아오면 그 옥색 화장실에서 손을 씻은 후에 눈도 한번 헹구신다고 하셨다. 아무래도 그곳은 신비한 약수터임에 틀림없다. 골프나 헬스를 하지 않아도 새벽예배와 정갈한 습관 덕분인지 청바지를 입고 걷는 뒷모습은 50대로 보일 정도이다. 재직 중 가르친 중국인 제자를 여전히 돌보신다.
정갈함은 새것에서 찾을 수 없다. 오랫동안 안부를 묻고 돌봐야 한다. 나의 눈과 관절에게도 매일 안부를 물으며 염증이 생기지 않게 돌보는 방법을 구상해야 한다. 옷매무새를 다듬고, 눈을 잠시 감아 안구를 쉬게 해 주고, 뻐근한 허리를 곧추세우며, 책상 아래로 다리를 뻗어 본다. 그리고 그동안 연락을 못했던 오래된 지인들에게 다정한 안부를 묻기 위해 카카오톡을 열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