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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rtyfourtySimplythirsty Mar 21. 2021

제주에서 늙은남자 둘을 만났다.

우린 어떻게 하염없이 늙어가는가.

제주도에서 이제 열흘남짓 지냈는가 싶다.

서귀포의 작은 방에 짐을 풀어놓고는 매일매일 주섬주섬 어딘가로 다닌다.

모두 담주 수요일 오를 한라산을 위해서이다.

하이커들이 모이는 카페 겸 편집샵에 가서 기능성 등산복이나 에너지바를 구입하기도 하고, 한라산 중산간의 둘레길을 걸으며 한라산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전에 감당할 수 있을지 호흡을 가다듬기도하고, 여러 오름등을 오르면서 도시에서 이미 나약해져버린 종아리와 허벅지를 탄탄하게 만들고 있다.

이렇게해서라도 한라산을 오르고 싶다는 욕망을 실현하고 싶다.


이 욕망이 지금 이순간 그렇게 중요한건지 잘 모르겠지만, 시간이 흘러흘러 지금에 와서는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그냥 그러고 싶다는 마음만 강렬하다.


욕망에 가득찬 내 마음과 달리 제주도는 제일 중요한 한가지.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한가지가 있는데, 그건 "날씨"이다. 그날의 날씨는 인간의 영역이 아닌지라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비가 쏟아지면 쏟아지는 줄 알고, 햇살이 구름을 밀어내고 나오든, 그 사이로 삐져나와 햇살이 흘러 쏟아지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온전히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냥 원래 하려던일을 하거나, 한번도 하지 않은 일을 하거나 중에 결정하면 된다.


흐린날의 제주는 뭔가 더 흐리다.



그날도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이었다. 오름을 오르거나 한라산을 가기에는 조금 무서운 날씨였다.

난 혼자가야하니까, 혼자이기에 무서운 날씨에는 억지로 누군가를 만나서 공포를 조금 경감하려고 한다.

그럼 무엇을 하면서 오늘을 지낼까. 헛되이 보내고 싶지는 않지만, 서두르고 싶지도 않다.

서두른다고 그일이  되거나 하진 않더라. 30대 내내 서둘러왔다. 40대 중반까지도 속도를 늦춰내느라 힘겨웠다. 게다가 잘 되지도 않는다.


제주에는 도처에 무서운 나무도 많다.


앱을 뒤적거렸다. 코로나때문인가. 그간 상승세를 유지하던 각종 젊은 여행사들과 여행앱들은 울며겨자먹기식으로 지역의 허름한 액티비티부터 럭셔리한 액티비티까지 닥치는대로 팔고 있는 듯 하다.


30분정도 뒤적거렸을까? 말을 타고 싶지도 않고, 낚시를 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다가 눈에 뜨인 "커피와 와인". 드립한 커피와 자신의 와인을 블렌딩한다는 식의 설명을 읽었다. 제주도에서 커피나무를 재배한다고 한다.


"그게 가능한가? 커피나무를 제주에서 키우는게?"


클릭 몇번으로 체험을 신청하고서는 어두침침한 날씨를 뚫고 앱이 말해준 공간으로 운전을 했다.

여긴가? 갸웃하는 순간에 도착했다. 앱에서 보여준 사진하곤 뭔가 다르지만 찾았다. 여기구나 싶었다.


앱에서 홍보차원에서 올린 장인처럼 보이던 사진과 유사한 어르신께서 허리가 불편한듯 벽에 기댄채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혼자에요?", "혼자입니다", "음...." 빗물 머금은 공기같은 소리를 뱉고는 낡은 손가락을 구석을 향하며 바로 자신이 커피콩으로 만든 와인이라고 설명을 시작했다.


"바로 시작하는건가요?  저밖에 없나요?"

"네. 그 앱회사와 계약관계때문에 혼자 오셔도 진행해야해요".


커피콩 가운데의 초록색부분을 모아 와인을 만든다는 둥, 비닐하우스 안에 자라고 있는 대략 8그루 정도의 커피나무를 보여주고서는 비닐하우스안에 커플들이 오면 쓴다는 와인반신욕기를 보여주었다.

다들 자신이 만든 와인으로 반신욕을 한단다.


공간의 뒷편으로 가니 종류별로 다양한 커피드리퍼등이 있다. 앉아보라 하시더니, 스타벅스의 초록색 스티커가 붙어있는 커피빈통을 들고오더니 적당한양을 그라인더에 붓고서는 갈아보란다. 힘을 잘들여서 세세히 갈아보란다.


요사이 집에서 거의 매일 아침에 하는 루틴이다. 다음에 빈을 살때는 '꼭 갈아달라해야지'를 기억하며 아침부터 빈을 그라인딩하는데 여기서도 그 일을 하란다.  


"사장님이 키우신 커피빈을 로스팅한건가요?"

"아뇨. 스타벅스 블렌딩이에요"

"............................."


다 갈아진 빈을 가지고 드리퍼에 넣고서는 뜨거운 물을 아홉번씩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부어 커피를 만들었다. 다 만든 커피를 마시라고 하시더니, 둘만 있는 작은 공간에 클래식 음악을 컴퓨터 스피커로 틀어주셨다. 커피를 느낄수 있는 분위기를 제공하려하시는걸까?  


산방산과 유채꽃이 보였지만, 스타벅스 블렌딩과 컴퓨터 스피커로는 도대체가 기분이 나질 않았다. 이후 본인의 와인을 가지고 오더니 커피와 섞어서는 오늘의 프로그램인 커피와인이 완성되었다했다.


'이런 걸 하기에는 너무 멀리왔군.흠.'

속으로 부질없는 말을 하고서 책장을 보았더니 전부 한사람이 쓴 책이었다. 이 어르신이다. 오!

<삼성처럼 회의하라>, <스타벅스 감성마케팅>, <실전마케팅플래닝>, <꿈이 있으면 늙지 않는다> 등.

예상하지 못한 전개에 빤히 쳐다보고 있는 내게 자신이 내가 쳐다보고 있는 다수의 책을 썼고, 자신은 삼성전자를 나와 대학에서 경영학을 가르치던 교수였다고 흘리듯이 말씀을 해주신다. 그래서 이렇게 많은 경영서적을 집필하신거구나.


"다른 교수들은 1권도 못쓰지만, 난 70권의 책을 썼어요!"

............................................................................

"그런데, 요새 세상은 정말 모르겠어. 70권의 책을 썼지만 결국 내가 아는것은 이 변화하는 세상을 모르겠다는거야.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

"사장님, 그런데 왜 사장님은 사장님 커피빈을 로스팅하지 않으시고, 스타벅스를 쓰시면서 이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시는거에요?"


"이것봐요. 이 일이 수익이 남겠어요? 나 참."

............................................................................


아직 접히지 않은 종이박스를 건네주셨다. 직접 접어서 박스로 만들어 와인을 가지고 가라 하신다.

풉. 작은 박스도 금방 접어내지 못하는 나를 보면서 무엇하나도 제대로 할줄 모르는 인간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이내 커피와 와인을 섞어서 커피맛과 와인맛 2 종류가 전혀 섞이지 않은 커피와인을 들고서는 공간을 나왔다.


짜증섞인 눈빛과 말투로 수익이 나지 않는 현실을 이야기하는 73세의 늙은 남자를 산방산 근처에서 만났다. 젊은 시절, 삼성의 직원과 교수라는 엘리트 시절을 보내며 70권의 경영서적을 낸 늙은 남자는 이젠 정말 세상을 모르겠다며 짜증이 가득했다.


제주는 커피보단 물고기





그러고 나서 몇일이 더 지났다.


제주나 서울이나 시간은 욜라 빨리 지나간다

아침일찍 오름을 2개정도 오르고 나서는 아직 조금 남은 시간동안 무엇을 할까하다가 일전에 우연히 어디선가 보았던 그림을 그린 사람. 왈종을 만나고 싶어졌다. 서귀포의 <왈종갤러리>로 향했다. 도착한 갤러리는 크지는 않았지만, 기억속 왈종의 그림과 같은 건물이었다. 햇살도 듬뿍 받을것같고, 꼭대기에 오르면 하늘바다 구분없는 파랑색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공간이었다.


건물로 들어섰더니 첨으로 만난 글은 이렇게 써있었다.


"그래도 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압도적인 할아버지


2층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는 명상음악이 공간에 잘 어울렸다. 왈종의 그림에 대한 처음 이미지가 그랬다. 순수한 명상가같은 그림. 무언가 쉘로우(Shallow)함을 딥다이브 (Deepdive)하는 것 같은 그의 그림은 그냥 본능적이고, 순수하고, 솔직하다. 그의 관심사가 궁금해지는 늙은 남자다.


이층으로 올랐더니, 아까 들었던 명상음악은 그의 그림들을 미디어아트로 만든 영상에서 흘러나오고 있었고, 미디어아트의 시작은 왈종 할아버지가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는 사진부터였다.


밝다. 그림 전체에 흐르는 색깔은 총천연색이고, 그림에는 꽃과 나무와 새와 집, 사람들이 그려져있으며, 스포츠카와 짚차, 골프채등이 가득했다.  

골프를 치며 로스트볼을 찾는 자신에게 "죽으면 늙어야지!"를 외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놓은 그림이 가득했다.


2층엔 이왈종 할아버지만의 작품들이 가득했다. 커다란 조명처럼 밝고 거짓이 없다는 느낌. 물론, 그렇진 않겠지만 한번도 어두워보지 않았을 것만 같은 그림들.


"죽으면 늙어야지".

첨엔 늙으면 죽어야지라는 문장으로 단순히 장난친건가 했는데, 죽으면 늙어야지라는 말이 주는 희안한 반성이 있었다.그래, 죽으면 늙지 뭐. 지금 말고. 이런 뉘앙스인가?


19세 이하 입장금지 특별전시관에서는 남녀체위등의 춘화를 신랄하게 그려놓고는 당당하게 “평생 사랑하다가 120살까지 살거다". 라는 당당한 문구를 적어두었더라.


3층에는 작가가 명상하는 공간과 그림을 그리는 공간을 볼 수 있게 오픈을 해두었다. 서귀포의 해안을 보면서 작가는 그림을 그릴것인데, 그의 아틀리에에는 골프채가 그득했다. 수없이 많은 골프채를 일렬로 세워두니 그것도 예술인가 싶은 정도였다.


그러하다


그를 인터뷰한 책자의 한귀퉁이를 찢어서 벽에 붙여두었다.


하루를 어떻게 보내시나요?


"아홉시면 자고 새벽 세시면 일어나요. 일어나면 막걸리를 한대접 마시고, 그 길로 오후 다섯 시 반 정도까지 작업을 해요. 그 이후에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 전에는 사람을 안만나죠. 지금껏 초지일관으로 지키는 일과인데 이렇게 지내니 여유가 좀 생겨요. 무엇을 하나 놓고도 생각을 하게 되고, 좋은 발상이나 영감 같은게 떠오르죠. 창작 생활이란 사람을 만나면 안되는 것 같아요. 모든 연구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경계해야 되는 것 같아요. 놀아도 집안에서 놀아야지."


중도는 무엇인가요?


"사랑과 증오는 결합하여 연꽃이 되고, 후회와 이기주의는 결합하여 사슴이 된다. 충돌과 분노는 결합하여 나르는 물고기가 된다. 행복과 소란은 결합하여 아름다운 새가 되고, 오만함과 욕심은 결합하여 춤이 된다"


옥상으로 올라가면 서귀포 앞바다가 창연히 펼쳐진다. 클럽 어딘가에서 흐를것만 같은 음악과 이런저런 색감의 조각품들이 널려져있다.


제주도의 바람은 흘러나오는 음악의 비트에 맞게 정신없이 불어제낀다.



이왈종 할아버지는 40대 후반즈음에 이런 저런 도시생활을 던지고는 제주도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20년이 훌쩍넘게 지난 후에 본인의 갤러리를 서귀포에 지었다. 60대 후반에 일어난 일인가보다. 40대에 무슨일이 그에게 생겨, 멀쩡한 도시생활을 던져버렸는지, 제주에서 그림만을 그리게 된건지 모르겠으나 오랜기간동안 솔직해진, 그래서 있는 그대로를 그리게 된  본인의 결과물들이 60대 후반이 되어서는 엄청 사랑을 받게 되었나 보더라. 뭔가 피상적이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리네 평범한 이들의 본질인 것들을 거짓 1도 안보태고 그림을 그려서 사람들에게 이야기 한다는 건 정말 멋지지 않은가?


포장없이 머리를 비우고, 요가하고, 골프치고, 섹스하고, 그림 그리는 75세의 늙은 남자를 서귀포에서 만났다.


꽃이 화알짝!


 


한라산에 올라보려고 제주도를 방문했다.

열흘남짓 이곳 저곳 오르며, 산을 탄다는 것과 자연에 익숙해지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요거트와 블루베리를 먹고, 스트레칭을 겸한 요가를 하고서는 오름들을 오르고 있다.

평소에는 절대 하지 않는 컨셉이다. 보통의 아침은 일어나서 숨도 안쉬고, 정신없이 씻고, 옷을 갈아입고는 회사로 출근을 한다. 매일 매일 뭐하는가 싶은 삶을 30대부터 40대 후반까지 죽 이어오고 있다.


나름의 여유시간에 제주도에 살고 있는 두명의 늙은 남자들을 만났다.


우린 어떻게 하염없이 늙어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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