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국산 보리 그리고 생극양조
‘생극(笙極)성당‘. 양조장으로 향하는 좁은 길에 들어서자 작은 성당이 눈에 들어왔다. 성당 이름을 보는 순간 갑자기 호기심이 생겼다. 생극이 무슨 뜻이지? 지금 가고 있는 맥주 양조장 이름도 ’생극양조‘였다. 양조장 이름을 들었을 때도 들지 않았던 궁금증이 성당을 보고 생긴 것이다.
부리나케 검색을 하니 지명 유래가 재미있다. 조선 인조 때 이 자리에 참판을 지낸 이 씨의 묫자리가 있었다고 한다. 자리가 좋았나 보다. 후손이 번성하고 집안에는 좋은 일이 계속 됐다. 동네 사람들은 그곳을 좋은 의미로 피리혈이라고 불렀다. 땅 속에서 피리 소리가 나는 혈이라는 의미였다.
좋은 기운도 계속 쓰면 약해지는 법. 후손들은 같은 자리에 계속 묘를 썼고, 결국 복이 끝나버렸다. 이후 피리 소리가 나는 혈이 막혀서 일어난 일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이곳을 생극, ‘대나무로 만든 피리가 다한 곳‘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생극양조는 음성에서 자란 보리로 맥주를 만드는 크래프트 양조장이다. 이곳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지자체 돈을 받아 맥주 사업을 하는 무리라고 큰 오해를 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 글은 국산 맥주 재료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향한 나의 반성문일지도 모른다.
생극성당을 돌아 작은 길로 들어서니 양 옆으로 바람에 휘청이는 곡물이 보였다. 보리였다. 5월 말, 다른 밭은 막 파종을 시작하는데, 이제 여물 준비를 하는 보리는 푸른 하늘 아래 선명한 초록색을 띠고 있었다. 사람들이 청보리라고 부르는 녀석이다.
길옆에 펼쳐있는 보리밭의 모습은 생경했다. 매일 맥아를 만지는 직업을 갖고 있지만, 막상 진짜 보리는 처음이었다. 쭈그리고 앉아 보리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키는 허벅지 정도였다. 줄기에 나란히 붙은 두 개의 이삭은 하늘로 솟아있었다. 눌러보니 말랑한 게, 물이 묻어 나왔다.
끝에는 하늘로 뻗은 기다란 수염이 있었다. 까락이었다. ‘까슬하다, 가시랭이, 꺼스르다‘라는 방언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보리가 얼마나 까슬거렸으면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 하지만 까락은 보리 생장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키가 작은 보리가 서늘한 날씨에서 광합성 효율을 높이기 위해 만든 생존 결과물이다.
이 보리는 이삭이 두 줄로 붙어 있는 두 줄 보리다. 낱알이 크고 당 수율이 좋아 맥주에 사용한다. 우리가 보리밥으로 먹는 보리는 여섯 줄 보리다. 이삭이 여섯 줄로 되어 더 통통한 모양을 하고 있다. 낱알이 작아 식용으로 적당하다. 인간을 위해 진화한 기특한 작물이다.
“안녕하세요. 허성준입니다. 보리밭에 들어가셔도 좋은데, 보릿대 하나씩 꺾일 때마다 만원 씩 받겠습니다!”
서글서글한 인상에 건장한 몸을 한 허성준 대표가 호탕하게 웃으며 우리를 맞았다. 보리 앞에서 신기방기해하는 도시 촌놈들이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품종을 물으니 강맥이라고 했다. 맥주용 보리로 연구 재배되는 한국 품종이었다. 이 밭은 일종의 강맥 시험장이었다. 6월 추수 후에 맥주를 만들면서 장단점을 파악할 예정이라고 했다. 기후 적응성이 좋고 질병에 강해 키우기 수월한 품종이라고 덧붙였다.
보리 제배와 맥주 양조에 관해 궁금한 것이 한 둘이 아니었다. 가장 관심 있었던 부분은 보리를 맥아로 만드는 제맥 과정이었다. 보리를 발아시킨 후 건조한 것이 맥아다. 맥아는 효소를 품고 있어 당화, 즉 전분을 당으로 전환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재료다.
맥주에는 다양한 종류의 맥아가 사용된다. 사소한 부분이 비용과 품질을 결정하기 때문에 제맥은 매우 중요하다. 안타깝게도 국내 제맥 기술은 해외에 비해 많이 뒤처져 있다. 그나마 식혜 용 맥아, 엿기름 제조 정도가 활성화되어 있을 뿐이다.
생극양조는 맥주용 제맥 시설을 갖추고 있다. 허대표는 우리 방문에 맞춰 제맥을 준비하고 있었다. 양조장 입구에는 제맥을 위한 발아기, 건조기, 제근기가 보였다. 건조기 안에는 막 발아를 마친 흑호가 있었다. 흑호는 검정색 보리다. 껍질은 까맣지만 대부분 멜라닌 성분이라 맥주 색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나는 약 7년 전에 김제에서 흑호로 만든 테스트 맥주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도 검정 색 보리로 만든 밝은 맥주가 신기했는데, 생극양조에서 양산까지 한 것을 보니 흥미로웠다. 허대표는 포항에서 구입한 스테인리스 스틸을 중국으로 보내 제맥 장비를 직접 제작했다고 했다. 아직 로스터가 없어 다양한 종류의 맥아를 생산하지는 못하지만 노하우가 쌓이면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닐 듯 보였다.
양조장을 둘러본 후, 의자에 앉았다. 허대표는 양손 가득 신선한 생극양조 맥주를 가져왔다. 맥주를 따르는 그에게 어떻게 보리농사와 맥주 양조장을 시작했느냐고 물었다. 사명감, 자부심 같은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의 단어가 나왔다. 할아버지였다.
허대표의 증조부는 이곳에서 1955년 막걸리 양조장을 운영했다. 조부로 이어진 사업은 1970년 매각됐지만 어렸을 때 가족 모임에서 양조장은 빠지지 않는 주제였다고 한다. 양조장 한 구석에는 할아버지가 막걸리를 담글 때 썼던 항아리가 놓여 있었다. 몸에 이미 양조사의 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맥주를 만들겠다는 결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농민이 되겠다는 결심은 아버지의 권유 때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농사꾼이 아닌 화학공학과 교수다. 농사를 미래 먹거리로 본 혜안도 놀라웠지만 그런 아버지를 믿고 시골로 온 허대표가 더 놀라웠다.
생극에 할아버지 땅이 있었던 덕에 하드웨어는 문제없었지만 소프트웨어가 고민이었다. 시작은 쌀농사였다. 그러나 공부를 할수록 1차 생산물보다 2,3차 농산가공품을 통해 부가가치를 올려야 한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제 와이프는 스페인 사람이에요. 자연스럽게 유럽에 자주 가게 됐죠. 전통시장에 자주 놀러 갔어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확신을 얻은 게 있어요. 농산물에 우열이란 없고 그 지역의 기후와 환경이 고유한 농산물을 만들 뿐이라는 거였죠. 우리 땅에서 나는 농산물은 우리를 담고 있어요. 그런데 마트에 가면 우리 농산물로 만든 가공품을 찾을 수가 없어요. 원물에서도, 가공품에서도 경쟁력이 없는 게 현실이에요.”
허대표는 우리 농업의 미래는 부가가치를 올리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 농산물로 만든 가공품, 높은 부가가치를 받을 수 있는 가공품이 필요했다. 오랜 고민 끝에 얻은 답은 국산 보리로 만든 크래프트 맥주였다. 충북 음성은 보리 제배에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는 가능성을 믿고 2014년 첫 파종을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수확한 보리를 팔 곳이 없었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제주도와 전남에서 맥주 보리가 제배되고 있다. 여기서 수확한 두 줄 보리는 쿼터제로 대기업 맥주 회사가 일정 양을 수매한다. 맥주 양조에 일부 사용되지만 시장 영향력은 미비하다. 맥주 맥아는 90% 이상 수입 산이다. 독일 바이어만, 영국 심슨, 호주 조 화이트 등 100년은 훌쩍 넘은 기라성 같은 회사들이 즐비하다. 나 또한 호주와 덴마크 산 맥아로 양조를 하고 있다.
글로벌 기업에서 나오는 수입 맥아는 상대적으로 품질이 우수하고 가격도 합리적이다. 솔직히 국산 맥아가 상대하기에 버거운 존재다. 일개 사기업에서 맞설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다. 긴 안목의 국가적 투자가 필요하지만 술이 가진 부정적 이미지, 그리고 맥주가 우리 술이 아니라는 이상한 관점이 많은 부분을 가로막고 있다.
다행히 농촌진흥청에서는 국산 맥주 보리에 대한 끈을 놓지 않고 있다. 하지만 허성준 대표가 가는 길은 아직 가시밭이다. 그는 자신이 만드는 맥주를 분노의 맥주라고 표현했다. 처음에는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제배한 좋은 보리를 팔 곳이 없는 현실에 대한 분노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 보리도 충분히 좋은 맥주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 이를 무시하는 사람들을 향한 분노라고 했다. 직접 맥주를 만들어 그들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고 싶다고 했다.
허대표에 따르면 충북 음성은 맥주 보리 제배에 가장 적합한 지역이다. 내륙이라 날씨가 온순하고 2월에 파종할 수 있어 병충해와 잡초가 없다. 실질적인 유기농 농법이라 비용도 절감된다. 하지만 기술적인 측면 외에 더 귀중한 것이 있었다. 떼루아였다.
떼루아는 와인에서 나온 단어다. 와인이 품고 있는 포도 고유의 특성을 의미한다. 맥주에도 떼루아가 있을까? 당연하다. 지역 맥아와 홉 그리고 효모 모두 떼루아를 발산한다. 그가 말한 떼루아는 ‘강함과 질김’이었다.
‘강함과 질김’.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우리 민족을 관통하는 단어 아닌가. 물론 맥주에서 민족주의를 논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부가적인 설명 없이 본능적으로 이해되는 단어가 ‘강함과 질김’이다.
생극 보리는 껍질이 두껍고 폴리페놀 성분인 카테킨(타닌)이 많다. 한반도 기후가 만든 일종의 보호 물질이다. 카테킨은 자칫 맥주에 떫은 느낌을 줄 수 있다. 당화 온도와 pH 그리고 여과 시간에 신경을 써야 한다. 반대로 장점도 있다. 청징에 유리할 수 있고 맥주에 세련된 쓴맛을 부여할 수 있다.
국산 보리의 성질을 이해하면 한국 떼루아를 품은 우리만의 맥주를 만들 수 있다. 한반도 기질을 품은 맥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고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맥주다.
양조장을 떠나면서 그의 할아버지가 막걸리를 담글 때 사용했던 항아리를 찬찬히 다시 살펴봤다. 표면에는 아까 못 봤던 나비가 새겨 있었다. 날개를 활짝 펼친 모습이 마치 막 발효를 마치고 세상에 나온 술처럼 보였다. 항아리는 카르마였다. 허성준 대표와 할아버지를 묶어주는 운명의 카르마.
한국 보리 맥아가 써 내려갈 새로운 챕터가 기대된다. 한반도의 강함과 질김을 품은 맥주가 보여줄 한국 크래프트 맥주의 고향은 아마 이곳 생극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