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상꼼씨 Jul 14. 2021

영화 <작은 아씨들>을 보고

어느 번역가의 후기


첫 글로는 뭐가 좋을까 잠시 생각하다가 망설임 없이 선택한 이것.

비록 써 놓은 지 좀 되었지만, 내가 쓴 영화감상문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놈이다.

초보 작가나 번역가, 편집자 등 글을 만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더 특별하게 다가올 영화다.

그중에서도 특히 여성들에게(당연한 소리겠지만).


따뜻하고 시끄럽고 예쁘게 시작했다가 진한 감동과 사색을 남기고 끝난 <작은 아씨들>.

이 영화의 후기를 이제 시작해 볼까?









1. 억누르기엔 너무 고결하고 굽히기엔 너무 드높은 천성


영화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인물은? 단연코 엄마!


이 영화 원작이 자전적 소설임을 감안할 때, 실제 엄마도 비슷한 사람이었을 터. 당시엔 애들 희한하게 키운다고 욕 깨나 먹었을 텐데.. 정말 잘 배운 엄마다.


얄밉게 구는 에이미를 실수로 잃을 뻔하고 자책하는 조

엄마, 난 왜 이럴까요?

감정이 격해지면 모질게 상처 주고 그걸 즐겨요.


넌 날 닮았어. 나도 거의 매일 화가 나는 걸.

네? 엄마는 화 안 내잖아요.


아니야. 원래 느긋한 천성은 아니야. 40년째 노력하며 배우고 있을 뿐이야.


분노에 내 좋은 면이 잠식당하지 않도록.


정말? 그럼 저도 그렇게 할래요.

아냐. 넌 나보다 좋은 방법을 찾았으면 해. 



어떤 천성은 억누르기엔 너무 고결하고 굽히기엔 너무 드높단다



조가 누굴 닮아 글을 잘 쓰나 했더니 엄마가 시인이셨네.

마지막 대사는 통째로 외우고 싶다.

번역도 어쩌면 이렇게 잘했을까!!!






2. 난 천재가 아닌 보통 여자야


막내 에이미는 욕심 많고 자기주장이 강해서 못된 짓도 많이 했지만, 날카로운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뼈 때리는 명대사를 많이 남겼다.


천재가 못 될 바엔 안 그리는 게 나아. 여자는 그래.

난 천재가 아니고 그냥 여자야.

그리고 여자는 돈 벌 방법이 없어. 생계 유지나 가족 부양도 힘들어.


아이를 낳아도 남편 소유야.


그러니까 너도 그렇게 편하게 앉아서 결혼이 경제적인 거래가 아니라는 소리는 하지 마.



자신이 사랑하는 로리는 언니 조를 사랑한다(차였지만).

돈 많은 남자 프레드는 현실적으로는 최적의 대안이지만 도무지 마음이 가지 않는다.

재능을 펼치고 싶지만 현실의 높은 벽을 뚫어버릴 만큼 대단한 재능은 없다.

그러나 지성이면 감천.

실연으로 마음이 약해져 있던 로리가 에밀리의 진심을 알아채고 그 든든한 사랑에 기대게 된다.





3. 누가 내 몰카 올려놨어!


사실 이건, 1차 퇴고 중인 번역가의 참상을 낱낱이 드러낸 영화다.

아무리 피곤해도 누운 지 2시간이면 눈이 저절로 떠진다. 왜냐! 꿈속에서도 퇴고를 하고 있었거든!

추우니까 잠바 걸치고, 식구들 잠 깨니까 스탠드만 켜고 작업해야지...


아이고 손목이야

안구건조증과 손목터널 증후군은 퇴고의 단짝


아... 왜 해도 해도 안 줄어들지? 아직도 50장이나 남았어!


엄마가 밥 갖다 주면서 토닥토닥.. (프리랜서 주부에게는 판타지에 가까운 장면)


이 장면만 보면 조가 부럽다.

아직 괜찮은 체력, 독립된 작업실, 가사 부담 전무, 다른 할 일 전무, 신변 챙겨 줄 사람 있음

- 이 정도의 조건이 갖춰져 있다면 가히 번역계의 금수저급이다.




꾸벅꾸벅


이때부터는 시간이 사라지는 듯한 신비한 기분을 경험하게 된다.

문장에 대한 감각 외의 모든 감각이 극도로 둔해지는 증상도 나타남.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는 중


잠든 거냐고? 아니 잠깐 실신한 거야.

탈고한 거냐고? 아니 그냥 탈진한 거야.







이건 사실... 셋째 베스를 떠나보내고 슬퍼하던 조가 예전에 쓴 대중 영합적인 원고를 다 태워버린 뒤 폭풍 집필을 하여 소설 <작은 아씨들>을 완성하는 장면이었음.^^





4. 계속 써야 더 중요해지는 거야


다시 명대사 쏟아내는 에밀리

글은 잘 써져?

응. 뭘 쓰긴 하는데 썩 좋진 않아.

왜? 난 언니 글 좋은데.


그냥 우리 가족 이야기야. 가족이 티격태격하고 웃는 이야기를 누가 읽겠어?                        

내 생각은 달라. 그런 글들을 안 쓰니까 안 중요해 보이는 거지.


글쎄. 글은 중요성을 반영할 뿐 부여하진 못해.

아니야. 계속 써야 더 중요해지는 거야.




에밀리 멋져.

그리고 조는 <작은 아씨들>로 에밀리의 말을 증명해 냈다.





5. 초보 번역가, 작가들에게


이 영화는 초보 작가를 위한 최고의 시청각 교재이기도.(가족과 롤플레잉으로 연습해 보자)

이제 계약 조건을 이야기해 볼까요? 인세로 5% 드리죠.

매출의 5%요?


아니요. 경비를 제외한 순이익의 5%요. (이거 양아치 아냐?????)

선인세는요?

그런 건 없어요.

하나도 안 팔릴지 모르는 책을 비용을 들여 인쇄하는 사람은 저니까요.

망할 순 없잖아요?


  

이 장면에선 <구름빵>의 백희나 작가가 생각나서 가슴이 아려온다

대신 판권을 넘기면 당장 500달러 드리죠.

지금 집에 돈 필요하다면서요?

판권이 뭔데요?

작품을 인쇄, 복제, 판매해서 생기는 이익을 다 가질 권리요.


              

가치가 꽤 있겠네요.

물론 히트 치면 그렇겠죠.


그래요? 그럼 판권은 제가 가져야겠어요.

500달러는 넣어두세요.


그리고 인세는 10%로 해요.

5.5%로 하죠. 이것도 후한 거예요.

그럼 9%.


안 돼요. 6%. 최종 제안이에요.

그래요? 하지만 당신 때문에 내 주인공을 억지로 결혼시켰으니 저도 그 대가는 받아야겠어요.

6.6%. 더는 절대 안 돼요.

좋아요.

그리고 판권 넘기는 건 천천히 결정해도 돼요.


아뇨, 결정했어요. 내 책은 내가 가질래요.



초보 작가에게 이보다 더 실제적인 시청각 교재는 없을 것이다. 조의 대사를 달달 외우자.





6. 사랑은 타이밍이다


로리의 청혼을 거절해 놓고 나중에 후회하는 조.

이처럼 만만찮은 세상에서 후회만큼 선명하고 정당한 감정이 또 있을까.


엄마, 제가 로리를 너무 일찍 거절했나 봐요. 다시 청혼하면 받아 줄 거예요.

                 

근데 너는 로리를 사랑해?

전 사랑받는 게 더 중요해요. 사랑받고 싶어요.

그건 네가 사랑하는 것과는 달라.

저도 알아요.


엄마, 제가 느끼기엔 여자도 감정만이 아니라 생각과 영혼이 있고 외모만이 아니라 야심과 재능이 있어요.

여자에겐 사랑이 전부라는 말에 신물이 나요.

정말 지긋지긋해요.


그런데 너무 외로워요.

(같이 울었다...)




조는 실제로 로리에게 결정을 번복하겠다고 말하려 했지만, 로리는 이미 에이미와 사랑에 빠져 약혼까지 한 상태였다.


사랑은 타이밍.


사랑은 스쳐 지나가는 바람을 잡는 일이다.

바람을 잡아 곡식을 키우고 꽃을 피우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

영화에서는 조가 로리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 고백을 받아주려고 하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정말로 둘이 맺어졌다면 결국은 후회했을 거라고 말하려는 듯.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로리에 대한 조의 우정과 믿음도 사랑이다. 서로 인생의 타이밍과 방향성이 안 맞았을 뿐.


진짜 사랑은 맺어진 후에 시작되는 법이다. 사랑을 오래 유지하는 비결은 운명의 이끌림 같은 게 아니라 훌륭한 가정교육에서 비롯된 훌륭한 인성일 때가 많다.

메그가 가난해도 웃을 수 있었던 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책임, 의지, 믿음, 희망의 총합이다. 그 절묘한 조합만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꿀 수 있다.








이 가족의 이야기 속에 여성의 독립과 자유에 관한 이야기, 현실과 꿈 사이의 균형에 관한 이야기, 우정과 연애와 가족애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 발언하는 사람의 사명에 관한 이야기까지, 감성과 생각을 자극하는 요소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덤으로 번역가와 작가의 생생한 대환장 마감 풍경, 근세 이전부터 존재했던 인세/판권 양아치의 유구한 역사에 대한 묘사도...)

콘텐츠 제작에 종사하는 프리랜서 여성이라면 누구나 따뜻한 공감을 느낄 만한 웰메이드 영화다. 조만간 원작도 읽어보리라 다짐하면서 오늘은 이만 총총.







아, 미리 사과해 두어야 할 것 같은데, 내 글은 대부분 용두사미다.


죄송...

작가의 이전글 브런치 작가 신청서를 쓰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