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아 기다려! 더위를 날려 줄, 시원한 맥주들
여름이다. 맥주의 계절이다. 차가운 손끝, 유리잔에 송송 맺힌 이슬,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탄산, 이 유혹을 마다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뜨거운 태양이 숨을 죽이면 이 갈망은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여름에 맥주를 이길 수 있는 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황금색 라거는 이 계절의 영원한 승자다. 섬세한 쓴맛, 날카로운 탄산, 깔끔한 목 넘김은 갈증해소라는 인간 본연의 욕망을 완벽히 충족시킨다. 100년이 넘도록 라거가 맥주 세계의 권좌를 틀어쥐고 있는 이유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맥주는 아메리칸 라이트 라거다. 이 스타일의 한국 대표는 카스와 테라다. 전분이 들어가 더 가볍고 깔끔한 목 넘김을 자랑한다.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탄산도 꽉 차있다. 누구는 이 녀석들을 대동강 맥주보다 맛없다고 했지만, 동의할 수 없다.
샤워로 땀에 젖은 몸을 씻었다면 우선 가장 저렴하고 구하기 쉬운 카스와 테라로 더위를 몰아내자. 다음 맥주로 또 카스, 테라를 집을 예정이라면, 잠깐! 같은 맥주로 여름을 보낸다니, 너무 지루하지 않은가. 조금만 둘러보면 재미있고 짜릿한 6월을 약속하는 맥주들이 있다. 장바구니에 다양한 맥주를 담을수록 불쾌지수는 낮아지는 법이다.
보헤미아는 체코의 옛 이름이다. 체코는 필스너의 고향이다. 1842년 체코 필젠에서 태어난 필스너 우르켈은 모든 황금색 라거의 어머니다. 하지만 체코를 대표하는 맥주에 필스너 우르켈만 있는 건 아니다. 여기 체코인들이 사랑하는 맥주, 부드바이저 부드바가 있다.
부드바이저 부드바는 프라하 남쪽, 체스케 부데요비체에서 1895년 태어났다. 이 양조장은 1265년 보헤미아 왕 오토 칼 2세가 설립했다. 그리고 여전히 체코 공화국이 주인으로 남아있다. ‘Beer of King’이라는 부드바이저 부드바의 별명은 과장이 아니다.
눈치 챈 사람도 있겠지만 미국 대표 맥주, 버드와이저가 이 맥주에서 이름을 따왔다. ‘King of Beer’라는 별명도 부드바이저에서 가져왔다. 상표 분쟁이 붙자 버드와이저에서 큰 매각 대금을 제시했지만 체코는 거절했다. 필스너 우르켈이 사브밀러에 매각된 것을 보면, 체코가 얼마나 이 맥주를 사랑하는지 알 수 있다.
부드바이저 부드바는 색부터 기품이 묻어난다. 멋드러진 황금색이 그라데이션처럼 펼쳐진다. 5% 알코올은 섬세한 홉 향을 지긋이 끌어올린다. 쓴맛은 명징하지만 도드라지지는 않는다. 밸런스는 세계 최고다. 냉장고에서 바로 꺼낸 부드바이저 부드바는 꿀물처럼 넘어간다.
한국에는 미국 버드와이저 때문에 부드바이저 부드바가 아닌, 부데요비체 부드바로 판매되고 있다. 마트 선반을 잘 살펴보면 버드와이저 원조 맥주가 눈빛을 반짝이며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꼭 찾으시라.
라거와 유일하게 맞짱 뜰 수 있는 맥주, 라거보다 속을 더 뻥 뚫리게 하는 맥주, 바로 바이스비어(weissbier)다. 흔히 밀 맥주로 불리지만,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독일 바이에른 밀 맥주라고 해야 한다.
바이스비어라고 부르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조건이 필요하다. 우선 50% 이상 밀이 들어가야 한다. 필터링도 하면 안 된다. 병에 남아있는 효모는 밀의 단백질과 만나 불투명한 탁도를 만든다. 섬세한 자연 탄산과 풍성한 거품도 이 덕분이다.
라거에는 특별한 향이 없는 반면 바이스비어는 멋진 바나나와 정향 아로마를 품고 있다. 이 향은 바이스비어의 영혼이다. 신선한 바나나 향은 살아있다는 징표다. 낮은 쓴맛과 단맛은 원샷이 가능한 밸런스를 선사한다.
바이스비어의 왕은 슈나이더 바이세 탭7이다. 1872년 독일 바이에른 켈하임에서 탄생한 이 맥주는 현대 바이스비어의 원조다. 꽃병처럼 생긴 전용 잔에 따르면 불투명한 짙은 황금색이 두꺼운 거품을 만들며 가득 피어오른다. 거품은 바나나와 정향 아로마를 붙잡고 있다가 동시에 터트리는 마술을 부린다.
한 번 입으로 들어간 슈나이더 바이세 탭7을 끊기는 쉽지 않다. 부드러운 목 넘김과 탄산은 묵은 갈증을 깨끗이 날려버린다. 더 무서운 건, 이 맥주가 모든 음식과 어울리는 치트키라는 사실. 한 여름 지긋지긋한 후텁지근함도 삭제할 치트키라는 것도 기억하자.
세종은 벨기에 남부, 왈로니아 지역의 맥주다. 우리말로 계절, 영어로 시즌을 뜻하는 세종은 농부의 맥주다. 한 여름 밭일에 지친 농부들은 갈증을 해소하고 힘을 보충하기 위해 이 맥주를 빚었다.
깔끔한 목 넘김, 풍성하고 날카로운 탄산과 낮은 쓴맛은 여름 맥주, 그 자체다. 그러나 이게 끝이라면 굳이 세종을 소개할 리가 없다. 세종의 매력은 효모가 내뿜는 독특한 아로마에 있다. 향긋한 흰 후추, 지긋이 코끝을 맴도는 수지 향은 어떤 맥주도 흉내 낼 수 없는, 독보적인 마력이다.
세종 듀퐁은 현대 세종의 원조다. 살짝 불투명한 황금색 속에 흰 후추, 수지, 젖은 낙엽 향이 숨어있다. 이 향들은 노동 뒤에 남아있는 찝찝함을 깨끗하게 씻어준다. 6% 남짓 알코올로 에너지도 보충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 섬세한 탄산과 시원한 목 넘김은 여름 맥주임을 상기 시켜준다. 농부들이 창조한 맥주이니 의심할 여지가 없다. 믿고 마시자.
전기저널 6월호에 기고한 맥주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