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커트 보니것은 말했다. “나는 글을 쓸 때, 입에 크레용 하나를 물었을 뿐, 팔도 다리도 없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20세기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작가도 글 앞에서 무력감을 느꼈다는 사실로 애써 스스로를 다독인다. 한 시간동안 세 문장도 쓰지 못했다. 분명 머릿속에서는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마친 구상이었는데, 글로 옮기니 토막 난 사지처럼 흩어져 나뒹군다. 처참하다.
글의 한계를 체감할 때면 믿음직한 작가들의 문장으로 피신한다. 내게 좋은 글은 크게 두 종류다.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글, 그리고 사람 혹은 삶에 대한 진실을 포착하는 글. 전자가 잠자던 지성을 깨운다면, 후자는 본질을 관통한다. 글쓰기의 벽에 부딪히는 밤이면 나만큼 더디고 미욱한 인간의 초상을 그린 책과 함께 침실로 향한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섬세한 문장으로 조탁한 예리한 통찰이 마음을 꿰뚫는다.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고 적은 바 있다. 반대로 정확한 글은 온전하게 이해 받는 경험을 선사한다. 맨몸 구석구석 작은 흉터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입 맞추는 연인처럼 가장 내밀한 고통마저 묘파하고 어루만진다.
감당하기 힘든 불행을 견디는 이에게 “힘내”라는 말이 무용함을 넘어 무례하듯 정확한 글을 쓰려면 적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해는 아는 체나 지름길이 통하지 않는 영역. 대상의 본질에 닿으려는 끊임없는 시도만이 현상의 핵심으로, 인간의 심연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러니 편지를 쓰는 이는 수신인이, 소설가는 자신의 플롯 속 인물이, 평론가는 창작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최근에 읽고 있는 <터프 이너프>는 수전 손택, 한나 아렌트 등 여섯 여성 지식인의 관점을 다룬 책이다. 이들은 쉬운 공감을 거부하고 고통의 근원을 직시함으로 상처를 구체적으로 치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존 관념에 대한 도전과 진실에 다가서려는 노력은 내게 중요한 깨달음을 남겼다. 벼려진 통찰이 쌓이면 독자적인 인식이 탄생한다는 것. 앞서 언급한 좋은 글을 만드는 두 가지 요소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
훌륭한 글의 조건을 고민하다 보면, 글이 갖춘 태도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그 밑바닥에는 성실한 사유와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더 잘 쓰고 싶다는 말은 거듭 당신이 되어보겠다는 뜻이다. 매 순간 차이를 실감해도 이해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내가 모르는 세상에 기꺼이 뛰어들어 탐구하겠다는 다짐이다. 그런 노력이 쌓여 나만의 관점이 될 때까지, 읽고 쓰기는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