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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우 Oct 21. 2020

번아웃 피하기(6)

“서두르는 사람은 멀리 가지 못한다” - 노자

“서두르는 사람은 멀리 가지 못한다” - 노자

이번 화요일에는 탐바치(Tambach) 트랙에 가서 인터벌 워크아웃을 했습니다. 현재 세계 육상계는 대회 시즌입니다. 지지난 주에 첫 다이아몬드 리그 대회가 도하에서 있었고, 브로콤 캠프의 선수들은 5월 30일 스톡홀름 다이아몬드 리그 대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트랙 위에서 웜업을 마친 저와 선수들에게 브로콤과 코치 이안은 스피드 세션을 준비했습니다. 12번의 400m 반복 훈련을 말이죠.


브로콤과의 첫 트랙 세션은 케냐에 도착하고 바로 다음 날 (4/4)이었습니다. 아직 여행의 피로가 풀리지 않았고, 고지대에 적응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저는 ‘여자 선수들만 따라가 보자’ 라는 목표를 갖고 있었죠(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브로콤 캠프에서 훈련하는 여자 선수들의 기량을 몰랐었습니다). 코치 이안은 600m 8번, 400m 2번을 주문했습니다. 첫번째 600m에서 저는 바로 기량의 차이를 확인했죠. 그날 고생하면서 한 가지 중요한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따라가려 하지 말고, 나의 최선을 다하자.


그래도 따라가고 싶은 욕심은 계속 생기더군요. 그래서 이곳 캠프 선수들과 훈련을 할 때마다 ‘내 최선만 다하자’ 라는 주문을 계속 스스로 걸고 있습니다. 화요일 트랙 위에서도 이 주문을 계속 생각했습니다. 2주 전 도하 다이아몬드 리그에서 3,000m를 8:29:91 (개인기록 갱신)에 뛴 글로리아(Gloria Kite)의 리드를 따라서, 맨 뒤에서 ‘따라가려 하지 말고, 최선만 다하자' 하며, 달렸습니다.


여자 선수들은 첫 번째 400m를 70초에 달렸고, 저는 71초에 달렸습니다. 놀랍게도, 그렇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자신감이 막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쉬는 시간이 엄청 짧더군요. 숨을 거의 다 고르기도 전에, 두 번째 400m가 시작되었습니다. 여자 선수들은 69초에, 그리고 저는 72초에 한 바퀴를 완주했습니다. 쉽지 않았습니다. 몸은 산소를 갈급했지만, 2,400m 고지대에는 산소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10바퀴나 더 달려야 하는데… 곧 여자 선수들은 트랙의 시작 선으로 천천히 조깅했습니다. 숨을 고르며, 저는 다시 주문을 외웠습니다: ‘너의 최선만 다해. 그것에만 집중하자.’


7번째 바퀴까지 75초 이내로 달렸습니다. 이렇게 달리기 위해서는 온몸에 남아있는 모든 의지력을 써야 했죠. 8번째 바퀴에서는, 몸이 속도를 유지하지 못하더군요. 첫 번째 200m를 36초에 달리고, 두 번째 200m를 54초에 달리면서, 90초에 400m를 달렸습니다. 마지막 100m를 달리는데, 코어 근육에 쥐가 오는 것을 정말 오랫만에 느꼈습니다. 코어 근육이 제 작동을 못 하니, 팔과 다리가 마치 문어처럼 흐느적거리더군요. 얼굴은 일그러졌고, 선수들이 훈련하는 것을 육상 트랙 옆에서 옹기종기 모여 구경하던 어린 초등학교 학생들은 저를 보며 웃었습니다.


하지만 초등학교 학생들이 비웃는다고 포기할 수 없죠. 그다음 두 바퀴는 200m, 그리고 300m만 달렸습니다. 미리 200m, 100m 지점에 가서 여자 선수들을 기다렸다가, 그들과 같이 달렸죠. 그렇게 휴식 시간을 조금 늘리고 나니, 몸이 조금 회복되었습니다. 마지막 두 바퀴는 83초 안에 들어갔습니다.


마지막 400m를 뛰고 나서, 두 손을 무릎 위에 얹힌 상태에서 최대한 복식호흡을 했습니다. 숨을 조금 고르고 나서, 고개를 들었습니다. 저를 쳐다보고 있던 이안이 씩 웃더군요. 저도 웃었습니다. 그리고 첫 트랙 훈련 날, 한 바퀴를 90초에 뛰기도 쉽지 않았던 것이 생각났어요. 아직도 여자 선수들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하지만 저는 매일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성장하는 것이 느껴집니다.


이렇게 말씀하실지도 몰라요: “매일 2~3번씩 뛰었으니, 당연히 빨라져야죠!” 맞습니다. 이론상으로는요. 하지만 현실에 이론이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무리해서 부상을 입을수도 있고, 너무 쉬엄쉬엄해서 아무런 성장이 없을 수도 있죠. ‘딱 적당한 만큼’ 훈련해야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 하는 노력이 너무 적당하거나 너무 무리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는, 자기 인식 능력이 필요하죠.


이번 한주는 케냐에 오고 나서 가장 힘든 한주였습니다. 매일 아침, ‘쉬고 싶다’라는 생각을 떨쳐내고 일어나야 했습니다. 새벽 조깅 후, 아침의 상쾌함이 새로운 에너지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몸과 마음이 지쳐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죠. 한국에서는 그렇게 원했던 이곳에서의 훈련이 반복되는 일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한국, 서양 음식들이 그리워졌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밤에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몸의 기량이 높아진 게 느껴졌지만, 그만큼 피곤했어요. 번아웃의 징조들이었습니다.


오늘은 (5/18, 토요일) 아침 7시에 팀과  ‘High Run’을 하는 날이었습니다. 오늘 훈련을 위해 어제저녁에 일찍 잤고, 6시 30분에 핸드폰 알람을 통해 일어났지만, 도저히 달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몸과 마음이 거의 방전 되어있었죠. 이 상태로 달리면, 정말 번아웃이 올 수 있겠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바로 이안에게 오늘은 쉬어야겠다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잠을 더 자려 했지만, 매일 7시 전에 일어난 습관 때문인지 잠은 오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몸은 무거웠죠. 뭔가 새로운 에너지를 줄 수 있는 것을 해야 했습니다. 방을 둘러 보니, 너무 어지러워져 있었어요. 훈련에만 집중하느라, 방 정리를 하지 않았죠. 방을 치우기 시작했습니다. 더러운 옷들을 빨래통에 넣고, 물품들을 각 자리에 돌려 두었습니다. 방에는 두 개의 침대가 있는데, 한 침대가 더 큽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작은 침대에서 자고 있었어요. 왜 6주나 걸렸는지 모르겠지만, 바로 침대를 바꿨습니다. 방바닥을 대걸레로 닦고, 간단히 점심을 먹은 후, 새로 정리한 큰 침대에서 낮잠을 잤습니다. 잠의 품질이 달라지더군요. 재충전된 몸과 마음으로 일어나서, 이 뉴스레터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빠른 결과를 원합니다. 빠른 성장을 위해서라면, 한계 이상으로 자신을 밀어붙이는 데에 익숙하기도 하죠. 그렇게 몸과 마음을 ‘하얗게 불태우고,’ 번아웃에 빠지게 되기도 합니다. 인내심을 갖고, 꾸준히 이어 나갔더라면 다 잘되었을 일도, 욕심을 내고 서두르다 망친 경우도 있습니다. 서두르지도, 게으름 피우지도 않으면서, 나만의 중심을 잡고 천천히 나아가 보렵니다. 감사하고 건강한 나날들 되시길 바랍니다.


2019년 5월 19일에,

김성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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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 전 도하 다이아몬드 리그 대회에 브로콤 캠프에서 훈련 중인 선수 두명이 참가했습니다.

아쉽게 마지막 바퀴에서 선두를 유지하진 못했지만, 글로리아(Gloria Kite)는 3,000m 경주에서 8분 29초로 자신의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찰스(Charles Simotwo)는 1,500m 경주에서 3분 33초의 기록으로 5등을 했고요. 물론 이 선수들과 같은 강도로 훈련을 하지는 못하지만, 매일 같이 생활하고 훈련하던 선수들이 세계적 대회에서 달리는 모습을 티비로 보는 것은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현지 훈련과 생활이 담긴 유튜브 비디오를 여러개 만들었습니다.

여자 선수들과의 ‘이지런’ 비디오에서는 이텐의 경치를 느낄 수 있으실 겁니다. ‘다른 선수들과 비교하지 않기’ 비디오에서는 탐바치 트랙까지 조깅하는 길의 아름다움과 달리기에 관한 저의 생각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텐, 케냐에서의 훈련과 생활이 어떤지 간단히 설명하는 비디오를 만들었습니다. 구독과 커멘트는 언제든 감사합니다.


이번 주의 음악.

이번 주의 음악의 주인공은 Cigarettes After Sex입니다. 자기 전에 들으면 잠이 솔솔 잘 옵니다. 미국 NPR Tiny Desk에서의 그들의 연주를 감상해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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