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J Jul 26. 2024

외로운 나는 왜 이렇게 혼자이길 갈망하는가

오직 집 안에서만


나는 타인의 인간성에 관심이 많다.

나의 바운더리 근처로 유입된 사람이라면 이 사람은 어떤 성장 환경을 거쳐 왔는지, 특히 싫어하고 유난히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어떤 종류의 사람과 쉽게 친해지고 쉽게 멀어지는지 또는 어떤 모습을 견디기 힘들어하고 어떤 모습에 매력을 느끼는지 같은 것들을 궁금해한다.

이런 물음표들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시간을 보내고 대화하면서 상대의 고유한 특성에 대한 이해와 살아온 서사에 대한 감동이나 공감, 그에 따른 친근감으로 느낌표와 마침표가 될 때 나는 가치 있는 즐거움을 느낀다.


물론 모든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이 과정을 다 지향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는 오픈하는 자기 이야기를 내게는 오픈하지 않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며 나도 누군가에겐 그럴 수 있다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나와 맞는 사람들을 제법 잘 그리고 둥글게 걸러낼 줄 알게 된 서른다섯의 지금의 나는 이 균형감으로 가까운 사람들(그래서 매우 소수)과 즐겁게 잘 지내고 있다. 주기적으로 모여 교제의 시간을 갖지 않으면 곧잘 적적함을 느끼고 어떻게든 모일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마련해 볼까 늘 고민까지 하고 있으니 나는 분명 외로움도 타고 사람도 좋아하는 사회적 동물이 맞다.


그런데 이런 사회적 동물인 내가 왜 집에만 있으면 땅굴 파 숨어버리고 싶은 그냥 동물과 같아지는 것일까.

여보 하는 남편의 소리, 엄마 엄마 하는 아이들의 소리에 반사적으로 미간이 찌푸려지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아니 사실 언제부터였는지는 이 문제에서 그리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무엇이 나를 집에서 눈 감고 귀 막고 숨어버리고 싶은 두더지로 만들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쟁점이다.


나는 파악해 보기로 했다.

주로 어떤 앞뒤 상황에서 그들이 나를 부를 때 내 미간이 찌푸려지는가에 대해 가늠해 보니 생각보다 답이 쉽게 나왔다.


요구.

그것도 반복된 요구.


일방적이고 반복된 요구는 사람을 지치게 한다. 이것은 웬만한 사람이면 다 동의할 수 있는 문장이다.

웬만한 사람은 다 동의하는 이 개념이 내 집안에서는 아직 상식화, 일반화되지 않은 것이 사회적 동물의 두더지화 현상의 직접적 원인이었다.


누군가는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손 많이 가는 막둥이 남자를 남편으로 고르래?

그렇다. 나는 손 많이 가고 자주 달래줘야 하는 남자와 (미쳐서) 결혼했고 마찬가지로 손 많이 가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대부분의 대소사를 다 해줘야 되는 남자어린이 둘을 낳았다.


엄마 이거 해줘 저거 해줘 이게 이렇게 됐어 저게 안돼 엄마 엄마 엄마

여보 내 옷 여보 내 셔츠 여보 내 작업복 여보 이거 해줘 저거 해줘 여보 나 힘들어 주물러줘 배고파


하루종일 집안에 울려 퍼지는 요구의 외침들, 엄마와 여보는 애칭이 아니라 요구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름으로 불리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고 움직여야 하고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며 해결책을 찾아 제공해야 한다. 서글픈 현실은 모든 스코어를 통과하면 서부전선 이상없다가 되고 하나라도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쏟아지는 원망의 총알을 맨 몸으로 막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억울하다. 나는 너희에게 요구하지 않는데 너희는 왜 내 숨소리만 들려도 요구의 퍼레이드를 시작하는 것인가.



오늘도 여지없이 시작되는 요구 퍼레이드에 숨이 턱 막혀온 나는 점심을 먹은 지 3시간밖에 되지 않았지만 스트레스 호르몬 분비로 시작된 가짜 식욕에 기꺼이 나를 내어주고 찬장에서 육개장을 꺼내 물을 부은 뒤 에어컨 바람이 닿지 않아 30도에 육박해 있는 보조주방으로 도망쳤다.

콧속으로 훅 하고 들어오는 습한 더위도 괜찮다. 너희와 잠시라도 떨어져 바닥난 내 도파민을 최소한으로 올려 줄 이 적당히 맵고 짜고 단 컵라면을 후루룩 들이킬 단 5분이면 된다.


바닥에 철퍽 앉아 면이 불길 기다리며 이 집에서 나한테 가장 요구가 적은 무늬산호수와 홍콩야자와 프테리스, 다육이 두 개를 바라본다. (그 와중에 유칼립투스는 온도와 수분에 너무 예민해 요구가 적다고 할 수 없어 뺀다)


이들이 심어져 있는 화분은 물 주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자동 저면관수 화분으로서 식물을 사 오는 족족 사망케 하는 내게 남편이 대안으로 마련해 준 화분이다.

처음엔 이게 된다고? 싶었지만 뿌리가 필요한 만큼만 알아서 물을 빨아들여 무럭무럭 자라나는 식물들을 보며 이 저면관수 화분의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한 꺼풀 가라앉은 마음으로 식물들을 보고 있으려니 나를 쿡쿡 찔러대는 이 아이러니를 모른 척할 수가 없다.


요구에 지쳐 도망쳐와 마음을 달래며 보는 화분이 나를 가장 지치게 만드는 요구 덩어리 남편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라는 아이러니.

그럼 나는 또 마음을 달랠 수밖에.

그래 나한테 이것저것 원하는 게 많긴 하지만 본인도 나에게 뭔가를 해주려고 한다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진 말자고 되뇌어본다.


어쩌면 요구와 사랑은 다른 차원에서 살아 숨 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보조 주방에는 5분 동안 얼씬도 말라는 내 엄포를 들은 8살 첫째가(평소 눈치 없음) 동생이 보조주방의 문을 열어재끼려 하자 제지시키며 들어가지 말라고 하는 목소리가 굳게 닫힌 문을 비집고 가냘프게 새어 들어왔을 때, 나는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고 싶어졌다.


그래, 나는 가족들을 사랑한다. 아마 그들도 나를 사랑할 거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요구더미 앞에서는 두더지가 되고 싶다.

근데 두더지가 되고 싶으면 어떠랴, 그들의 요구가 생존을 위한 필수이고 당연한 것이라면

나의 두더지화도 당연스러운 생존 반응인 것을.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두더지가 되지 않겠다는 다짐은 하지 않는다.


그저, 오늘보다 내일은 조금 더 의연하고 유연한 두더지로 살겠다.



작가의 이전글 단순함이 결정하는 삶의 중대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