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 고광표 - 스튜디오 산타클로스 (북 디자이너 시리즈 1편)
디지털 콘텐츠가 시장을 주도하고 책 읽는 사람들이 매년 줄어드는 시대, 출판계는 늘 불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책을 디자인하며 자리를 지키는 북 디자이너들.
가을을 맞이해 이번 디자인 머니 컬렉션은 북디자이너 2명을 인터뷰하며 그들의 인사이트를 들여다본다.
1편 : 북디자이너로 살아남기 : 스튜디오 산타클로스 <고광표> 디자이너
2편 : 책을 통해 일감을 만들어가는 1인 스튜디오 이야기 : 스튜디오 보글 <김 누> 디자이너
15년 차 북디자이너 고광표는 “북디자인은 엉덩이 힘이 필요한 일”이라고 말한다.
빠르게 변하는 시대 속에서 긴 호흡으로 한 권의 책을 완성해 내는 일은, 디자인 실력뿐만 아니라 편집자의 교정 내용을 셀 수 없이 반영하며,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쌓아가는 인내·끈기가 필요하다.
출판시장이 변해가는 지금, 그는 여전히 책을 중심으로 자신만의 속도로 북디자이너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책을 둘러싼 산업이야기와, 변화 속에서 자리를 지킨 그의 현실적인 시선과 고민을 들어본다.
안녕하세요. 디자인 스튜디오 산타클로스의 고광표 디자이너입니다.
출판사에서 오랜 기간 북디자이너로 일을 해왔고 2021년 말에 디자인 스튜디오를 오픈해서 북디자인, 포스터 디자인, 일러스트 등 다양한 디자인을 하고 있습니다. 산타클로스라는 이름은 사실 특별한 의미는 없고요, 오랜 고민 끝에 이름을 지을 시기가 마침 크리스마스 시즌이기도 해서 산타클로스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대학교에 다니던 시절, ‘네덜란드 그래픽 디자인’이 크게 유행했어요.
과감하게 타이포그래피를 사용한 포스터들을 보며 깊은 인상을 받았고,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타이포그래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죠. ‘나도 이런 디자인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 같아요.
졸업 후에는 작은 출판사에 입사하면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북디자인을 시작했습니다.
규모가 작은 회사였던 만큼 체계적인 시스템보다는 직접 부딪히며 배우는 환경이었고, 그 과정에서 출판사가 어떤 식으로 운영되는지 알 수 있었어요.
첫 작업은 컴퓨터 실무서였는데, 누구에게 물어볼 수 없는 환경이어서 혼자 시도하며 완성했어요. 제가 디자인한 책이 실제로 출간되었을 때 매우 감격스러웠던 감정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작은 회사나 큰 회사나, 북디자인의 전체적인 프로세스는 비슷할 것 같아요.
먼저 샘플 원고와 디자인 발주서를 받습니다. 발주서의 경우 책 소개, 원하는 디자인 방향, 더 구체적으로는 경쟁도서나 기획의도 등이 담겨있기도 해요. 그러나 실제로는 시안용 샘플 원고만 전달받는 경우도 많습니다.
원고를 받은 후 디자이너는 본문(내지) 시안을 잡습니다. 이 시안을 편집자에게 전달해 시안이 통과되면 ‘조판’ 단계로 넘어가요. 조판은 원고 전체를 넣는 것을 뜻하고요 이후 편집자가 교정을 보며 텍스트를 수정·보완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편집자는 총 3-4교에 걸쳐 수정 사항을 표시하고, 디자이너는 그 피드백을 직접 인디자인 프로그램에 반영해 본문을 고쳐 나갑니다. 300페이지가 넘는 책이라면 이 작업을 여러 차례 반복해야 해서, 인내가 필요한 과정이에요.
예전엔 빨간색 펜으로 표기된 인쇄된 교정지를 주고받으며 수정했는데, 요즘에는 PDF로 교정지를 주고받아 조금 수월해졌어요.
이 과정과 거의 동시에 표지 디자인 발주가 들어옵니다.
표지는 마케팅적으로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출판사에서는 고심하여 제목을 확정하고 디자이너에게 표지 작업을 의뢰합니다. 그래서 표지디자인 요청에는 본문보다 더 구체적인 가이드가 제공되는 편이에요. 디자이너는 그 정보를 바탕으로 보통 3안 이상, 많게는 4~5안의 시안을 제시합니다. 표지 방향이 확정되면 그 톤 앤 매너를 본문 목차나 내지 디자인에도 반영해, 책 전체의 인상을 하나로 통일합니다. 이렇게 표지와 본문이 함께 완성될 때 비로소 한 권의 책이 완성돼요.
북디자이너로 일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디자이너는 엉덩이가 무거워야 한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때는 어리둥절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공감해요.
북디자인은 긴 호흡이 필요한 일이거든요.
책 한 권이 완성되기까지는 텍스트 수정만 3~4교 이상 오가기도 하고요. 텍스트를 수정하고 그에 따라 본문을 다시 정리하는 반복되는 작업이 생각보다 많아요. 그래서 묵묵히 버티는 인내심이 중요합니다.
또 꼼꼼함도 중요해요. 오타를 잡는 건 편집자의 영역이지만 인디자인 프로그램을 다루면서도 사고는 늘 생길 수 있거든요. 인쇄사고는 한 번만 나도 큰 손실이 생기니까요.
또 독자들은 책의 내용뿐 아니라 디자인의 완성도에도 민감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시각적인 감각과 트렌드를 업데이트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각 디자이너의 차이라기보다, 분야마다 요구되는 북 디자인 스타일이 있는 것 같아요.
또 프리랜서의 경우 출판사는 포트폴리오를 보고 디자이너를 선정하기 때문에, 한 분야의 포트폴리오를 많이 갖고 있다면 자연스럽게 그 분야의 일을 주로 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문학이나 에세이 쪽 포트폴리오가 많은 디자이너라면 이와 비슷한 작업들을 많이 하게 되겠죠.
반대로 실용서나 아동서 등을 주로 해 온 디자이너가 문학 쪽의 일을 받기는 쉽지 않아요. 해당 분야의 포트폴리오가 없기 때문이에요.
게다가 광고나 브랜딩 분야에서 북디자인으로 옮기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책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일하는 방식이나 디자인을 도출해 내는 과정 등이 타 카테고리와 많이 다르고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그런 의미에서는 약간 보수적인 산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결국 업계 안에서 이미 입증된 디자이너나, 꾸준히 자신의 스타일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기회를 얻는 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분야로 옮기거나 확장하고 싶다면, 스스로 해당 방향의 포트폴리오를 새로 만들어보는 노력이 필요해요.
주어진 일만 하기보다 개인적으로라도 새로운 스타일을 실험해 보는 과정이 있어야, 조금씩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을 거예요.
제가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는 ‘쿽익스프레스(QuarkXPress)’에서 ‘인디자인(InDesign)’으로 막 넘어가던 시기였습니다.
쿽에서는 각주 자동 매달기가 안되어서 텍스트 수정할 때마다 각주도 수동으로 다 옮겨줘야 했어요. 또 특정 영역을 잘못 건드리면 자동으로 꺼지는 기능(?)이 있어서 그 부분에 마우스가 닿지 않게 조심해야 했고요. 왜 그런지는 아직도 미스터리이네요.(웃음) 이 외에도 자잘한 기능적 제약 때문에 작업 속도가 인디자인에 비해 많이 느렸습니다. 인디자인 등장 이후 작업 효율이 눈에 띄게 좋아졌죠.
또 예전에는 편집자들이 수정 사항을 인쇄된 교정지에 빨간펜으로 표기해 건네주곤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 PDF 파일을 주고받으며 교정과 피드백을 진행하는 방식으로 바뀌었고요.
전반적인 프로세스는 비슷하지만, 도구와 방식이 훨씬 효율적이고 빠르게 진화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출판계에는 오래된 구인구직 사이트가 하나 있어요. '북에디터(Book Editor)’라는 곳인데, 지금도 현업 디자이너와 편집자들이 활발하게 이용하는 사이트입니다.
웃음이 나올 만큼 오래된 UX·UI를 고집하고 있는 사이트예요. 직접 들어가 보시면 정말 깜짝 놀라실 거예요.
인터페이스는 거의 윈도우 98 시절 그대로지만, 그만큼 오랫동안 신뢰를 쌓아온 곳입니다. 대형 출판사부터 작은 출판사까지 대부분 이곳을 통해 구인구직을 진행하고요.
또 사람을 통해 일이 들어오기도 합니다.
사업 초기에 이전 회사에서 함께 일했던 편집자나 선배 디자이너, 혹은 스쳐 지나간 인연 등이 연락을 주는 경우가 종종 있었어요. 이후에는 메일로 포트폴리오를 보내 연결되는 경우나 SNS 등에 올린 포트폴리오를 보고 연락이 오기도 했고요. 이렇게 알게 된 업체들과 신뢰가 생기면 다음 프로젝트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네 분명히 변화는 있는 것 같아요.
반디 앤 루니스나 영풍문고 같은 대형서점들도 문을 닫고 있고, 동네 터줏대감 같이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는 서점들도 하나 둘 사라지고 있어요.
베스트셀러라고 하면 몇십만 부, 많게는 백만 부까지 팔리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10만 부만 넘어도 ‘대박’이라고 하더라고요. 취미로 혹은 지식을 얻기 위해 책을 읽던 사람들이 이제는 유튜브나 영상 콘텐츠로 눈을 돌리면서 자연스럽게 책 시장 전체가 줄어드는 추세인 것 같습니다.
초판 인쇄 부수도 많이 줄었어요.
예전엔 초판을 2,3천 부 이상 찍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보다도 더 적게 찍는 것 같더라고요. 물론 책에 따라 다르겠지만요.
다른 북 디자이너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디자인 단가 역시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한 수준이라는 이야기도 종종 들려요.
전반적으로 출판 시장의 규모가 예전과 같진 않고, 이런 흐름이 북디자인 업계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회사를 다니던 시절엔 프리랜서 북디자이너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어요.
책의 ‘앞날개’를 보면 디자이너 이름이 적혀 있는데, 늘 같은 몇 명의 이름만 보이더라고요. 그분들이 프리랜서로 활발히 활동하는 걸 보고 ‘나도 독립하면 일할 기회가 많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매우 단순한 생각을 했던 것 같네요. 그게 10년 전쯤 이야기예요.
하지만 막상 회사를 나와 스튜디오를 열었을 땐, 시장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죠.
종이책 시장은 점점 축소되고 있지만, 반대로 프리랜서 디자이너는 훨씬 많아진 것 같아요. 저 역시 예전엔 ‘희망’을 보고 나왔지만, 현실은 훨씬 경쟁이 치열하다는 걸 금방 느꼈고요.
그래도 완전히 비관적으로 보진 않아요. 저 역시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여러 실험을 하고 있고, 최근엔 북디자인의 연장선에서 일러스트 작업을 병행하며 개인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에요.
그림을 디지털화하거나, 포스터 형태로 확장하는 시도들이죠.
종이책 시장이 줄어드는 만큼, 디자이너에게도 ‘새로운 표현 방식’을 찾는 게 점점 더 중요해지는 것 같습니다. 북디자인을 기반으로 하되, 그 경계를 조금씩 넓혀보는 중이에요.
AI가 디자인의 여러 영역을 빠르게 바꾸고 있지만, 북디자인은 여전히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이 많아요.
특히 책은 인쇄 사고가 나면 안 되기 때문에 AI에게 전적으로 맡기기엔 아직 일러요. 한번 인쇄되면 되돌릴 수 없으니까요.
다만 표지 디자인은 멀지 않은 시기에 AI의 영향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출판사에서 AI를 활용해 표지에 들어갈 이미지를 만들게 된다면 디자이너가 해왔던 역할이 많이 줄어드는 거거든요. 지금은 이렇게 진행하는 경우는 없지만 AI의 발전 속도를 본다면 멀지 않은 미래에는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러면 디자인 단가는 그만큼 올라갈 수가 없을 거예요.
그래서 저는 오히려 AI가 쉽게 대체할 수 없는 ‘나만의 스타일’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북디자이너로서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결국 표지디자인이에요. 표지디자인이 좋으면 다음 작업으로 이어지고, 그만큼 신뢰도와 함께 단가도 높아질 수 있거든요.
내지 디자인도 물론 너무나 중요하고 기술적인 숙련이 필요한 영역이지만 표지디자인보다는 표현의 폭이 좁아요. 표지디자인은 디자이너의 감각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영역이니까요.
결국 자신의 스타일과 미감을 유지하는 것이 북디자이너에게 가장 중요한 준비라고 생각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일만 해서는 안 되겠다는 현실적인 생각이 들었어요.
한 분야에서 오래 일하다 보니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했고요. 그래서 로고나 웹디자인 등 다른 영역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어 크몽 같은 플랫폼에서 로고 디자인 의뢰를 받아보기도 했는데, 수익보다는 ‘연습’이라 생각하고 하다 보니 오히려 재미있더라고요.
하지만 그 분야엔 이미 오래된 실력자들이 많았고, 그들의 수준을 따라가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하겠다는 걸 느꼈습니다.
다시 돌아와 어떤 분야를 하면 좋을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일러스트였어요. 디자인을 하기 전부터 저의 오랜 취미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내 디자인과 접목하면 너무 좋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직접 그린 그림을 활용해 포스터나 디자인 작업에 적용해 보는 제 나름대로의 실험을 시작했고요, 그 과정에서 운 좋게 관공서 포스터 작업을 맡아보기도 했어요.
이 방향을 통해 더 발전해 볼 수 있겠다는 확신도 생겼고요. 이후로는 개인 프로젝트들을 통해 다양한 스타일을 연습하면서 조금씩 저만의 일을 만들고 있습니다.
물론 북 디자인은 계속할 거예요. 북 디자인을 그만두는 건 저에게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같은 일이기도 해서요.
하지만 북디자인뿐만 아니라 그래픽 디자인으로도 확장해나가고 싶어요. 꾸준히 개인 프로젝트를 통해 포스터 작업 등을 하며 포트폴리오를 쌓고 스스로의 스타일을 만들어가는 중입니다. 이게 쌓이다 보면 정말 큰 자산이 될 것이라 생각해요.
앞으로 이 작업을 꾸준히 하는 것이 목표예요.
고광표 디자이너는 종이의 온기와 디지털의 가능성 사이에서 자신만의 속도로 균형을 잡아가고 있다.
책을 만드는 일에서 시작해, 일러스트와 그래픽으로 확장되는 그의 여정은 ‘변화 속에서도 본질을 잃지 않는 북 디자이너’의 모습 그 자체다.
그 균형감이야말로 디자이너들이 배워야 할 진짜 실력일 것이다.
고광표 디자이너의 <스튜디오 산타클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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