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오토바이와 사람 만나는 일을 좋아하는 지타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올해 호주에 다녀왔죠? 호주는 어떤 목적으로 다녀왔나요?
해외 여러 곳을 가는 것보다, 국내 각 지역에서 사람을 만나는 일이 저에게는 더 즐거운 일이에요. 그런데 영국에 있던 지인이 '해외로 나와보는 건 어때?'라는 제안을 했어요. '해외에 있는 한국인을 만나도 재밌겠다.'라는 생각으로 영국 여행을 준비하던 중 일정이 틀어져서 영국 대신 호주로 여행지가 바뀌긴 했지만요. 마침 호주에 있는 동생들을 만날 겸 시드니로 떠났죠.
호주에서 다양한 것을 경험하고 느꼈을 텐데, 어떤 점이 인상 깊게 남아있나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한국에서 오토바이 타는 사람들이 떠오르더라고요. 오토바이를 타고 오토바이 타는 이들을 만나면서 설명할 수 없는 좋은 기분과 해방감을 느꼈는데, 그때는 이유를 몰랐어요. 그저 오토바이를 함께 타서 좋은 줄 알았는데, 여유와 낭만이 있는 호주 라이프 스타일을 보면서 제가 왜 오토바이 타는 사람을 좋아하게 됐는지를 명확하게 알게 됐죠.
호주의 삶이 제가 지향하는 삶이지만, 저는 이걸 한국에서 풀고 싶어요. 해외가 아니라 한국에서 제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거든요.
대외적으로 <화랑모티브> 사장님으로 알려져 있는데, 직장도 다니고 있잖아요.
삼성이라는 회사에는 다양한 부서가 있는데요. 그중 제 근무처는 3119예요. 처음 듣는 분이 대다수일 텐데요. 사내 소방서라고 생각하시면 이해가 편하실 거예요. 소방차를 타고 화재를 진압하거나 구급차를 타고 의료 지원을 가기도 하죠.
그러면 상황이 발생했을 때 119에 연락하지 않고 내부적으로 처리하는 건가요?
그건 아니에요. 규모에 따라 많이 다르겠지만, 현재 근무 중인 울산 공장에는 배터리를 폭발시키는 테스트룸이 있어요. 극한에 상황에 놓인 배터리의 안전성을 시험하는 거죠. 당연히 테스트룸은 예방 시설이 모두 갖춰진 곳이지만,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 현장에서 대기하는 거죠.
소방 관련 경력이 있나 봐요.
그건 아니에요. 첫 직장은 LG였어요. 꿈을 찾는 도전을 위해 퇴사했다가 실패해서 지금 회사로 재취업한 케이스죠. LG라는 경력이 있어서 비교적 어렵지 않게 입사할 수 있었어요.
처음 LG에 입사했을 때는 누가 봐도 대기업 사원처럼 하고 다녔어요. LG의 일원이라는 프라이드도 있었죠. 반면 지금 회사는 반항아처럼 입사했어요. 실망감에 절어서 어쩔 수 없이 취업을 한 거라, 머리도 지금처럼 장발이었고 문신도 있었죠. 출근할 때도 하와이안 셔츠에 오토바이를 탔어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삼성맨의 이미지랑 정 반대죠(웃음).
하지만 본인은 편했겠어요.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를 처음부터 보여준 거잖아요.
일부러 더 드러냈어요. '나 이런 사람이야.'를 보여주려고요. 그래서인지 일반 사원이 하는 업무가 아니라 관리자를 보좌하며 업무를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됐어요. 이후 조직 변화로 부서가 사라지면서 지금의 3119에 오게 됐죠. 당시에 제가 보좌하던 분과 함께 해외 부서로 갈 수도 있었지만 한국에 남기로 했어요. 가족도 모두 한국에 있고 여기서도 이미 잘 지내고 있었으니까요.
남들에게는 좋은 기회로 보였을 텐데, 기회를 잡지 않았네요.
부서장님도 '나랑 몇 년만 지내고 돌아오면 앞으로 회사 생활이 편해질 거다.'라고 하셨지만 해외에서 살고 싶지 않더라고요. 한국에 남겠다고 하고 대신 집이랑 가까운 울산 사업장으로 가고 싶다고 했죠. 사실 처음 입사할 때부터 울산 사업장에 가고 싶었거든요.
당시에는 몰랐는데 3119가 희망하는 사람이 많은 인기부서더라고요. 그래서 이 이야기를 설명하는 게 참 애매해요. 어쨌든 사내 정치질인 셈이거든요. 조직 변화로 장이 바뀌고, 부서를 지키느냐 못하느냐 하는 과정에서 여기에 오게 된 거라서요. 처음 울산에 왔을 때는 다들 어떻게 왔냐고 놀라는 분위기였어요.
부서가 바뀌고 새로운 업무를 맡는 일은 항상 쉽지 않지만, 특히 3119 업무는 특수성이 강해서 어려움이 많았겠어요.
맞아요. 소방차를 운전해야 해서 대형 면허도 땄어요. 3교대, 24시간 안전을 담당하기 때문에 안전 관련 자격증도 취득했고요. 당장 내년에는 응급구조사 자격증도 취득해야 해요. 그런데 저처럼 다른 업무를 하다 이곳에 오신 분도 있어서 못해낼 건 아닌 것 같아요. 일을 크게 사무직, 현장직으로 나눈다면 현재 업무는 현장에 가까워요. 저는 현장에 더 잘 맞는 사람이라 다행이죠(웃음).
직장 생활이 잘 맞나 봐요.
그렇게 보였다면 다행인데요. 사실 회사에서는 크게 에너지를 많이 안 쓰려고 해요. 최소한의 에너지로 근무하고 퇴근 후에 남는 에너지를 써야 하거든요.
좀 전에 들은 이야기로는 회사에서 에너지를 얻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반대인가 보네요.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출근할 때 눈물이 날 정도였어요. 정말 가기 싫었거든요. 제가 앞으로 얼마나 회사를 다닐지 모르고 업무가 다시 바뀔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엄청난 무게감으로 이곳을 평생직장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나마 울산으로 근무지가 바뀌면서 생각이 많이 바꿨어요. 회사에 다니기 때문에 대출을 받아 건물도 지을 수 있었으니까요(웃음). 내가 원하는 걸 취했으니 반대로 내 시간도 회사에 할애해야죠.
삼성에 입사할 때 마인드가 달라졌다고 했는데요. LG에 입사할 당시에는 어떤 마인드였나요?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중학교 때까지 제 꿈은 개그맨이었어요. 개그맨이 되려면 서울에 가야겠다는 생각에 서울로 유학 가겠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렸죠. 부모님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공무원과 대기업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셨어요. 심지어 제가 4대 독자거든요. 저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어른이 부모님이셨기 때문에 두 분의 말을 따르기로 했죠.
솔직히 당시에는 경주라는 우물에 갇혀 있다고 생각했어요. 경주를 탈출하기 위해 '대기업에 취직하려면 타지에 있는 고등학교에 가야 한다'라며 두 분을 설득했고 구미로 유학을 떠났죠. 이후 실제로 LG에 입사하게 됐고요. 부모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꿈도 포기하고 실제로 대기업에 입사했는데,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어요. 한마디로 대기업에 취직하면 행복할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더라고요. 물론 LG라는 뽕에 취했던 기간이 있었지만 오래가지 못했어요.
빨간 약을 선택했군요.
적극적인 제 모습을 회사에서는 싫어했어요. 관리자나 선배들이 저를 자제시키기 시작했죠. 제 생각에는 해야 하는데 하지 말라는 소리를 들었으니까요. 올바르지 못하다고 생각했지만 순응해야만 했어요. '내 생각과 회사 생활은 다르게 흘러가는구나.'라고 생각하며 회사에서는 적당히 일하고 퇴근한 후에는 붕어빵 장사를 했죠.
붕어빵 장사라니. 생각지 못한 답인데요. 붕어빵 장사를 하면서 퇴사를 결심하게 된 건가요?
사내 정치질에 허무함을 느끼고 '남는 에너지를 다르게 소비해 보자.'는 생각에서 시작하게 됐죠. 제가 붕어빵을 좋아하기도 하고요(웃음).
붕어빵 장사가 규모는 작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야 해요. 위치 선정, 자재 수급, 제조 수량과 판매까지요. 그때 직접 만든 결과물에 대한 피드백을 받고 서로 유대가 생기는 일에 매력을 느꼈어요. 시킨 일만 해오다가 처음 스스로 무언가를 했으니까요.
처음 하는 장사가 순탄치만은 않았겠죠?
붕어빵 장사가 민원과의 싸움이거든요. 같은 장소에서 두 번 신고받으면 모든 집기를 다 뺏겨요. 그래서 한 번은 여기서 장사를 하고, 한 번은 저기서 장사를 하며 왔다 갔다 했죠. 이런 제 상황을 알게 된 지인 분이, 선뜻 본인 건물에서 장사를 하라고 하셨어요. 덕분에 이후로는 편하게 장사할 수 있었죠. 겨울이 끝날 무렵 '어차피 붕어빵은 한 계절밖에 못하는데, 내가 공간을 더 내줄 테니까 다른 걸 해봐.'라는 제안도 받았어요.
장사가 잘 됐나 봐요.
놀이공원처럼 줄을 길게 설 정도로 장사가 잘 되기도 했지만, 매일 같은 시간에 나와서 장사를 하는 모습을 성실하게, 기특하게 보신 것 같아요. 너무 감사했지만 바로 장사를 시작하기 보다, 무엇을 해야할 지 고민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어요.
타투와 맥주 브루잉, 두 가지가 매력적으로 보였어요. 자본으로 짓눌리지 않는 시장이라고 봤거든요. 기술이 중요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경쟁력이 올라가니까요. 타투와 수제맥주 씬에서 영향력을 가진 이들을 찾아 연락도 했어요.
둘 다 흥미를 갖고 시작한 건 아니네요.
흥미나 재미보다, 제가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분야를 찾았어요. 브루어리의 연락을 기다리다가 서울에 타투를 배우러 올라갔어요. 이미 퇴사를 했던 터라 마음이 급했거든요. 타투를 배우던 중 한 곳의 연락을 받긴 했지만, 이미 타투의 세계에 발을 들여서 다음 기회를 기약할 수밖에 없었어요.
기술이라고 생각하고 타투에 접근했는데 기술이 아니라 예술이더라고요. 완전 다른 차원의 분야였던 거죠. 예술은 기술 이상의 것이 필요하니까요. 단순히 타투 기술을 배우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하지만 직접 도안을 만드는 일은 예술의 영역이라 쉽지 않았죠. 주제에 따라 하루에 수십 장씩 그림을 그리면서 점차 실력이 늘긴 했지만요.
학원에서 배우는 게 아니잖아요. 어떻게 접근했나요?
제가 원하는 스타일의 타투이스트 분께 DM으로 연락을 하고 서울로 찾아갔어요. 저의 계획을 설명하고 괜찮다면 작업실 근처에 방을 잡고 배우고 싶다고요. 비용을 지불하고 1대 1로 6개월 정도 배웠어요. 이후 6개월은 샵인샵 개념으로 작업을 이어갔죠.
약 1년 간 꾸준히 저를 찾는 손님이 늘면서, '이제는 혼자 할 수 있겠다'라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마침내 대구에서 독립을 시작했죠. 그런데 서울과 대구는 시장이 정말 다르더라고요. 이렇게 표현하는 게 맞을지 모르겠지만 손님의 질적 차이가 있었어요. 대구의 경우 대부분 이레즈미 작업을 요청했어요. 저는 장르로 따지자면 올드스쿨이었기 때문에 그런 작업은 원치 않았거든요.
원치 않는 작업이라도 생계를 위해서 피할 수 없었겠네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에요. 그런 문의는 모두 거절했거든요. 타투를 돈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예술로써 배웠으니까요. 1년 정도 대구에서 지내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어떤 조직이나 함께 하는 이들이 내가 따르고 싶거나, 파이팅 할 수 있는 동기가 있어야 하는데 불규칙한 수입, 여름에는 타투하고 겨울에는 알바를 하며 타투를 예술로 여기며 살아가기에는 제가 그만큼 진심이 아니기도 했고요. 이럴 거면 다시 회사를 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다시 취직하게 된 거죠.
입사 후 천안으로 발령받으면서도 계속 타투이스트로 활동하긴 했어요. 퇴근 후 남는 시간에 작업해서 수익이 크지는 않았지만, 제가 원하는 스타일을 작업할 수 있었어요.
붕어빵처럼 에너지를 소비하며 욕구를 해소하는 창구가 됐겠네요.
그때는 이미 해탈을 한 후에 입사한 터라, 회사에서 큰 감정소비를 하지는 않았어요. 이미 대기업 문화를 한 번 겪어봤으니까요.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오토바이로 출근한 것도 이런 제 마음을 간접적으로 나타낸 거예요 '나는 이미 너희의 생태계를 알고 있다.', '나는 내 일을 할 테니 건들지만 말아라.'라는 식으로요.
하와이안 셔츠에 오토바이로 출퇴근하면 분명 한 소리 들었을 것 같은데요(웃음). 회사 내규에 복장에 관한 규정은 없죠?
그런 규정은 따로 없어요. 그러나 앞에서 언급된 부서장님이 저를 항상 꼴통이라고 불렀죠(웃음). 그때는 눈썹이랑 입술에 피어싱도 했거든요. 진짜 나쁜 감정이 있어서 아니라, 호의를 그렇게 표현한다고 느껴서 악감정은 없었어요.
천안에서 담당하던 업무가 안전과 사회공헌 파트여서 학교나 기관 직원분을 만날 일이 많았는데, 저한테 위화감을 느끼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피어싱은 뺐어요. 봉사를 통해 좋은 이미지를 전달해야 하는데 마이너스 요소가 되겠다는 생각에서요.
경주에서 <화랑모티브>를 운영 중이잖아요. 어떤 취지로 시작하게 된 건가요?
2019년에 한창 오토바이에 재미를 느끼며 각 지역에서 사람을 만나며 친구를 사귀었어요. 사람을 만나는 일 자체는 기쁜 일이지만, 전국을 오토바이로 오가는 일 자체에서 많은 체력을 요하는 일이잖아요. 대웅님도 오늘 오토바이로 서울에서 경주까지 오셔서 잘 아시잖아요(웃음).
만나고 싶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도 먼 길을 달려오느라 체력이 달려서 저의 100%를 보여줄 수 없다는 게 정말 아쉬웠어요. 그래서 반대로 친구들이 저를 만날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거죠.
경주라는 도시와 잘 어울리는 건물이네요.
의도한 건 아니지만, 원하는 조건을 찾기 어려워서 새로 지은 건물이에요.
새로 지은 줄은 몰랐는데요. <화랑모티브>의 탄생일화가 궁금해지네요.
저는 직영 건축을 했어요. 셀프 인테리어처럼 직종별로 사람을 섭외해 건물을 지은 거죠.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제 손을 거쳐야만 했어요. 그 중 '허가방'이라고 건축허가를 대행하는 업무가 있는데, 도면을 대충 그려줘서 마음에 들지 않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제가 최대한 용적률을 높이고 활용도 좋게 내부 구조도 확인하면서 도면을 직접 그렸어요.
그런데 이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어요. 한옥을 지어야 한다는 거였어요. 처음에는 지붕만 기와로 마무리하면 되겠거니 했는데, 경주라는 지역 특성에 정해진 건축 양식이 있던 거죠.
예상치 못한 결과지만 저는 정말 마음에 드는데요. 지역적 특색이 잘 녹아있으니까요.
그랬다면 다행이네요. 지금 모습으로 건물을 지으려니 예산을 많이 초과했어요. 개인 차고도 만들고 싶었는데 포기했어요.
지금은 무용담처럼 쉽게 말할 수 있지만, 처음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겠죠. 선배님(?)의 응원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천안 <로맨틱투휠> 사장님이 건축 선배죠(웃음). 1층과 2층에서 가게를 운영하고 3층에서 거주하거든요. 저 혼자였다면 정말 어려웠을 텐데, 사장님 덕분에 용기를 얻을 수 있었죠. 그 외에는 모두 반대했거든요.
다들 물음표를 던지면서 의아해했어요. 그중 부모님의 반대가 가장 심했고요. 처음 LG를 퇴사할 때와 비슷한 분위기였죠. '왜 사서 고생하냐.', '그냥 아파트에 살아라.'라고 하셨어요. 저와 가장 유대가 깊은 사람인데, 저의 의견을 반대하고 그에 저항해야 하는 게 쉽지 않았어요. 셈이 빠른 친구들은 주식을 해서 그 돈으로 술값을 계산하면 친구를 사귈 수 있다고도 했어요. 서로의 가치관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건데, '너는 틀렸어.'라는 견해를 이겨내는 과정이 힘들었죠.
그런 얘기를 듣다 보면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잖아요.
정말 힘들었어요. 반대 의견에 저항하면서 발버둥 치듯 힘들게 이곳을 쟁취한 것 같아요.
건물을 다 지은 후의 반응은 어땠나요?
부모님이 가장 좋아하세요. '진취적으로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며 잘 살아가는 것 같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들었을 때는, 지금까지의 삶을 보상받는 듯했어요. 아들로서가 아니라, 사람으로서요.
친구들은 그전만큼의 부정적인 피드백은 없어요. 주식 이야기 했던 친구는 오히려 주식으로 손해를 본 것 같더라고요. 지금은 주식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결국에 내 삶은 내가 사는 거잖아요.
대부분 '카페 사장'으로 알고 있을 텐데요. 본업을 밝혔을 때의 반응은 어떤가요?
장발에 문신하고 오토바이 타는 한량정도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거예요(웃음). 그런데 제가 삼성 다닌다고 하면 눈빛이 달라져요. 그런데 안도감보다는 반항감을 느껴요. 나는 그냥 나인데. 삼성이라는 대기업에 속했다는 이유 만으로 저를 다르게 바라보니까요.
<화랑모티브>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모티브가 동기라는 뜻이잖아요. 진취적인 생각을 주고받고 서로의 경험을 통해 동기부여가 되는 공간이 되길 원했어요. '화랑'은 경주스러운 단어를 찾다 보니, 제가 뜻하는 바와 화랑정신이 비슷하더라고요.
이곳이 온라인, 오프라인에서 제가 만난 사람을 소개하는 공간이 되길 바라는 게 가장 컸어요. 이를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이들의 갈증이 해소되길 바랐죠. 인스타그램에 사람을 소개하는 이유도 이와 같아요.
운영적인 측면은 어떤가요?
솔직히 수입이 좋지는 않아요. 공과금에 추가로 인건비까지 따지면 마이너스거든요. 대신 저를 찾아오는 손님과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좋죠(웃음).
손님이 많아지면 그만큼 에너지를 뺏길 수도 있겠네요.
아직 겪어보지 않은 일이라 모르겠네요. 그래도 저를 만나겠다고 오는 이들이 많아지면 기쁠 것 같아요. 언제든지 두 팔 벌려 환영합니다(웃음). 가 제 정체성의 버팀목이 될 정도의 엄청 크고 좋은 영향을 줘요. 이곳 때문에 제가 회사를 다닐 힘을 얻고, 경주에서 울산까지 출퇴근을 하는 거죠.
건물을 짓고 가게를 열 때 많은 분들이 방문하셨어요. 제가 초대하기도 했지만, 직접적인 교류가 없었음에도 찾아주신 분들에게 감사함과 동시에 제가 하는 일에 대한 확신이 더욱 커졌죠. 이 공간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을 깊게 알 수 있겠다는 확신이요.
로고가 불규칙적이잖아요. 무슨 문양인가요?
여기 땅 모양이에요. 저희가 여기에 있고 오토바이가 이쪽에 주차된 거죠(웃음).
작년에 지역 주민을 위한 이륜차 봉사활동도 했잖아요.
몇 년 전 유튜브에서 헬멧을 쓰지 않고 오토바이를 탄 할머니 영상을 본 적이 있어요. '할미네이터'같은 희화화 하는 댓글이 많았는데, 저는 걱정되는 마음이 먼저 들었어요.
이후 경주에 왔더니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그 영상처럼 헬멧 없이 오토바이를 타는 거예요. '헬멧은 꼭 써야 해요. 위험하고 불법입니다.'라며 제 생각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고 '애초에 선택지가 없던 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혼자서 그런 일을 하기가 쉽지 않잖아요. 브랜드의 후원을 받은 건가요?
처음에는 다 제 사비로 할 계획이었어요. 제 계획을 들은 지인이 각 브랜드에서 물건 협찬하는 건 큰일이 아니니 연락을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실제로 벤딕트는 공기 주입기를, 리퀴몰리는 클리너와 루브를 흔쾌히 보내주셨죠.
헬멧 브랜드에서는 긍정적인 답을 받지 못했나 봐요.
헬멧 브랜드에는 아예 연락조차 하지 않았어요. 아무래도 헬멧은 단가가 높잖아요. 그리고 앞서 언급한 브랜드에서 호의적인 답을 받게 되니, '브랜드 후원보다, 안 쓰는 헬멧을 지원받아, 이 일을 친구들과 함께 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남는 헬멧이 몇 개 있기도 했으니까요.
인스타그램을 통해 봉사 취지와 헬멧 후원을 받는다는 공지를 올렸어요. 제가 기대한 건 열 명 정도였는데, 감사하게도 스무 명 가까이 헬멧을 보내줬어요.
봉사 취지에 많은 이들이 동감했나 보네요.
맞아요. 헬멧을 후원받는 동시에 친구를 찾고 싶기도 했어요. 저와 비슷한 가치관, 저의 생각에 공감을 해주는 이들을요. 봉사 후기를 보고 '헬멧이 좋은 곳에 전달되어서 너무 기쁘다.', '마치 내가 직접 전해준 것 같다.'라는 이야기가 많았어요.
천안에서 담당하던 업무에서 영향을 받기도 했나요?
맞아요. 경주에 와서 <화랑모티브>를 통해 지역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처음 이곳을 열 때의 목표 중 하나가 '봉사활동'이기도 했고요.
올해도 봉사활동을 계획하고 있나요?
봉사활동을 주제로 사람을 모으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올해는 경주에서 오토바이 모임을 만들어서 그 친구들과 봉사를 하고 싶어요. 가 봉사활동소가 되면 좋겠어요(웃음). 대단한 일을 하자는 건 아니에요. 함께 캠핑 가서 주변 쓰레기를 줍거나 하는 작은 거죠. 별 거 아닌 것 같은데, 모이면 별 거가 되거든요. 봉사에 대해 조심스러운 마음이 든 적도 있어요. 작년에 부정적인 피드백도 있었거든요.
어떤 내용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세요?
제가 하는 행동이 부자연스러워 보이고 위선적인 것 같다고요. 듣고는 깜짝 놀랐죠. 그래서 인스타그램이라는 오픈된 공간보다, 오토바이 모임을 통해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나 봐요. 제가 오토바이 탄다고 하면 자연스럽잖아요(웃음). 오토바이 타면서 주에 한 번씩 하천 쓰레기도 줍고, 캠핑 가서 주변 정리도 하는 거죠.
사전에 100인 인터뷰에 대해 말씀해 주셨잖아요. 100명으로 정해놓은 이유가 있나요?
상징적인 의미가 커요. '100명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요(웃음). 사람을 만나면서 느낀 좋은 감정을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하고자 시작했는데, 이게 의외로 쉽지 않더라고요. 본인의 이야기를 저에게는 들려줄 수 있지만, 타인에게까지 전하고 싶지 않은 경우가 있거든요. 처음에는 100명 금방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거죠. 100명의 인터뷰를 마치면 책으로 만들고 싶기도 해요.
인터뷰이는 어떤 기준으로 선정하고 있나요?
선한 영향력을 갖고 열심히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인터뷰이로 모시고 있어요. 직업적으로 뿐만 아니라 삶을 쟁취하며 살아가는 이들을요. 이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용기를 얻고 동기가 되도록, 크게 정의해서 '선한 영향력'이라고 표현하고 있죠.
저도 잘 읽고 있어요. 다양한 이들의 이야기가 마음에 울림을 주고 여운을 남기더라고요. 혹시 MBTI가 어떻게 되세요? 직장에서의 모습과 이곳에서의 모습이 다를 수도 있겠네요.
MBTI는 ENFJ예요. 이 성격이 회사 생활에서는 힘들더라고요. 스스로 '정의'라고 생각하는 부분을 꼭 지켜야 해서요. 그래서 최대한 그런 상황을 피하거나 외면하려 하는데, 아무래도 제가 그런 사람이다 보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죠.
반대로 <화랑모티브>에서는 어떤가요?
저의 외향적인 성격이 도움이 되는 편이죠.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이 장소를 통해 많은 동기를 전달하고 싶거든요. 그러려면 많이 생각하고 움직여야 하니까요.
두 가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일에서 느끼는 보람도 두 배일까요? 언제 보람을 느끼세요?
회사에서 보람을 느낀 적은 크게 없었어요. 굳이 말해야 한다면 월급날이라고 할까요(웃음)? 배부른 소리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정말이에요. 제 고생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화랑모티브>에서는 다르죠. 저를 만나기 위해 이곳까지 오신 분들을 마주할 때가 가장 큰 보람이에요.
출근하지 않을 때는 무엇을 하나요?
휴무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주 2회 운동을 하려고 해요. 크로스핏과 수영을 하고 있어요. 크로스핏은 벌써 1년이 넘었네요. 기록을 위해서, 누구를 이기려고 하기보다는 함께 하는 게 좋아서 하고 있어요. 오토바이도 누구랑 경쟁하기보다 함께 타는 게 좋거든요.
수영은 꽤 됐는데, 제대로 하기 시작한 건 천안에서부터예요. 천안에 편도 50m 수영장이 있거든요. 자유롭게 바다에서 움직이고 싶어서 배우게 됐어요.
조금 개인적인 질문을 하고 싶은데요. 인스타그램에 돈까스 사진이 자주 등장하잖아요. 언제부터 경양식 돈까스에 빠지게 됐나요?
경양식 돈까스는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먹었지만, 일본식 돈카츠가 유행하면서 더 경양식 돈까스를 좇게 됐어요. 둘 다 먹어보니, 제 입맛에는 경양식이 더 잘 맞더라고요. 맛도 맛이지만 가게 분위기, 인테리어, 어린 시절부터 먹던 향수. 이런 전반적인 것들이 이유예요. 경양식 돈까스는 클래식인 거죠.
좌우명이나 롤 모델이 있나요?
저는 제 자신을 가장 많이 믿어서, 누군가를 롤 모델로 정하지는 않았어요. 생각하고 행동하고 편견을 깨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라는 책 아세요? 거기서 사람을 Giver, Taker, Matcher 3가지 유형으로 정의하는데요. 저는 Matcher 기질이에요. 인터뷰를 통해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되면서 이타적인 Giver를 만나면서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더라고요. 이타적인 사람을 좋아해요.
혹시 '지타'가 지훈+이타 인가요?
그건 아니에요(웃음). 타투이스트로 활동할 때 지훈과 타투를 합쳐서 정했어요.
편견을 깨고 싶다고 했는데요. 이에 실패한 적도 있나요? 이를 통해 깨닫는 점도 있을 것 같아요.
첫 번째는 타투고 두 번째는 현재의 저예요.
현재의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있나요?
학창 시절부터 친구들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공통사가 적었거든요. 저는 제가 배척당하고 문제가 외부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문제는 저에게 있더라고요. 저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서 갈증을 해소하고 공감하며 안도감을 느꼈는데, 오히려 저와 다른 이들을 배척하는 자신을 보게 됐어요. 그래서 요즘은 '내가 틀렸었다.'라는 생각을 해요. 이걸 어떻게 풀어갈지 고민도 하고요.
브랜드를 운영하는 분들이 공통적으로 '모두를 팬으로 만들 수는 없다.'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맞아요. 그건 받아들여야 하는 사실인 것 같아요. 저와 결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할 때 더욱 시너지를 낼 수 있을 텐데, 이 모습이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 위화감을 조성하지는 않을까 조심스러운 거죠.
실제로 위화감을 조성한다고 느낀 적이 있나요?
위화감이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결국은 저는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이고, 오토바이 타는 사람들과 어울리잖아요. 이 모습 자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에게는 우리의 모습이 버겁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예전 같으면 '누구한테 피해 주는 것도 아니고 내 의지대로 자유롭게 타는 건데 어때?'라고 생각했을 텐데, 지금은 '좀 더 젠틀한 방법은 없을까?'라는 고민을 하게 돼요.
흔히 '오토바이 타면 죽어.'라며 극단적으로 말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심지어 오토바이를 경험해 본 적도 없는 사람이요. 어쩔 수 없는 오토바이를 타는 이들이 끝까지 가져가야 할 숙명, 숙제 같아요. 그래서 오토바이 탈 때는 항상 제가 연예인이라고 생각하며 준법정신을 함양하고 있죠(웃음). 최소한 남들에게 떳떳할 수 있도록요. 무판, 무면허 같은 데에 질색하는 편이에요. 물론 직접적으로 표현하진 않지만요.
작년 가을, 한 지역의 꽤 유명한 빵집에 들렀어요. 가게 앞에 번호판이 없는 오토바이가 세워져 있어서 소품인 줄로만 알았죠. 사장님께 오토바이 타고 왔다고 하니, 자기도 저 오토바이로 장도 보고 출퇴근도 한다면서 당당하게 얘기해서 놀랐어요.
저도 비슷한 일화가 있어요. 제가 굉장히 멋지다고 생각했던 형이고 같이 오토바이도 몇 번 탔는데, 면허가 없더라고요. '형님 오토바이 면허 따셔야죠?'라고 하니까, 웃으면서 '나 이제껏 10년 넘게 타면서 걸린 적 한 번도 없어.'라고 당당하게 말하더라고요. 그때부터 멀리하고 오토바이도 같이 타지 않아요.
앞으로 계획 중인 목표가 있나요?
장기적인 목표 중 하나는 100인 인터뷰를 마무리하는 거예요. 한 달에 한 명 하기도 어려워서, 빨라도 5년은 걸릴 것 같아요.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비대면 인터뷰는 싫어요. 직접 만났을 때 진정성과 그 사람의 일관성을 알 수 있고 제 감정을 전달할 수도 있거든요. 궁극적으로 전국에 친구를 사귀는 게 목표예요. 이 작업이 끝나면 한 달에 한 번씩 타지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왜 그런 생각을 갖게 됐나요?
아무리 저와 물리적으로 가깝고 시간을 많이 보내더라도 가치관이 달라 감정적인 교류를 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고 느꼈어요. 오히려 왕복 8시간이 걸리는 곳에 있는 '친구'와 잠깐 커피 한 잔 하는 게 저에게는 더 큰 의미예요.
제가 친구라고 부르는 이들이 각자 더 멋진 사람이 되어서 서로 성장하는 에너지를 주고받길 바라요. 타지에 있는 친구들과 한 달에 한 번씩 시간을 보내고 싶은 이유이자 인터뷰를 시작한 이유이기도 해요.
오토바이로 주제를 옮겨볼게요. 현재 어떤 오토바이를 타고 있는지 소개해주세요.
할리데이비슨 스포스터 883, 스즈키 빅보이 250, 혼다 슈퍼커브를 타고 있습니다.
세 대나 있네요.
제일 처음 갖게 된 바이크가 스즈키 빅보이 250이에요.
커브가 아니었네요? 이종소형을 먼저 취득했나 봐요.
트래커 스타일이 가장 멋져 보였거든요. 당시에는 트래커 스타일이 뭔지도 몰랐지만요(웃음). 매물로 구한 게 아니라, 오토바이 주인들에게 하나하나 연락해서 구매했어요.
빅보이를 타고 전국을 다녀도 부족함을 못 느꼈어요. 충분히 재미있고 만족했는데, 주변에 할리를 타는 형들이 많아서 클래식 할리에 빠지게 됐어요. 이후 순정 할리를 구매하여 커스텀을 하면서, 커스텀 문화를 이해하고 매력을 느끼게 됐죠.
99년식 할리데이비슨. 관리하기는 어떤가요? 쉽지 않을 것 같거든요.
처음에는 쉽지 않았죠. 컨디션을 올리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어요. 다행히 이후로 큰 문제가 생긴 적은 없어요. 아무래도 지방에서 관리하기 어렵기는 해요. 문제가 생겼을 때 오토바이를 맡길 곳이 없다시피 하거든요.
클래식과 올드의 숙명이죠. 커브가 가장 먼저라고 생각했는데, 반대네요.
커브는 욕심이었죠. 클래식의 기본이 커브라고 봤거든요. 다들 우주명차, 기름 냄새만 맡고 달린다고 하잖아요(웃음). 실제로 타면서 사길 잘했다고 생각하는데, 세 대는 욕심인 것 같기는 해요. 손이 많이 가는 오토바이는 따로 있거든요.
어떤 오토바이를 가장 많이 타나요?
가볍고 편하게 탈 수 있는 게 빅보이라, 가장 손이 많이 가요. 그다음으로는 스포스터 883이에요. 저도 할리를 타지만, 할리 라이더로서 경각심을 조금 느껴요. 빅보이를 탈 때는 모두가 친구였는데, 할리를 탈 때는 그들만의 씬 안에서 편을 가르더라고요. 존중과 배려가 우선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할리만 오토바이가 아니잖아요. 제가 성수에 있는 바이크 카페 RSG 사장님이랑 오래 알아왔는데, RSG를 좋아하는 이유가 모든 바이크를 장르와 상관없이 아우르기 때문이거든요. 물론 모인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는 건 아니지만요.
오토바이를 타게 된 계기도 궁금한데요.
타투이스트로 활동하면서 제가 정의하는 '멋있는 사람'의 정의 속에 오토바이를 타는 이가 포함됐죠. 그때 다시 오토바이를 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오토바이와 어울리는 옷도 생각하게 되고, 캠핑에 대한 생각도 깊어지게 됐어요.
2019년의 오토바이에 대한 애정을 100점이라고 하면, 현재는 몇 점이라고 생각하세요?
지금은 50점 정도 되는 것 같아요. 19년도 천안에서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무조건 탔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닌 거죠(웃음). 경주로 오면서 함께 탈 사람이 없다 보니 열정이 많이 식었어요. 집도 짓고 가게도 운영하다 보니, 오토바이에만 집중할 시간이 부족해졌나 봐요.
다른 데 집중하다 보니 오토바이에 조금 소홀해졌다고 볼 수 있겠네요. 오토바이를 타며 다양한 경험을 하잖아요. 어떤 기억이 가장 진하게 남아있는지 궁금한데요.
천안 사람들과 간 모토캠핑이 생각나요. 천안에서 포항으로 가기 위해 새벽 일찍 모였는데, 태풍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내리는 거예요. 속으로 '못 가겠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저랑 다르게 다들 가는 분위기인 거예요. 편의점에 들러 쉬고 기름도 채우다 보니 대략 10시간 정도 걸린 것 같아요.
나이, 성별, 직업이 다른 열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을 연결해 준 매개체는 오로지 오토바이뿐인데, 함께 움직이며 뭘 먹고 어디를 갈지 궁리하면서 소속감을 크게 느꼈어요. 지금 생각해 보니 오토바이도 모두 다른 기종이었네요(웃음).
첫 모토 캠핑이었나요?
전에도 혼자 모터캠핑을 하긴 했어요. 그런데도 전혀 다르게 느껴졌어요. 3박 4일 시간을 맞추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게다가 평일이었거든요. 누군가는 직장에는 아쉬운 소리 하며 휴가를 신청했을 테고, 자영업자는 돈을 버는 대신 오토바이를 함께 타기 위해 시간을 냈을 테니까요. 진전성이 느껴졌어요. 이후로는 지역의 경계라는 개념이 허물어졌어요. 오토바이를 타고 어디든 갈 수 있겠더라고요.
'전국 각지에 친구 만들기'프로젝트의 시발점이 된 셈이네요. 많은 만남 중에서도 강렬하게 기억에 남은 분이 있을 것 같아요.
많은 이를 만났지만, 누구 한 명이 강하게 남아있지는 않아요. 서로가 서로를 원해서 만나기도 했고 모든 만남에서 삶의 자세에 대해 배우게 됐거든요. 그래서 오토바이를 같이 타고 싶은 사람을 정해두지도 않았어요. 그냥 서로 마음이 맞고, 보고 싶고, 알아가고 싶은 사람이면 좋아요.
그래도 굳이 꼽자면요?
지금은 천안 사람들밖에 생각나지 않네요. 계속 쭉 같이 타고 싶어요. 사전에 질문지에 적힌 '오토바이를 함께 타고 싶은 사람'을 '앞으로도 함께 타고 싶은 사람.'으로 생각해 봤어요. 서로의 시간을 할애하며, 서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만나고 저도 그런 사람, 친구가 되고 싶거든요.
오토바이가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잖아요.
전반적인 삶에 변화를 줬어요. 오토바이를 타면서 저만의 취향이란 게 생겼고, 취향이 맞는 사람들을 만나게 됐잖아요. 제 정체성, 마음 한편에 있던 갈증과 물음표를 해소하게 됐어요. 단순하게 타는 용도 이상으로 인생의 많은 부분에 영향을 미쳤고 차지하고 있죠.
스스로를 의심하고 위축돼서 타협하려 할 때, 운전석에 앉아 스로틀을 당기면 저에게 묻은 때가 떨어지며 다시 깨끗해지는 기분이 들거든요. 그럴 때마다 저 자신을 찾는 것 같아요. '그래, 이게 나였지.' 하면서요.
만약 오토바이가 삶에서 사라진다면 어떨까요?
생각해 본 적 없긴 한데, 우선 외부의 자극으로 오토바이를 그만 타지는 않을 거예요. 대부분 가족들의 염려로 오토바이를 처분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 말에 일반화의 오류가 있다고 생각해요. 운전을 잘해서 사고가 덜 나고 못해서 더 나는 건 아니잖아요. 그건 개인의 문제이지 전체의 문제는 아니잖아요.
만에 하나 오토바이가 아니더라도 다른 통로로 사람들을 만날 것 같아요. 저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이들이 이곳에 많지만, 분명 다른 씬에도 있을 거잖아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파이프라인을 이곳 를 통해 열어두었으니까요. 다양한 카테고리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그렇죠 굳이 오토바이로 국한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아! 그리고 팔에 깁스했을 때도 오토바이를 탔어요. 아마 스스로 오토바이에 대한 마음이 0이 되지 않는 이상, 다른 이가 저를 설득하는 건 불가능할 거예요.
오토바이 할아버지가 와도 불가능하겠네요(웃음). 오토바이를 타고 자주 찾는 곳이 있나요?
천안에 있는 <로맨틱투휠>에 자주 가요. 여기서 주유만 하면서 쭉 달리면 4시간 반 정도 걸려요. 거리가 거리인지라 자주는 못 가고 일 년에 여섯 번 정도 찾고 있어요. 저한테는 고향 같은 곳이에요. 많이 보고, 배우고, 좋은 영향을 저에게 줬으니까요.
경주에서 오토바이 타기 좋은 길이나, 가볼 만한 곳도 추천해 주세요.
사실 경주가 크지 않다 보니까 전반적으로 둘러보는 걸 추천해요. 시작과 끝을 에서 하는 것도 나쁘지 않고요(웃음).
아직 오토바이를 경험하지 않은 혹은 구매를 고려하는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처음 구매를 고려할 때는 가격, 브랜드, 배기량 등 많은 고민을 할 텐데요. 선택지가 너무 다양해서 결정하게 어렵다면, 가볍게 커브로 시작하는 걸 추천해요. 커브만으로도 다양한 감정을 느끼기에 충분하거든요.
특히 전동킥보드나, 전기자전거 타는 분에게 더욱 커브를 추천해요. 아마 '오토바이보다는 덜 위험하다.'는 생각이 있을 텐데요. 저는 더 위험하다고 봐요. 물론 오토바이를 운전하려면 더 많은 기회비용이 필요하겠죠. 면허도 따야 하고 보험도 가입하고 등록도 해야 하니까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오늘 인터뷰는 어땠나요?
평소에 하고 싶던 말뿐만 아니라 제가 살아온 과정, 저라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속 시원해요(웃음). 일관성 있는 질문으로, 인터뷰 내내 공감해 준 대웅님에게도 감사하고요. 저도 인터뷰를 하면서 느끼는 게,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하는 것보다 누군가를 통해 전달되면 더 설득력이 있다는 걸 느꼈거든요. 저 혼자 제 생각을 주장하는 것과, 누군가를 통해 정리되고 다듬어진 것과는 많이 다르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