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원수제맥주축제 맥주 길라잡이, 비어도슨트
와, 비가 더 오면 안 되는데...
구석에 있는 천막으로 몸을 피하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우천을 대비하기 위해 광장 중앙에 설치된 커다란 천막으로 사람들이 뛰어가는 게 보였다. 기대와 달리 구름은 짙어지고 바람은 더 거세지고 있었다. 툭툭 떨어지던 빗방울은 어느새 바닥을 부술 듯 때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무대 위에선 공연 준비 중인 밴드들의 악기음이 빗소리를 뚫고 울려 퍼졌고 모서리를 가득 둘러싼 양조장들은 손님맞이 준비를 하느라 분주했다. 8월의 마지막 주말, 노원수제맥주축제가 예정된 화랑대 기찻길 공원은 기대와 우려 속에 들썩거렸다.
나 또한 오늘 비어도슨트라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3년 전 노원수제맥주축제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비어도슨트는 맥주 길라잡이로 활약해 왔다. 올해 또한 맥주 전문가로서 축체에 참가한 양조장을 대중들에게 설명하고 맥주를 소개하는 역할을 할 예정이었다.
본격적인 활동 전, 한국맥주문화협회 소속 전문가들과 부스를 돌며 대표 맥주를 받고 비어도슨트 부스로 이동하려는 순간 억수 같은 비로 천막에 갇혀버렸다. 축제와 여행의 시작은 화창한 날씨라고 하는데, 시작도 전에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어쩌랴, 양손에 맥주를 들고 온몸으로 비를 맞더라도 할 일은 해야지. 제발, 해님이 얼굴을 드러내길 바랄 뿐.
대한민국 맥주 축제 계절은 5월과 9월이다. 6, 7월은 장마, 8월은 휴가 기간이라 비수기다. 노원수제맥주축제도 원래 7월 초에 계획되어 있다가 장마 우려로 8월 말로 옮겼다. 올해 서울은 장마가 사라졌지만 심한 폭염 때문에 날짜 변경이 신의 한 수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첫날부터 이렇게 비가 쏟아지다니.
화랑대 기찻길 옆에 비어도슨트 부스를 설치하면서 과연 사람들이 방문할까 걱정이 들었다. 비가 멈춘다 해도 습도가 장난 아니었다. 다행히 5시가 되자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테이블 위에 맥주를 깔고 드디어 활동 개시. 온몸을 덮치는 습도는 맥주 한 모금으로 날릴 수 있었지만, 사람들이 축제를 방문할지 의심은 날릴 수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엄청난 후텁지근함에도 축제를 즐기러 오는 연인들과 가족들은 물론, 어르신들까지 꾸준히 보이는 게 아닌가.
‘와, 노원수제맥주축제가 완전히 지역 축제로 자리를 잡았구나.’ 1회 때부터 지켜봤기 때문에 확신할 수 있었다. 작년 비가 왔을 때 광경이 다시 떠올랐다. 비옷을 입은 사람들이 궂은 날씨에 아랑곳하지 않고 축제를 즐겼던 모습이 생경했는데, 올해 또한 다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작은 텐트 밑에서, 기찻길 옆 플랫폼에서, 심지어 그냥 서서 맥주를 마시며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십 년 넘게 수많은 맥주축제를 봐왔던 나에게 이런 모습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무엇이 노원수제맥주축제를 최고의 맥주 축제로 만든 것일까?
먼저, 노원구를 비롯한 노원문화재단이 맥주축제가 함의하고 있는 바를 정확히 꿰뚫고 있다는 사실이 주목해야 한다. 노원구는 경의선이 폐지된 뒤 화랑대 기찻길 공원을 활성화하는 방법에 골몰했다. 대안 중 하나가 맥주축제였다. 하지만 맥주가 주인공이 아닌, 노원의 문화적 특성을 정체성으로 다듬으며 그 안에 노원구만의 가치를 녹여내는데 공을 들였다.
무엇보다 맥주축제가 지역민과 소상공인을 위한 자리라는 공감대 형성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노원 로컬 맥주, 바네하임과 노원수제맥주 협동조합을 중심으로 지역 상인과 노인단체의 참여를 유도했고, 그 바탕 위에 육사의 협조를 얻을 수 있었다.
그 중심에는 맥주축제를 문화로 바라본 노원문화재단이 있다. 재단은 노원의 문화를 뿌리에 둔 채, 맥주와 음식을 가지로 엮고, 지역민을 열매로 맺는 역할을 했다. 축제가 벌어지는 화랑대 기찻길을 걸으면 축제의 주인공이 맥주가 아니라 노원구민이라는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더구나 노원구에는 오래된 로컬 맥주, 바네하임이 있어 맥주 축제가 억지스럽지 않았다.
올해로 세 번째지만 노원수제맥주축제 운영은 첫 회보다 노련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수 만 명에 달하는 인파를 물 흐르듯이 통제했고, 일회용 용기로 제기될 수 있는 환경 문제는 텀블러와 생분해 플라스틱 잔으로 해결했다. 곳곳에 우천에 대비한 천막을 준비해 비가 와도 불쾌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조치했다.
물론 이번 축제가 모두 완벽했던 것은 아니다. 옥의 티도 존재했다. 참가 부스비를 지난 해에 비해 3배나 올려받아, 소규모 맥주 양조장과 상생을 추구했던 노원수제맥주축제의 의미가 크게 퇴색되었다. 그동안 과도한 부스비 상승으로 몰락한 축제들을 봐왔기 때문에 우려가 되는 지점이다. 결국 그 비용은 축제 방문객들에게 전가될 수밖에 없다.
노원의 지역성을 기찻길과 맥주라는 정체성에 녹여, 진정성 있게 표현하고 있는 노원수제맥주축제는 다른 지역의 벤치마킹 대상이 될 만하다. 가끔 맥주나 음식이 주인공이 되어 눈살이 찌푸려지는 축제들이 있는데, 지자체에서 진지하게 고민하면 해결책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어도슨트는 중요한 맥주 문화 중 하나다. 노원문화재단과 축제에서 활동하는 비어도슨트들은 이 지점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다. 이번 축제에는 무려 33개의 국내 크래프트 양조장들이 참여했다. 맥주를 잘 모르면 부스 앞에서 맥주를 고르는 일조차 고역이 될 수 있다. 방문객들이 쉽고 편하게 맥주를 즐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 바로 비어도슨트의 임무다.
우리는 양조장 소개 자료를 만든 후 33개 부스를 모두 방문해 대표 맥주를 받았다. 그리고 축제 초입에서 방문객들에게 양조장과 대표 맥주를 안내했다. 맥주 전문가의 소개만으로 첫 맥주를 선택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비어도슨트 부스가 마련되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어떤 양조장이 있는지 물어보기도 했고 자신의 취향을 말하며 맥주 추천을 바라기도 했다. 그 질문에 답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일.
홉의 과일 향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부산 와일드캣, 서산 칠홉스, 마장동 메즈나인의 IPA를, 청량한 라거를 선호하는 사람들에게는 통영 라인도이치 헬레스, 이천 브루어리 을를의 이천 쌀라거, 경기도 광주 베베양조 필스너를, 특별한 맥주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바네하임의 안녕 자두야 시리즈, 순천 브루어리의 과일 맥주, 진해 다이노 브루잉의 창워너 바이세 같은 맥주를 알려 드렸다.
크래프트 맥주를 잘 모르지만 관심이 많았던 노년층에겐 정선 아리랑 브루어리, 제주도 고부루, 속초 몽트비어, 경주 화수 브루어리, 대전 더랜치 등이 인기가 많았다. 자신의 고향 맥주라며 꼭 마셔봐야겠다고 말씀하는 분들이 적지 않았다.
젊은이들에겐 이제 막 시작한 양조장들을 소개했다. 파주 웨스트엔드, 하남 제이헤이치, 감자 아일랜드, 원주 브로이하우스, 대천 브루어리 같은 곳을 알려주면 눈빛이 반짝였다. 그밖에 전통의 강자, 군포 아트몬스터, 평창 화이트크로우, 영도 와일드웨이브, 청평 크래머리는 마셔봤다는 사람들이 많아 살짝 놀랐다.
맥주 안내를 받는 사람들마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다양한 크래프트 양조장이 있는지 몰랐다고 의아해했다. 비어도슨트 활동을 하면 크래프트 맥주가 젊은 층의 전유물이라는 고정관념도 깨지기 마련이다. 크래프트 맥주 경험을 이야기하는 중장년층이 의외로 많았다. 여행을 하며 지역 양조장을 방문한 경험으로 부스 안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었지만 각자가 갖고 있는 맥주 경험을 나누고 소통하는 즐거움. 이 즐거움이야 말로 맥주 축제가 가진 힘이 아닐까. 술 자체를 소비하기 위해 참관하는 주류박람회와 달리, 축제는 맥주를 매개로 문화를 즐기는 힘이 있었다. 비어도슨트로서 힘을 보탤 수 있는 경험은, 또 다른 즐거움이었고.
얼마 전 맛칼럼니스트 황교익 선생님의 SNS를 보다 무릎을 쳤다. 바가지 문제로 원성을 사고 있는 지역 축제에 관한 소고였다. 농업사회였던 우리는 지역마다 공동체 의식을 고양하는 축제가 있었지만, 산업사회로 전환된 이후, 외지인들을 불러 돈벌이를 하는 축제들이 많아졌다는 지적이었다.
외국의 성공적인 축제를 보면, 대부분 지역민들이 즐기기 위한 축제에 외지인들이 끼어 함께 노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그의 주장에 일견 공감이 갔다. 세계 최대 맥주 축제로 알려진 옥토버페스트도 사실 독일이 아니라 바이에른의 지역 축제다. 관광객들은 우리 동네에 없는 ㄷ른 지역의 정체성을 경험하기 위해 그곳에 간다. 자연스럽게 축제에 진정성이 묻어나면 말려도 지갑은 열리게 되어 있다.
지역 축제는 지역 사람들이 사랑하고 즐기는 것에서 시작한다. 솔직히 말해, 지금 대한민국 맥주 축제는 더 이상 흥미로운 이벤트가 아니다. 전국 모든 지자체에서 맥주 축제가 열리지만 비슷한 포맷과 진행, 게다가 맥주조차 새롭지 않은 경우가 많다. 지역 문화가 녹아있지 않은 맥주 축제, 지역민들이 즐기지 않고 응원하지 않는 맥주 축제는 지자체의 생색내기에 불과하다.
전국 팔도에 그 지역에서만 누릴 수 있는 맥주 축제가 열렸으면 좋겠다. 주인공은 문화와 사람들이다. 맥주의 본질이 그렇듯, 맥주는 흥을 돋우고 분위기를 띄우는 도구다. 비어도슨트는 대중이 그 맥주를 문화로 즐기게 하는 매개체고.
노원수제맥주축제는 ‘외지인’인 나에게 심심할 줄 알았던 노원구가 역사적, 문화적 스토리를 품고 있는 지역이라는 사실을 알게 했다. 무엇보다 축제를 진심으로 즐기고 있는 노원구민을 보는 게 즐거웠다. 설마 맥주 축제가 우리 지역 축제가 될 수 있겠어라고 의심하는 분들이여, 내년 노원수제맥주축제에 오시라. 맥주를 몰라도 괜찮다. 비어도슨트가 반갑게 맞아드릴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