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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강PD Nov 02. 2021

내가 감히 엄마가 되버렸다.

엄마에게서 엄마에게로, 외할머니에게서 증손녀에게로.

삼일운동이 일어난 해에 태어난 김남엽 여사께서는 마흔한살에 일곱번째 자식, 네번째 딸을 낳으셨지요. 그 딸이 일찌감치 결혼해 스물두살에 저를 낳아주신 강승례 여사입니다. 내게는 젊디젊은 엄마가 늘 자랑이었지만, 결혼은 천천히 해도 된다는 응원에 힘입어 큰딸은 서른다섯살에 엄마가 되었다지요. 성씨는 물려주지 못했지만 엄마에서 엄마로 이어지는 사진을 꼭 찍고 싶어서 만삭에 병원에서 찍어둔 셀카입니다. 여전히 정정하신 할머니랑 1/8정도 할머니를 닮은 아기가 함께하는 기념사진을 찍으며, 해마다 오래오래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장흥 할머니가 많이 편찮으시다.(외할머니, 사전적 의미로 어머니의 친정어머니를 이르는 말. 바깥외(외)자를 쓰는게 마음에 들지 않아 쓰고 싶지 않으므로 장흥 할머니 되시겠다.) 꼿꼿한 자세로 담뱃불을 붙이시는 모습은 여전하신데, 며느리에 대한 의심과 원망, 분노와 짜증이 날 것으로 표출되며 예전의 너그럽고 온화하던 성정은 빛이 바랬다. 그동안 부양하고 수발들어준 며느리에게 정을 떼려는가 보다고 했지만, 그 기간은 생각보다 장기간 지속되었고, 그저 형제자매들이 방관할 수 없을 지경으로 그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 

 빨리 죽어야겠다는 푸념도 십수년째다. 손녀딸 대통령 선거 출마하면 한표 찍어주셔야 하는데 무슨소리냐고 너스레를 떨어보지만, 서로간의 건강한 모습, 좋은 기억만 품고 이별하기를 마음속에 바라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부암 진단을 받고 냉동치료를 위해 엄마와 외할머니가 함께 동행하던 날, 마음 깊은 곳이 저릿했다. 뱃속에 생명을 품고 있었던 탓이었을까. 할머니의 탄생부터 성장, 결혼과 출산으로 이어지는 시간들을 나혼자 더듬어보다가 역사책속의 근현대사를 관통해온 그녀 삶의 애환을 떠올리자, 삶이라는게 새삼 몹시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일제시대, 그리고 해방, 독재정권과 민주화, 그리고 단축번호 7번으로 7번째 딸래미를 호출할 수 있는 오늘까지. 제도권 교육의 바깥에서 글을 깨쳤고, 이십년 남짓 계속되는 출산과 양육의 굴레속에서 벗어날때즈음 가모장이 되어버려, 삯바느질로 생계를 책임졌다고 했다. 그 와중에 먼저 떠나보낸 자식도 있고, 바닷가 생활을 정리하고 자식들을 따라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나의 어머니는 나를 품고 있을 적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므로, 내게 외할머니는 늘 혼자였다. 환갑, 칠순, 그리고 자녀들의 결혼식. 할머니는 늘 혼자였지만 꿋꿋했고, 든든한 기둥이었으며, 여덟 형제자매, 스물여명의 손주들의 버팀목이었다. 혹시나 외손주가 오면 새뱃돈을 챙겨주어야 한다고, 꽁꽁 옷장속에 숨겨두었던 쌈짓돈을 꺼내시던 모습, 이제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손주에게 작은 노트에 전화번호를 정리해야 한다고 부탁하시던 모습, 아주 사소한 일들이 애틋하게 남아있는건 내가 외손주였기 때문이고, 그녀가 외할머니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가부장제의 시스템 바깥에 놓여진 관계. 제도가 보장해주지 않지만, 생물학적으로 연결된 관계 속에서 그녀는 나와 내 자매들을 대할때마다 눈물을 보였고, 난 그 눈물이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엄마는 이혼녀다. 4.19혁명의 해에 태어났고, 스무살때 서울의 봄을 맞이했으며, 산업화의 수출역군으로 국가경제성장에 이바지했다는 베이비붐세대의 지극히 평범한 어머니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대단한 부를 축적하지는 못했으나, 노점상에서 시작해서 아시아 3개국을 누비는 무역상이 되기까지, 그녀는 스스로 슈퍼우먼이 되고자 했다. 남편의 여동생에게 육아와 가사노동을 지원받고, 가사도우미를 고용할지언정 그 최종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은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새벽시장을 다녀와서 아침밥상을 차려내는 일, 학교나 학원에 부모님 대표로 호출되어 진로상담을 담당하는 일, 오롯이 전적으로 엄마의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심으로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여겼다. 자신이 못 이뤘으니 내가 대신 아들을 낳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대관절 아들이 뭐라고, 일찌감치 머리가 굵어진 딸래미의 인생이 가부장제와의 투쟁이었다는 사실을 그녀가 알리는 없다. 


 이혼은 범죄가 아니고 선택의 문제다. 스물세살을 여름날, 이혼을 준비중인 부모님께도 말씀드렸다. 지금보다 더 행복한 삶을 위한 선택인만큼 앞으로 후회하지 않을 만큼 행복하게 살아주시면 그 뿐, 난 당신들의 이혼을 막는 핑계가 되고 싶지는 않다. 고 했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엄마는 내 바램처럼 새로운 인연을 만나서 연애중이다. 영화 취향이 맞지 않는다고 투덜거리고, 남자친구의 깔끔한 정리정돈 습관을 칭찬한다. 당신은 요리에 재능이 있어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하지만, 서른넘은 딸래미들의 반찬을 챙기는 노동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으며, 독립적인 삶을 위한 임노동자의 삶도 병행하고 있다. 


 나 스스로 일하는 어머니의 삶을 납득하던 순간을 기억한다. 비가 내리던 하교시간, 문앞에 우산을 든 엄마들의 행렬이 이어졌고, 나는 없을줄 알면서도 엄마를 찾았다. 빗속에 눈물을 숨겨서 돌아온 날, 어버이날 편지쓰기 숙제를 했고, 이 편지글을 눈여겨보신 선생님의 추천으로 울면서 교내방송에 낭독까지 했으므로 여러모로 복기할 수 밖에 없는 기억이 되어버렸다. 엄마라는 따뜻한 단어뒤에 숨어있는 그 처절한 버둥거림을 알아채기 시작하면서, 감히 엄마를 꿈꾸지도 못하고, 차마 엄마가 될 자신도 없던 내가, 엄마가 되어버렸다.


 임신소식을 확인하고 처음 읽은 책음 '엄마의 탄생'이었다. 마을 언니들이 북콘서트의 감동을 이야기할때는 그냥 흘려들었는데, 막상 내 앞에 임신과 출산이 닥치게 되니, 막연했던 미래의 구체적인 가이드가 필요했다. 산후조리원을 거부하고, 친정엄마집에서 몸조리를 하기로 했다. 육아박람회와 키즈까페는 멀리하되, 비슷한 철학과 신념을 공유한 엄마 커뮤니티에 몸을 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서른 다섯까지의 삶이 그러했듯이, 앞으로도 덤덤히 내 판단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득문득 아기에게 해주지 못한 많은 것들이 미안해졌으며, 자꾸만 공교육이 아닌 새로운 방식의 교육에 욕심이 생겼다. 


 할머니의 삶이 가난과의 고군분투였다면, 엄마의 삶은 사회적 편견과의 싸움이었고, 나는 흘러넘치는 정보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셈이었다. 알면 알수록 모를 일들이 많다고, 더 청결하고자 사용했던 가습기 살균제가 공기를 오염시키고, 미디어에서는 기저귀에서 발암물질이 검출되었다고 요란을 떠는데, 정작 리콜은 되지 않는다. 아기에게 적정한 시기에 적절한 교육이 필요하다며 뭐라도 시켜야 할 것 같은 분위기지만, 실은 지금의 시기가 나에게도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에 공감해주는 사람은 많지 않다. 


 육아휴직기간중에 함께 일해볼 생각이 없냐는 제안을 받았다. 고립되고 도태될까 걱정하던 시절에 꽤 큰 응원이 되었더랬다. 내 복귀를 기다리고 있다는 동료의 문자도 받았다. 이렇게저렇게 심란해하던 나에게 어쨌든 돌아오면 좋겠다던 의견을 전하던 이었다. 출산과 육아로 일자리에서 밀리고, 부당대우를 받는 사례는 널리고 널렸고, 통계적으로도 이미 뻔한 결과가 나와있는 상황에 미담이라기도 너무 사소한 사건이었지만, 당시의 당사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힘이었다. 


 일찌감치 육아에게 내 삶을 온전히 저당잡히지 않겠다고 선언해왔고, 예정대로 복직해서 워킹맘으로 살아낸지 이제 겨우 6개월차. 칼퇴근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관습이 문제인지, 그렇게 일할수밖에 없는 조직문화가 문제인지, 딸래미와 함께 먹는 저녁조차도 쉽지 않은 미션이 되었고, 3가족이 함께하는 주중식사는 간신히 손가락에 꼽을 정도인 상황이다. 자식들의 출가와 함께 뒤늦게 꿈을 펼쳐보려던 시어머니는 이십대의 노동을 다시 반복중이고, 그때와 같은 체력과 건강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타까워하신다.   

 

 패치워커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노동법에 보장된 권리를 다 누리는 공무원을 부러워하다가, 월급이라도 많은 대기업이라면 어땠을까를 상상하다가 저 단어를 알게되고 너무나 반가웠다. 갈팡질팡 아무런 전문성을 갖추지 못한채 이런저런 일들을 전전했던 내게도 경쟁력이 있다면, 이런저런 경험들을 날실과 씨실로 엮어낼 수 있다는 것. '단절'이라는 말로 외부에서 함부로 재단할 수 없는, 변화하는 상황에 능동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힘이 미래사회에는 경쟁력이라는 말씀되시겠다. 4차 산업혁명이 시작되면 대부분의 직업이 없어진다는데, 미래시대에 조금 먼저 적응하는셈치고, 누구의 삶도 인질삼지 않는 조화로운 시간을 꿈꿔본다. 



2017년 12월

(재)인천문화재단의 지원사업으로 출간된 책

워킹맘들의 생존기 1Q83에 실린 원고


이건 서랍장에만 꼭꼭 담아두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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