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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bsy Jun 25. 2022

추앙한다는 것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를 보고 




정말 오랜만에 16부작 드라마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다. 해방일지 특유의 잔잔한 감성이 나랑 묘하게 잘 맞았던 까닭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이 드라마에 호기심이 생긴 건 추앙이라는 단어가 등장했을 때부터였다. 평소에 말수도 전혀 없고 극도로 내향적인 성향의 소유자로 추정되는 미정이가 다짜고짜 구씨를 찾아가 한다는 말이 자신을 추앙하라는 것임을 처음 듣고는 너무 신선해서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왜 그 많고 많은 단어 중에 추앙이라는 단어였을까. 나를 사랑해달라는 표현이 닳고 닳아버려 식상해진 나머지 색다른 표현을 모색하다가 나온 것이 추앙이었을까. 또 배우들은 이 생소한 단어를 어떻게 내뱉어야 할지 얼마나 고심했을까.


처음에는 이런저런 질문들을 마구잡이로 던지며 드라마를 관망하며 지켜보다가 어느 순간 이 작가님이 던지고 계신 사람과 인생에 대한 거대한 담론이 나의 생각과 맞닿아 있다는 확신이 들고 난 후부턴 완전히 푹 빠져든 채 보기 시작했다. 이렇게 인상 깊게 보았던 드라마가 처음인지라 흥미롭게 봤던 몇 가지 포인트들을 적어보고자 한다!!






(스포일러 주의!)

1. 왜 하필 추앙이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이 단어에 생소함, 내지는 거부감까지도 느낀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장면에서 하차했다는 리뷰도 더러 봤고 알맹이 없이 힘만 잔뜩 준 대사라는 혹평도 많이 봤지만, 나는 우선 글을 써내는 것이 직업인 작가가 이 '추앙'이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를 모른 채 이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는 테마로 사용했을 리는 만무하다고 생각된다.


추앙 (推仰하다)  
[동사] 높이 받들어 우러러보다.
[동사] revere, respect, worship


추앙 - 이 단어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는 단어도 전혀 아닐뿐더러 오히려 상당히 종교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나는 다소 난해하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이 단어가 일관성 있게 하나의 인간관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해방일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로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욕망하는 존재로 바라보는 태도를 취한다. 그리고 그 욕망이 우리를 규정하고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믿는다.


이런 종류의 욕망을 철학자 제임스 K. A. 스미스는 궁극적인 사랑이라고도 표현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궁극적인 사랑은 가족이나 애인을 대할 때의 사랑이라기보다는, 우리가 다른 모든 것보다 가장 욕망하는 것, 그래서 우리의 모든 행동양식을 결정짓는 인생의 으뜸(!!!) 원동력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가장 사랑하고, 또 가장 욕망하는 대상에게 놀라우리만큼 충성스럽고 (여기서 또 한 번 제임스 스미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그 대상을 예배한다.






우리가 흔히 욕망 덩어리(..!)라고 여기는 종류의 사람들을 한 번 살펴보자. 대개의 경우 우리는 정선배 같은 사람을 떠올릴 것이다. 순이익이 적어도 매달 800만 원씩은 떨어지는 편의점을 가족 비즈니스로 인수하기 위해서라면 회사 사람들과의 관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원하던 점포를 차지하고야 마는 사람. 돈 욕심 많고 대외적인 평판은 잘 신경 쓰지 않는 사람. 우리는 보통 이런 사람들을 미워하고 혀를 끌끌 차며 신랄하게 비판한다. 물불 안 가리고 욕심에 이끌려 사는 사람이라고. 드라마 속의 창희가 그랬고 또 내가 그렇다. 주위에 그런 극단적인 케이스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기에 나는 저 사람들처럼 욕망에 이끌려 사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가치판단을 통해 행동하는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으쓱한 적도 솔직히 있었다.


그렇다면 나와 창희는, 또 그 밖에 다른 캐릭터들은 그 모든 욕망을 초월한 사람인 걸까? 해방일지는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구씨의 롤스로이스를 처음 마주한 창희는 차 앞에 무릎을 꿇고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차를 바라본다. 또 롤스로이스의 차주 구씨를 우러러본다. 이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무언가를 '추앙'하는 모습과 비슷하지 않은가?





"형은 제 로망이에요. 혼자 사는 남자."


정선배의 삶을 움직이는 동력이 돈이듯, 창희가 생각하는 좋은 삶에 대한 전망은 혼자 사는 남자가 되는 것이다. 기왕 혼자 사는 김에 경기도가 아닌 서울이라면 더 좋을 것이고 거기에 차까지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삶이란 예쁜 집에 살면서 온갖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만한 여건과 능력을 보유한 예쁜 직장인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주구장창 추앙을 외쳐대던 미정이는 어떨까? 미정이의 로망, 또는 미정이가 꿈꾸던 좋은 삶이란 사랑받고 또 사랑하는 여자, 부족한 게 하나도 없고 누군가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그래서 편안함에 이른 상태였을 것이다. 미정이는 그렇게 될 언젠가를 상상하며 그 행복한 시간을 이미 살고 있다고 연기하며 살아간다.


이렇듯 거창해 보이지 않고 우리 스스로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살아도 우리에겐 욕망하는 ,  궁극적으로 사랑하는 바가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  드라마가 던지는 핵심 메시지라고 느껴진다. 우리는  로망을 바라보며 내가 상상할  있는 가장 이상적인 삶을 그려가고  이상에 최대한 가까이 도달하려 달려가며  그에 맞게 빚어져 간다. 그런 맥락에서 미루어   '내가 사랑하는 것이  나다'라는 제임스 스미스의 발언도 전혀 무리가 아니다.





미정이는 구씨에게 자신을 추앙하다 보면 봄이 올 때 즈음엔 구씨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거라고 단언한다. 처음에는 어떻게 저렇게 확신할 수 있는지 살짝 의아했지만 이전과 같은 맥락에서 살펴보면 어떤 식으로든 구씨의 변화는 사실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이전에는 무엇이었든 간에 구씨가 추앙하는 대상이 미정이로 옮겨간 순간 변화는 필연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다. 내가 추앙하고 사랑하는 것이 곧 나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우리가 사랑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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