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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지은 Feb 17. 2021

어쩔 수 없는 삶의 상처로부터

한강, <그대의 차가운 손>을 읽고

어른들의 증언에 의하면 나는 태생적으로 예민한 아이였다. 2.4kg이 채 안되는, 부서질 듯 작고 약한 몸으로 태어나 품에서 내려놓기만 하면 정말로 두개골이 부서질 것처럼 울어대는 통에 엄마는 귀신같은 등 센서를 달고 태어난 첫째를 업고 달래느라 허리가 영영 굽을 뻔 했단다. (삼십년이 지금도 넌 그때부터 진상이 따로 없었다며 종종 눈을 흘기는 걸보면 과장은 아닌 듯 하다.) 좀 더 크고 나서는 종일 구석에 박혀 어린이용 위인전집이니 전래동화니 책만 읽다 낯선 사람이 다가오면 놀라서 울음을 멈추질 않았다니, 내가 왜 딩크의 삶이 다른 미덕은 몰라도 평온만큼은 보장해주리라 철썩 같이 믿고 있는지는 유전의 법칙 하나로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


자아 성찰이 가능한 나이가 된 후부터는 늘 스스로의 예민함과 싸워야 했다. 기질이라는 것의 억셈이 그러하듯, 쉴새 없이 싸웠지만 번번히 졌다. 자기혐오는 패자에게 허락된 유일한 전리품이었다. 예민한 기질을 자극하는 외부요인보다 재수없게 타고난 기질 자체가 견딜 수 없이 싫었다. 누군가 무심코 뱉은 악의 없는 일반화에, 연인의 갑작스런 무표정에, 친구의 말투에 묻어있는 호혜적인 뉘앙스에, 다툼 중 툭 튀어나온 무성의한 단어들에, 스스로에게 당당한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구김살 없는 웃음에 괜히 배알이 꼴릴 때, 내가 바라는 내 모습과 상대가 보는 내 실체의 불일치를 확인할 때마다 속수무책으로 뒤틀리고 생채기가 나는 마음을 어찌할 바 몰랐다. 남들이 ‘그게 뭐라고’ 하는 것들에 오래, 그리고 깊이 아팠다. 벗어날 수 없는 천성이 평생을 쫓아다니며 삶을 고달프게 만들 것 같았다.


지난해 읽은 한강의 <그대의 차가운 손>에는 컴플렉스를 대하는 두 가지 형태가 등장한다. 거식증을 앓는 L은 자신의 컴플렉스를 넘어서기 위해 매달리다 못해 아픈 자리를 후벼 파는 유형이다. 고도비만이던 그녀는 40kg을  감량한 후 폭식과 구토를 반복하며 극단적으로 몸무게에 집착한다. 완벽한 여자의 표본인 E는 컴플렉스의 원인을 단절한 후 애초에 그런게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살아간다. 여섯째 손가락을 잘라낸 자리의 공허를 그럴듯한 바깥의 것들로 메우면서.


이십대 중반까지는 L의 방법을 택했다. 지난날의 실패와 부족, 그 길을 지나오는 과정에서 조각난 자존심, 나를 짐 지우는 것들에 끊임없이 매달리며 인과관계를 찾아내려 이미 아문 자리들을 헤집고 또 헤집었다. 허연 시인은 “묻어버린 그 어떤것도 꺼내지 말 것”이라 충고했지만, 유난히 춥고 혼자인 밤이면 폐허의 불문율을 어기고 묻어놓은 상처들을 도굴하기 일쑤였다. 내 것인지 아닌지 분간조차 할 수 없는 조각들까지.


이십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E가 그랬듯 나는 내가 아닌 사람이 되기로 했다. 세상살이에 유독 부침이 큰 천성은 정해져 있고, 그게 피에 흐른다면 아예 없는 척 하는게 나았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예민함은 늘 뾰족함의 동의어였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기피하는 기질이기에 오랜 시간에 걸쳐 자기최면을 걸어야 했다. 화려한 겉과 유려한 태로 공허를 메웠던 그녀처럼, 최대한 이성과 관련된 형용사들로 이미지가 정의되게끔 바꿔나갔다. 차분함, 의연함, 냉정에 가까운 침착함. ‘Fake it ‘til you make it’이라고, 저 단어들은 어느새 외부에서 나를 설명할 때 입에 오르는 공통된 수식어로 자리 잡았지만, 어쩐지 더 갈 곳을 잃어갔다. 마땅히 화를 냈어도 좋을 무례 앞에서, 충분히 힘겹다고 말할 수 있는 일의 무게 앞에서, 가슴이 너덜해질만한 슬픔 앞에서 밀려오는 동요를 외면하면서. 저 쪼잔하고 지질한 마음은 내 것이 아니라고 아무리 스스로 돌이켜도 어떤 밤이면 대충 덮어놓은 감정들이 구린내를 풍기며 올라와 잠을 이룰 수 없었고, 인지부조화를 견디다 못해 엉뚱한 데 화풀이를 했다.


소설 속 두 여인의 삶은 그들의 시선이 변화하는 시점에서 새 국면을 맞는다. L은 ‘먹토’를 반복하던 고통의 루프를 끊어낸다. 몸을 더 이상 바꾸려 하지 않음으로 그녀는 자신의 몸이 극복의 대상이 아닌 안고 가야할 일부임을 보여준다. 극복되어야 할 것은 자신이 아닌 외부의 시선이다. 자기 손을 뜬 석고상을 조용히 품에 안고 떠나는 그녀는 처음으로 평온해 보인다. 반평생을 감춰온 여섯째 손가락의 흔적을 드러내 보이며 무기이자 굴레였던 탈을 상징하는 석고상을 깨부수는 E. 그녀의 차가운 손은 여분의 손가락이 있던 자리의 희미한 흉터를 내보인 이후에 비로소 온기가 돌기 시작한다.


나를 괴롭혀온 무언가를 세계 밖으로 밀어내려 하는 대신 세계의 일부로 받아들일 때, 고통이 행사하는 위력은 신통하리만큼 줄어든다. 애초에 고통이란 나의 것을 영영 타자화 하려는 노력에서 오는지도 모르겠다. 지난하고 애먼 노력을 오래도 한 후에야 예민한 기질을 내 일부라 부를 수 있게 됐다. 그동안 불현듯 찾아오는 날 선 감정들은 마치 문 밖의 강도 같아서 한 뼘의 공간도 내어주지 않으려 애쓰다가 무력한 날이면 겉잡을 수 없이 그들에게 잠식당해왔다. 그러다 공방전에 지친 어느 날, 조용히 문을 열어주자 놀랍게도 그들은 손님처럼 머물다 떠났다. 그렇게 오고 때가 되면 또 갔다. 가끔씩 예상보다 오래 머무는 경우도 있지만, 분명한 건 언젠가는 떠난다는 것이다. 연민과 허무, 질투와 열패감, 비열한 희열도 보내기 위해서는 먼저 맞이해야한다.


극복의 아이러니는 극복하려 애쓰지 않는데 있다. 그저 마음의 한 켠을 내어주고 묵묵히 눈 앞의 몫을 사는거다. 상처를 삶으로 들이는 순간, 비로소 삶은 상처와 분리될 준비를 한다. 우리 앞에 내던져진 어쩔 수 없는 것들과 화해할 때, 차가웠던 날들이 남긴 틈새로 마침내 볕이 들기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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