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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우 Oct 20. 2020

아침 5시 55분에 109분 달리기를 하는 방법(5)

머릿속 원숭이를 정중하게 무시하기

*다섯번째 뉴스레터는 오늘 아침에 롱런하고 나서 쓴 짧은 에세이로  대신합니다. 머릿속 원숭이에게는 말대답도 하지 않는게 좋다는 걸 다시 배웠고, 달릴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걸 온몸으로 느낀 하루  였습니다. 감사한 일요일 되시기 바랍니다.


토요일 아침 5시 55분에 109분 달리기를 하는 방법: 1분 버젼


1) 금요일 저녁 10시에 핸드폰을 에어플레인모드로 전환하고 잠자리에 든다 (알람을 5:55AM에 맞춘다)

2) 다시... 유튜브/인스타그램 끄고, 에어플레인모드로 전환하고 잠자리에 든다 (알람을 잊지 않는다)

3) 알람이 울리자마자 침대에서 일어난다

4) 다시... 침대에서 일어난다

5) 옷을 입고, 신발을 신고, 문 밖으로 나선다

6) 속도나 시간 보다, 호흡과 자세에 집중한다

7) 힘들 때 일상에서 감사한 것들을 기억한다

8) 성취감에 두팔을 위로 들어본다!


토요일 아침 5시 55분에 109분 달리기를 하는 방법: 에세이


5월 11일, 2019, 아침 5시 55분. 핸드폰 알람에 잠이 깬다. 그리고 항상 그렇듯, 머릿속에 있는 원숭이가 가장 먼저 말을 건다: “침대 편하지 않아? 잠 좀 더 자! 달리기는 오늘 오후, 아니 내일도 할 수 있잖아~!”


지난 몇 주 동안 이 원숭이의 말을 듣고 아침 조깅을 하지 않은 적이 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오늘은 롱런 - LSD  (long slow distance) - 을 하는 날이다. 일주일에 단 한 번 하는 이 훈련을 빼먹을 수 없다. 오늘 롱런을 하기  위해 어제저녁 10시에 핸드폰을 에어플레인 모드로 전환하고 잠을 잤다. ‘힘이 없다’는 핑계를 대지 않도록, 어제저녁도 넉넉히  많이 먹었다.


원숭이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응대할수록 이 녀석은 더 시끄러워진다. 몸을 움직이는 게 먼저다.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잠옷으로 입는 룰루레몬 스웻펜츠와 긴팔을 벗어서 침대 위에 놓는다. 그리고 아침에 달리러 나갈 때 입는 옷들 -  역시 세상 가장 편한 룰루레몬 조거와 롱슬리브- 을 주섬주섬 챙겨 입는다. 장갑을 낄까 생각해본다. 하지만 이른 아침에 그렇듯,  행동이 생각을 따라가지 못하고, 장갑 대신 얇은 레인 재킷을 걸치고 문밖으로 나선다.


아직 해가 지평선 위로 뜨지는 않아서, 하늘은 새벽녘의 검푸른색을 품고 있다. 지금까지 수백명의 세계적인 달리기 선수들이 달리기를  시작한 성 패트릭 고등학교 (St. Patrick’s high school) 대문을 천천히 나선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뱀과 같이 이리저리 휘는 언덕으로 가득 찬 이텐의 시골길로 들어선다. 이미 어떤 길로 뛸지는 어제 저녁부터 생각을 해두었다. 7  km을 시골길을 따라 달리다가, 엘도렛과 이텐을 잇는 큰 길을 만나면 오른쪽, 엘도렛 쪽으로 방향을 튼다. 이른 아침에는 속도를  바로 내기가 힘들기에, 큰 길 까지는 대충 40~45분 정도가 걸릴 것이다. 엘도렛 쪽으로 방향을 틀고 나서는, 20~25분을 더  달리다가, 180도 방향을 틀고, 큰 길을 쭈욱 따라서 학교로 돌아오면 된다. 이 정도면 총 100분을 달리는 나의 목표를 달성  할 수 있을 거야.


그런데 몸이 너무 무겁다. 어제 저녁을 너무 많이 먹은 건가? 가볍게 달리기 위해 달리는 리듬을 더 빠르게 해본다. 가슴을 열고  늑골을 확장하고, 코어 근육으로 리듬을 주도해 본다. 잘 되지 않는다. 몸은 계속 무겁다. 그래도 계속 달린다.


어느새 햇빛이 내 얼굴을 때린다. 적도 부군 2,400m 고지대에서의 햇빛은 해수면에서의 햇빛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첫 주에  선크림을 바르지 않았는데, 얼굴 여기저기가 얕은 화상을 입어서 헬보이가 되었었다. 그 이후로는 달리러 나가기 전에 매번 종교적으로  선크림을 바른다.


시계의 스톱워치는 22분을 이야기하지만, 한 시간도 더 지난 것 같다. 몸이 리듬을 타지 못하고 있다. 언덕을 오르고 있다지만,  km당 6분 정도의 속도로 달리고 있고 (느낌), 코로만 숨쉬기가 버겁다. 아직 큰길까지 가지도 못했는데. 머릿속의 원숭이가 다시  속삭인다: “힘들지? 오늘 컨디션이 좀 아닌 거 같아. 내일 아침에 하는 건 어때? 곧 큰길이 나오면 왼쪽으로 돌아서 바로  학교로 가자.” 응대하지 않는다. 그저 호흡에 집중하며, 계속 달린다.


드디어 엘도렛과 이텐을 잇는 대로에 도착. 시계의 스톱워치는 45분을 가리키고 있다. 생각할 틈을 주면 왼쪽으로 갈지도 모른다.  몸을 오른쪽으로 튼다. 휴우. 이제 내리막길을 달리며 리듬을 살려보자. 20~25분 후에 돌아서, 학교로 가면 된다.


해는 등에서 나를 비춘다. 목 등에 선크림 바르는 것을 깜빡했다. 머리를 묶고 있는 끈을 푼다. 긴 머리가 햇빛을 가려주겠지.


호흡과 자세를 살펴본다. 코로 숨을 숨 쉬는 것을 확인한다. 가슴과 늑골이 열려 있는 것을 확인한다. 그 공간에 뱃 근육이  느슨하지도, 너무 단단하지도 않게 자리 잡게 한다. 중력을 최대한 사용할 수 있도록, 척추가 쭉 피어진 상태로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 있는 것을 확인한다. 고개는 숙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다. 양 다리가 위 아래로는 최소한 움직이며 지면을 밀어내는지  확인한다. 어깨와 팔이 다리의 리듬을 주도하도록 해본다. 이건 계속 연습하는건데, 쉽지 않다. 조금 되는 것 같다.


배가 고프다. 달리러 나오기 전에 물만 세모금 마셨다. 훈련 캠프 요리사 소피가 잘하는 자파티, 우갈리, 마나구가 생각난다. 기  억속에 너무도 명확하게 존재하는 동네 윤가네 오리구이, 방이동 밀향기 해물칼국수 집의 만두전골, 쉑쉑 밀크쉐이크, 어머니의  아침밥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어지러워진다. 의도적으로 시선을 위로 올려서, 하늘을 본다. 이텐의 하늘은 정말 언제나 맑고,  아름답다.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그래, 나는 여기에 있어. 이곳에 있는 것을 인지하며, 달리기를 이어 간다.


시계를 보니, 벌써 달린 지 1시간 10분이 지났다. 큰길로 나온 후, 25분을 더 달렸다. 이제 방향을 바꿔서,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바로 바람과 햇빛이 얼굴을 때린다. 큰길로 나온 후에 달리기가 편한 이유가 있었다. 대부분 내리막길이었고, 바람이  등을 밀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부터가 진짜 훈련이다. 마라톤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포기하는 구간이 30~35km 구간이라고 한다. 목표로 한 거리의  75% 이상을 완주했을 때, 몸 안의 포도당과 마라톤을 시작 했을 때의 흥분은 모두 고갈되어 있을 것이다. 아직 갈 거리가  10km 정도 남아 있다는 사실은 머릿속 원숭이의 말에 대답하게 하고, 지하철을 타고 결승점으로 향하게 하나 보다. 하지만 나는  다른 옵션이 없다. 돈도 없고, 여기는 버스나 지하철도 마. 걷거나 포기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실제로 그럴 만큼 힘들지도  않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마음을 이어 간다.


브라더 콤 캠프에서 가장 빠른  로넥스[https://www.youtube.com/watch?v=WK9aXNXvYp4&t=1200s]를 떠올린다. 그가 내  옆에서 그토록 가볍지만 힘차게 달려나가는 모습을 상상한다. 나는 그런 로넥스의 자세를 흉내내본다. 되는 거 같기도 하면서, 되지  않는다. 로넥스 만큼 코어 근육과 엉덩이 근육들이 잘 작동하지 않는다. 로넥스 처럼 코어 근육으로 다리의 리듬을 조절해본다.  조금 되는 듯 하면서, 나는 달리기에 몰입한다.


브라더 콤이 코칭하는 선수들은 수년간의 희생과 노력으로 인간의 영역을 뛰어넘은 심장, 폐, 다리를 유지하고 있다. 남자 선수들은  10km를 27분 중반대를 뛰고, 가장 잘 뛰는 여자 선수는 10km을 30분 36초에 달린다. 하지만 그런 그들도 사람들라는 걸  요즘 느끼고 있다. 아침 6시 훈련 후, 밀크티를 한 두잔 마시고는 9시 30분에 있을 메인 훈련을 위해 바로 ‘아침낮잠’을  잔다. 점심을 먹은 후에는 또 낮잠을 잔다. 어제저녁 8시 40분, 자기 방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을 하고 늘어져 있는 나를  로넥스는 이렇게 말하며 쫓아냈다: “킴, 내일 우리는 아침 롱런 가야 해. 잠을 잘 시간이야!”


이텐 중앙에 있는 시장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업힐을 마저 뛰어올라 간다. 학교 대문과 시장 끝 사이에 있는 마지막 업힐 빼고는,  다운힐이다. 토요일은 마을 장날이다. 많은 상인이 여기저기 짐을 펼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케냐의 교통수단인  마타투(matatu)와 보다보다(bodaboda)가 평소보다 많다. 바람과 햇빛을 받아들인 후, 나의 몸과 마음은 달리기와 하나가  되어 여기까지 왔다. 이 흐름이 계속 이어지게만, 호흡과 자세를 느끼기만 한다. 내 상체가 다리의 리듬을 이어 나가는 게  느껴진다. 코어 근육이 다리의 리듬을 주도하고 있다. 케냐 선수들이 보았을 때 참 느리게 달리고 있지만, 강렬한 느낌이 몸에  흐른다. 달릴 수 있어서 감사하다.


학교 대문까지 이어지는 마지막 업힐로 들어선다. 이 언덕 위까지만 달리면 끝이라는 것을 알기에, 남아 있는 모든 것들을  내뿜어본다. 교복을 입은 학교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축구, 베드민턴, 배구를 하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몇몇 학생들이 나를 호기심  가득 찬 눈으로 쳐다본다. 나는 그저 웃는다.


109분 전에 잠이 덜 깬 채로 걸어서 나온 학교 대문을 감사함으로 깨어 있는 상태로 통과한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다. 아침에  맨발 달리기를 하는 작은 풀밭 위에서 조깅으로 쿨다운 하고, 스트레칭 한다. 마지막은 다리의 안쪽을 스트레칭하기 위해 풀밭에  앉아서, 뻐근한 부분들이 풀려질 때까지 호흡 해본다.


천천히 일어나면서, 바지에 붙어 있는 풀들과 흙들을 가볍게 털어낸다. 로넥스와 남자 선수들 처럼 언덕으로 가득 찬 18km을  60분 안에 달리지 못했다. 글로리아와 여자 선수들 처럼 20km을 70분 안에 달리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나의 최선을 다  했다. 포기하지 않았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성취감과 만족감이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가득하다. 원숭이는 조용하고, 나는 나도 모르게  미소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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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사진은 롱런 후 먹은 음식 중 일부입니다. 오른쪽 밑 접시는 왼쪽 밑 접시의 'after'가 아니라, 새로 주문한  마나구와 자파티와 아보카도 반쪽입니다. 이 음식들 외에 망고 1개, 바나나 3개, 캐슈넛 3줌, 캐슈넛버터+초콜렛잼+아보카도반개, 땅콩버터&잼 샌드위치, 밀크티 4컵, 우지 2컵, 생강소다 1병, 초콜렛 그리고 많은 물을 마셨습니다. 먹는 것은 훈련 만큼 중요합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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