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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디자인 대멸종 시대, 살아남은 디자이너를 만나다.

04. 이영우 : 제품, 사업, 브랜드까지 확장한 시니어 디자이너

by 디자이너 제인

AI가 일상을 재구성하는 시대, ‘현실(Real)’이라는 단어는 다소 낡게 들릴지 모른다. UX/UI, 서비스, VR 등 디지털이 주도하는 시장에서 산업디자인은 뒤로 밀려난 것은 물론, 심지어 미래가 없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산업디자인은 아직도 유효할까?'

디자인 머니 컬렉션 8월호에서는 산업디자이너 이영우를 만나 산업디자인의 오늘과 내일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의 대답에서 의외로 단단하고 희망적인 산업디자인의 미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번 시리즈는 1편과 2편에 나뉘어 발행됩니다.


1편 : 산업디자인 대멸종(?) 시대, 살아남은 시니어 디자이너를 만나다.

2편 : 다가올 산업디자인 호황, 기회를 잡는 디자이너의 자세.



1편 : 산업디자인 대멸종 시대, 살아남은 시니어 디자이너를 만나다.




Q. 안녕하세요. 영우님, 간단히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산업디자인 및 엔지니어링 스튜디오 스토리폼(STORYFORM)의 대표이자 디자이너 이영우입니다.

제품 기획부터 디자인, 설계, 양산까지의 제조 전 과정을 총괄하며, 클라이언트와 함께 브랜드를 위한 제품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스크린샷 2025-08-21 오후 6.55.01.png STORYFORM 대표 이영우 디자이너




Q. 산업디자인을 선택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어릴 땐 애니메이션 작가를 꿈꿨습니다. 만화를 그리고 싶었는데, 수입 안정성에 대한 불안이 컸어요.(웹툰시장이 이렇게 성장할 줄 알았으면 계속할걸 하는 생각도 합니다….ㅎㅎ) 군대 전역 후 누군가 산업디자인은 여러모로 진로가 넓다고 하더군요. 그 이야기를 듣고 디자인학부에서 산업디자인 전공을 선택했습니다.


막상 시작해 보니 3D모델링이 너무 재미있었어요. 무언가 눈앞에서 만들어지는 과정이 꼭 피규어를 컴퓨터로 만드는 것 같았죠. 졸업 후 디자인 에이전시 세 곳에서 일했고, 주방가전 제조회사에서 인하우스 디자이너로 2년 동안 근무하며 제품 개발 전 과정을 몸으로 몸소 체득했습니다. 이후 회사에서 자체 상품 개발을 축소하며 제 역할도 줄어들었고, 고민 끝에 2017년 1월 독립을 결심했습니다.




Q. 현재 스토리폼이라는 산업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계신데요, 독립을 결심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경력 6년 차에 사업자를 냈습니다.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회사 밖에서 만든 수익 경험 덕분이었어요. 당시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유명했던 ‘디노마드’ 플랫폼에서 라이노(Rhino) 3D모델링 강의를 하고 있었고, 막 태동하던 외주 플랫폼을 통해 프로젝트 수주 가능성도 봤습니다. 강의 + 외주를 병행하면 고정 수입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독립했죠.


초창기에는 지인을 통해 프로젝트를 의뢰받았고, 이후에는 SNS·포트폴리오 플랫폼을 통한 외부 의뢰, 정부지원사업 컨소시엄 참여로 점차 수주 구조를 넓혀갔습니다. 지금은 엔지니어링 회사과 파트너십을 구축하고, 프로젝트 특성에 맞춰 팀을 구성해 운영하고 있습니다.


philosophy.png 스토리폼의 필로소피





Q. 산업디자이너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가 있다면요?


1) 유아 흡착식판 '더블 플레이트'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 어떤 환경에서도 다양한 유아 식사 메뉴를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뚜껑이 두 번째 보울로 확장되는 식판을 디자인했습니다. 당시엔 센세이션 한 기능과 형태였죠. 시장에 처음 선보인 디자인이라는 것에 의미가 컸습니다.


제가 육아를 하지 않아 사용자 인터뷰와 리서치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생산공장과 긴밀히 소통하며 설계부터 양산까지 관여하며 제조 전 과정의 사소한 디테일까지 모두 챙긴 프로젝트예요.

더불어 육아를 하는데 매우 힘들고 돈도 많이 들잖아요. 혹시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부모들이 있다면, 한 제품을 구매해서 두 개의 식판으로 사용할 수 있으니 꽤 경제적일 것이라 생각했어요. 금액도 1-2만 원대로 접근 가능한 가격이었고요.


6780cce27b487a63ac0cdef8_02-1-1600.jpg 뚜껑이 두 번째 그릇이 되는 더블 플레이트



2) DDP 10주년 기념 아카이브 오브젝트

서울디자인재단 의뢰로 DDP 10주년을 기념할 수 있는 상징물에 대한 의뢰를 받았고, 역사와 건축적 특징이 담긴 상징물을 디자인했습니다.


그래픽 디자이너의 캔버스가 2D라면, 산업디자이너의 캔버스는 6면체라고 생각해요. DDP의 과거와 현재를

압축적이고 실감 나게 느낄 수 있게 석재·콘크리트·3D 프린팅 등을 활용해 디자인했고 기획, 제작, 패키징, 납품까지 제작의 모든 과정을 직접 수행했습니다.


혹시나 DDP에 궁금증이 생긴 시각장애인분이 계시다면 이 제품으로 간접적으로나마 역사와 건축적 특징을 ‘느껴볼 수 있는’ 도구로 활용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담겨있습니다. 이처럼 도시의 대표 상징물을 디자이너 고유의 정체성으로 번역하는 일이 쉽지 않은데, 굉장히 의미 있는 시도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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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간수문부터 동대문 운동장, DDP의 현재 모습까지 형태와 소재, 흐름을 나타낸 오브제



3) 비욘드허니컴 ‘그릴 X’ AI 로봇

셰프의 레시피를 AI로 학습해 그릴링, 레스팅을 초 단위로 복제하여 상단 헤드 센서가 고기 컨디션을 실시간으로 센싱해 최적 상태로 굽는 로봇입니다. 1세대는 작년까지 약 140대를 제작하여 납품했고, 이후 북미 수출 목표로 2세대 로봇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디자인부터 설계, 생산, 납품까지 제조 전 과정을 수행한 건 엔지니어 파트너와 협업한 결과입니다.


사실 고기 굽는 일이 건강에 좋지 않다는 인식 때문에 인력채용이 쉽지 않은데, 비욘드허니컴은 이를 대체하는 솔루션으로 각광을 받고 있어요. 인건비 절반 정도의 렌탈비로 사용할 수 있는 모델이고 다수 외식업체와 MOU를 맺고, 일부 대기업 사옥 구내식당에 납품이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디자인 주도로 첨단 기술이 비즈니스 목적에 맞게 상용화한 결과를 보여준 사례라고 볼 수 있어요. 로봇의 타깃 프라이스에 맞추기 위해 소량생산에 적합한 소재와 공법을 설정하여 생산단가를 조율했고, 외관–내부구조–구동방식-사용편의성–주방 환경 등을 통합적으로 고려해 디자인했습니다.


스크린샷 2025-08-17 오후 5.42.44.png 셰프의 레시피를 학습해 최적의 상태로 고기를 구워주는 AI로봇, 비욘드허니컴 ‘그릴 X’




Q. 영우님은 디자인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 많은 고려를 하시는 것 같아요.

솔직히 예쁘게만 하면 되지 디자이너가 기획과 운영, 제작까지 신경 써야 할까요?



저는 여전히 디자인의 활용범위가 지나치게 심미성과 데코레이션에만 머물러있다고 봅니다. 실제로는 디자인이 비즈니스 전략과 사회문제 해결, 문화적 상징화 등 훨씬 넓은 영역에서 기여할 수 있는데 말이죠.

물론 현실에선 결정권자들이 '여긴 디자이너들의 영역이 아니다' 라며 문을 잘 열어주지 않기도 하고, 디자이너들이 반대로 책임과 리스크를 짊어지길 꺼리는 분위기도 있어요. 하지만 이럴수록 다양한 사례로 문을 여는 게 필요해요. 우리 같은 시니어 디자이너일수록 더요.


프로젝트를 하다 보면 디자인으로 인한 사회적 맥락과 책임을 마주할 때가 있어요.

DDP프로젝트는 장애인도 경험할 수 있는 사회적 가치를 담았고, 더블플레이트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분들을 위한 배려를, 비욘드허니컴의 경우 기업의 비용 마진과 비즈니스까지 고려했죠.


저는 디자인의 고정관념을 넘어 기획, 제조, 납품, 운영까지 역할을 확장해 가며 디자인이 비즈니스의 실질적인 성과에 기여할 수 있다는 증거를 쌓아가고 있습니다.

저의 목표는 디자인이 단순히 아름답고 미학적인 경쟁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성과와 사회적 가치까지 함께 만들어내는 역할로 확대되도록 이바지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Q. 디자이너로서 강한 톤 앤 매너를 가지고 계시지만, 운영 중인 스튜디오는 단지 디자인 철학만으로 움직이지는 않을 것 같아요. 어떤 원칙이나 전략이 함께 작동하고 있을까요?


맞아요. 디자인 프로세스의 A부터 Z까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창업했지만, 디자인 역량과 경영 역량은 다르다는 걸 빨리 깨달았어요. ‘디자인을 잘한다’는 건 사실 매우 주관적인 요소잖아요. 주관적인 역량으로 사업체를 운영하는 건 많은 운을 필요로 하고 불확실성이 높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부동산과 주식 투자 등 추가적인 수익 파이프라인을 만들기 위한 공부를 병행했고, 투자 공부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비즈니스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습니다. 여기서 디자인이 기업의 비즈니스에 미치는 영향과 한계를 명확히 보게 됐어요. 경기가 어려우면 마케팅과 디자인 비용이 가장 먼저 줄어듭니다. 그런데 요즘엔 대 마케팅 시대의 흐름이 와서 사람들이 마케팅은 또 투자라고 생각해요. 결국 디자인은 아직도 소모비용이 돼버렸죠.


그래서 저는 현업 디자이너로서 더 늦기 전에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감성과 미감의 언어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클라이언트의 비즈니스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구조를 설계해야겠다고요.

디자인이 얼마나 클라이언트의 비즈니스에 많은 도움을 주는지 증명하고 싶었죠.


제조 공정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면서 상품성과 품질, 판매가격이 합리적인 균형을 이룰 수 있게 말입니다. 사용자 경험에 예민한 디자이너가 제조 공정을 주도하며 합리적인 가격까지 책정할 수 있게 역할을 확장하면 산업에서 디자이너의 인식이 바뀌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야 망가진 시장에서 올바르게 설 수 있다 생각되고요.




Q. 그렇다면 산업디자인의 일감은 어디서 찾으세요?


성사율 기준으로 말하면 지인 소개가 가장 높아요. 상호 신뢰가 이미 깔려 있어 협의가 빠르며 정확하고요. 그렇기 때문에 디자이너로서 능동적인 영업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웹사이트와 인스타그램, 비핸스, 핀터레스트 등에서 포트폴리오를 보고 메일로 오퍼가 오기도 합니다. 일반적인 디자인 의뢰와 함께 비딩 참여 제안 등의 메일을 받습니다. 성사율은 지인 소개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지만, 신규 거래처나 규모 있는 회사와 연결될 수 있는 중요한 채널입니다.


마지막은 정부지원사업 수행입니다. 예전에는 기술기업과 디자인기업이 각각 심사를 받고 심사위원을 통해 내부에서 매칭을 했는데, 요즘은 사전 밋업을 통해 매칭할 수 있게 형식이 바뀌었어요. 그래서 밋업을 통해 기술기업과의 협업 필요성을 논의하고 핏이 맞는 기업과 컨소시엄을 맺어 함께 참여합니다.


스크린샷 2025-08-17 오후 5.56.23.png 이영우 디자이너의 behance계정




Q. 산업디자이너도 과연 1인 기업으로 운영할 수 있을까요?


네,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인력이 많다고 해서 무조건 잘되는 것도 아니고, 역량 있는 개인이 AI와 고도화된 디자인툴을 활용해 놀라운 성과를 보이는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핵심은 타 분야 전문가인 엔지니어·제조 등 협업 파트너 네트워크를 잘 깔아 두는 겁니다. 가능하면 크루 형태로 일하는 것도 좋고요.


엔지니어링을 요청하는 고객이 디자인을 필요로 하기도 하고, 디자인을 의뢰하는 고객이 알고 보니 제조를 요구하는 일들이 종종 있는데요, 이럴 때 합을 맞춰 움직이면 프로젝트를 수주하기 용이합니다.


또 앞으로는 이런 느슨한 협업이 더 가속화될 거라고 봐요. 요즘 AI가 디자인의 출중한 서포터로서 스케치나 2D 렌더링, 리서치 등 일부 과정을 보조해 주기 때문에, 사람은 판단·결정·조율 같은 핵심적인 영역에 집중하고 역할을 빠르게 분담하는 팀이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크루 형태의 협업 구조가 더 유리할 수 있어요.




* 이영우 님의 인터뷰는 2편에서 계속됩니다.


2편 : 다가올 산업디자인 호황, 기회를 잡는 디자이너의 자세.

- 디자이너의 역할확장

- 저가경쟁을 넘는 전략적 사고

- 디자이너의 주체성



스토리폼 이영우 대표

https://www.instagram.com/leeyoungwoo_storyform/


스토리폼

https://www.storyfor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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