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지 못하게 되었을 때
"모두 그저 거기에 있을 뿐이지요. 그겁니다. 모이어스 씨, 당신이라는 분의 의미는 그저 거기에 있다는 것 뿐입니다. 외적 가치를 지닌 목적에만 너무 집착해서 움직이는 바람에,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이 내적 가치임을, 즉 살아 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삶의 황홀이라는 것을 그만 잊어버리게 되었지요." - 조셉 켐벨 (신화의 힘)
금요일 오후, 킬루 리조트에 가서 뉴스레터를 쓰려고 노트북을 열었습니다. 제 앞에는 달달한 케냐 밀크티가 담긴 컵과 10분 전만 해도 케냐 음식 (마나구와 자파티)이 담긴 접시가 놓여 있었죠. 5분 동안 스크린을 뚫어져라 쳐다만 보고도, 한 글자도 쓰지 못했습니다. 밀크티를 마시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두 손을 키보드 위에 올려 봅니다. 5분이 지났는데, 아무것도 쓰지 못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이번 한 주 동안 그다지 특별한 일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매일 달리고, 먹고, 자고 하는 생활이 일상이 되어버린 거죠. 처음에는 그렇게 어려웠던 고지대의 공기와 훈련 스케줄에 몸과 마음이 적응했나 봅니다. 거리에서 저를 보고 ‘무중구!!’ 하고 케냐 아이들이 소리치는 것도 이제 익숙한 것 같습니다. 화요일마다 먹는 자파티 점심, 금요일마다 먹는 키데리 (콩과 옥수수) 점심, 그리고 매일 저녁에 먹는 우갈리와 수쿠마 위키도 일상이 되어버린 듯 합니다. 매일 아침 들리는 새들의 노랫소리와 하나에 100원 하는 아보카도와 바나나들도 말이죠. 처음에는 힘들었고, 신기하고, 새로웠던 것들이 ‘당연한 일상’이 되었습니다.
아, 유튜브 라이브를 시작했고, 브라더 콤을 인터뷰한 것은 새로운 것들이긴 하네요. 그리고 어나의 추천으로 새로운 오디오북을 듣고 있습니다. 책의 주인공은 수년간 목표로 했던 정식 신경의학과 의사가 되길 일 년 남겨 놓고, 자신이 치료 불가능한 상태에 도달한 폐암을 가진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순간, ‘의사가 되고 나서 해야지’ 하고 계획해 놓았던 장밋빛 미래는 마치 날숨처럼 눈앞에서 사라지게 되고, 그는 새로운 현실을 맞이합니다.
오디오북을 들으면서, 하나의 큰 가정을 사실로 여기며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적어도 80살까지는 살지 않겠어?’라는 가정 말이죠. 이 순진한 가정은 미래의 나를 위해 현재의 나를 어느 정도 희생시키고, 미래를 대비할 수 있게 해왔습니다. 미래에 누릴 수 있는 안락함과 편안함을 위해 지금 당장 누릴 수 있는 행복감이나 편안함을 미루고, 미래를 계획하고, 저축하게 했습니다. 지금 당장은 큰 만족감을 주지 못하더라도, 미래에 더 큰 의미와 결과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는 것들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 수 있는 동기를 줬습니다. 어떻게 보면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게 도와주고, 어떻게 보면 지금의 나를 희생시키며, 미래의 나만 좋은 삶을 살게 하죠.
그런데 책의 주인공은 ‘80살까지는 살지 않겠어?’라는 가정이 눈앞에서 녹아 흘러 사라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암은 그에게 80살은커녕 1, 2년의 세월만을 허락합니다. 급격히 변화한 현실은 그에게 삶과 시간을 새롭게 살기를 요구합니다.
다행히도 저는 ‘앞으로 50년은 더 살 거야.’라는 가정이 아직 안전한 현실 속에 있습니다. 주어진 삶에 대해 감사하는 것을 매일 연습하고 있죠.
하지만 ‘만약 내가 살 수 있는 시간이 3년밖에 남지 않았다면, 그 남은 3년을 어떻게 보낼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돕니다. 달리러 케냐에 다시 올까? 케냐 사람들이 아이폰 달라고, 돈 달라고 하면 기분이 나쁠까? 갑자기 삶에 대한 관점이 바뀌어서 어떤 새로운 것을 할까? 아마도, 노년의 삶을 위한 저축은 그만두겠죠. 내가 죽고 나서도 존재할, 나의 발자취를 어떠한 형태로든 남기고 싶어할 것 같습니다. 신경을 거스르는 작은 일들에 대해 신경 쓰지 않고, 화를 덜 내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에 집중할 것 같습니다.
매일 저녁, 밤의 요정들은 밤하늘에 수천개의 별들을 수놓습니다. 보고 있는 수많은 별 중에, 수만 년 전에 이미 생을 마감한 별들도 있을 겁니다. 지금 보고 있는 빛이, 그 별의 마지막 몇분일 수도 있어요. 그렇게 별들을 보다 보면, 삶과 생명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놀랍기만 합니다. 그리고 당혹스럽기도 합니다. 삶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어떻게 의미있게 만들 수 있을까? 혼자 되묻곤 합니다.
삶에 대해 놀라움과 감탄, 그리고 당혹감을 느끼고, 의미에 대한 질문을 시작한 건 사춘기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정확한 답을 내놓지 못합니다. 그저 놀라워하고, 고뇌하다가, 추운 밤바람에 못 이기는 듯이 방으로 들어가곤 하죠.
어제(토요일) 아침, 2시간 롱런 후 쿨다운 중 풀밭에 구멍이 나 있는 걸 보지 못하고 왼쪽 발목을 접질렸습니다. 케냐까지 와서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과 찌르는듯한 고통은 저를 분노하게 했습니다. 글에 담을 수 없는 욕이 나왔고, 풀밭에 누워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맨발이었다면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하며 신발끈을 풀고 저 멀리 던저버렸습니다. 고통은 이어져갔고, 혼자 화가 나서 씩씩댔습니다.
고통이 조금 줄어들어서 꼭 감고 있던 눈을 떴습니다. 하늘이 보였어요. 새파란 하늘에 새하얀 하늘은 너무도 아름다웠고, 제 고통과 분노에는 무심했죠. 그 순간 웃음이 나왔습니다. 저 자신이 너무 웃겼던 거죠. ‘그렇게 화낸다고 발목이 나아지냐?’ 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제야 숨을 길게 내쉬었습니다. 그렇게 누워서 하늘을 쳐다봤어요. ‘어쩌겠어? 이미 접질려졌는데.’
컨디션이 좋아서 저녁에도 뛰려 했는데, 물이 올라오고 있었는데… 당연히 아쉽습니다. 근데 어찌할까요. 다친 왼쪽 발목만 시간 여행을 시킬 수도 없고. 감사할 것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부상 없이 달려온 것, 그리고 뼈가 부러지지 않은 것이 감사했습니다. 달리기 훈련을 안 할 핑계가 생긴 것도요. 푹 쉬면서, 망고랑 바나나랑 아보카도를 쌓아두고 많이 먹어야겠습니다. 달리기 말고도 살아 있는 것을 온전히 경험하게 해주는 못 그리던 그림도 더 그려야 겠습니다. 미뤄 두었던 <케냐 마라토너들은 천천히 뛴다> 번역도 마무리하고, 비디오들도 만들어야죠. 아 그리고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침대에 누워서 멍도 때려야겠습니다.
일상에 변화가 없다고 생각하다가 봉변을 당한 건지, 부상 때문에 다음주 는 새로운 나날들이 될 것 같습니다. 현실이 내가 원하는 것과 다르다고 투정만 부리면 불행해지는 것 같습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지하고, 어떻게 할 것인가 결정하면 행복의 가능성이 만들어집니다. ‘앞으로 5주는 더 케냐에서 달릴 수 있다’라는 가정을 발목 부상이 파도에 쓰러져 내려가는 모래성처럼 무너트렸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원하지 않았던 현실입니다. 새로운 한주가 기대됩니다. 감사하고 건강한 한주 되시길 바랍니다.
김성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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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가 되는 100초
브라더 콤을 인터뷰하고, 그가 나오는 다른 영상물들을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데이빗 루디샤가 세계 최고의 800m 선수가 되가는 과정이 담긴 이 다큐멘터리는 어떻게 보면 루디사갸 조연이고 브라더가 주연입니다. 그냥 최고입니다. 달리기, 코칭, 멘토링등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꼭 보세요.
같이 훈련하고 있는 선수 3명이 오는 목요일 스톡홀름 다이아몬드 리그에 나갑니다.
현재 세계에서 두번째로 빠른 로드 10km 기록 (26분 46초!!)를 보유하고 있는 Ronex Kipruto의 활약이 기대됩니다. 어제 요새 컨디션이 어떻냐고 물어보니, 요새 몸이 아주 가볍고 good form이기 때문에, 스톡홀름 다이아몬드 리그 10km race에서 26분대로 뛸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더라구요 (27분대는 기본이구요…). 아마 유튜브에서 라이브로 해줄겁니다. Ronex Kipruto 말고도, 남자 1,500미터 경주에서 Charles Simtwo, 여자 5,000미터 경주에서 Gloria Kite를 주목하세요.
이번 주의 음악
이번 주의 음악의 주인공은 Daft Punk의 Too Long입니다. 뉴스레터 쓰면서, 혼자 들썩 들썩, 머리를 앞뒤로 흔들면서 듣는 좋은 음악입니다. 이들의 새로운 앨범은 정말 영영 나오지 않을까요? Random Access Memories 같지 않아도 좋으니, 새로운 음악으로 찾아와주면 정말 행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