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플라워>, The Perks of Being a Wallflower
천성이 ‘해피’한 사람들은 예술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고민 없는 상태가 지속될수록 내면은 평평하고 단조로운 모양새로 변하기 마련이다. 매사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단순한 결론으로 살아가다 보면 나를 추동하는 것들에 대한 탐구심은 자연스레 수그러들 수 밖에 없다. 나는 늘 사람이 예술을 선택하는게 아닌 예술이 사람을 선택하는 거라고 믿어왔다. 예술은 구멍이 있는 자, 그 구멍을 채우기 위해 몸부림치는 자에게 다가간다. 그런 자들에게 삶이 주는 아픔이란 아이러니하게도 존재와 세계를 건설하는 원동력이 된다. 예술가적 마인드는 결핍을 직시하고 향유하며 종국에는 한 편의 이야기로 승화시킨다. 우리가 예술을 통해 얻는 정화와 치유의 원천이 여기에 있다.
예술가의 기질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 건 오랜만에 다시 본 영화 <월플라워> 덕분이다. ‘월플라워’란 사교성이 없고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주류에 잘 섞이지 못하는 이들을 의미한다. 벽에 붙어있는 꽃처럼 파티에서 짝없이 홀로 벽에 기대어 있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요즘 말로는 비자발적 ‘아싸’쯤 되려나. 주인공 찰리는 전형적인 월플라워다. 찰스 디킨스, 잭 케루악 같은 대문호들의 작품을 가까이하며 문학의 세계에서 영감을 얻는 그는 현실에서는 함께 점심 먹을 친구조차 없는 외톨이다. 반짝이는 내면, 세상을 현미경처럼 섬세하게 들여다볼 줄 아는 남다른 감수성을 지녔지만, 일반적인 미국 고등학교 아이들의 눈에 그의 재능은 ‘찌질함’으로 비춰졌기에 찰리는 자신을 최대한 숨긴 채 하루하루를 버틴다.
그런 찰리에게 마침내 그의 특별함을 알아봐주는 존재가 나타난다. 이복남매인 샘과 패트릭은 ‘쿨’한 비주류를 자처하는 아이들이다. 매력적이고 개성 강한 두 남매는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찰리만의 감수성을 받아들이고, ‘부서진 장난감들의 섬’에 그를 초대한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철저히 방어하면서도 망설임 없이 서로의 뮤즈가 되어준다. 샘과 패트릭, 또 다른 친구들과 ‘크루’를 결성한 찰리는 외로움을 잊고 숨겨왔던 자신의 예술성을 맘껏 드러내기 시작한다.
불량품이라 자조하는 아이들에게 예술은 고통을 피하기 위한 탈출구라기 보다 각자의 아픔과 고민을 아름다운 형태로 재창조해 세상에 드러내는 매개체다. 실없는 광대 역할을 자처하지만 정작 성소수자인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는 패트릭, 사랑받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샘, 유년의 트라우마와 가장 가까웠던 인물들의 죽음으로 세상에 나서지 못하는 찰리. ‘로키 호러 픽쳐 쇼’를 연기하며 무대 위에서 뜨거운 욕망을 속삭이고, 더 스미스의 노래를 믹스테이프에 담아 마음을 전하는 이들은 자신의 이야기가 쓰여지기를 원한다. 소년과 어른의 경계선에서 존재의 불안과 고독, 심연을 대변하기 위해 선대 거장들이 글로 쓰고 음악으로 노래한 청춘의 자화상에 몰입하는 섬세하고 조숙한 영혼들. 그 과정에서 먼 훗날 돌아보면 눈부실 그들만의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십대는 누구에게나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이요, “희망의 봄이면서 곧 절망의 겨울” 아닌가. 찰스 디킨스가 묘사한 프랑스 혁명의 서막은 사춘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예민한 기질을 타고난 이들에게 사춘기는 아름답고도 피폐한 시기다. 찰리에게 샘과 패트릭이 있었듯 열일곱의 나에게도 두 명의 친구들이 있었다. 조앤과 렉시. 그들은 조용한 한국인 유학생인 내가 숨기고 있던, 에너지라고 부르기는 너무 거창하고 성깔이라고 하기도 뭐한, 내면의 무언가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보딩스쿨에는 그럴싸한 포장지로 가렸지만, 속이 부서진 애들이 많았다. 조앤의 친모는 베트남 사창가의 콜걸이었고, 건달인 친부는 살인미수에 가까운 상해죄로 복역중이라고 했다. 아버지 쪽과 어찌저찌 인연이 있는 백인 의사 노부부가 남겨진 그녀를 거두어 그들이 사는 하와이로 데려갔다. 구릿빛 피부와 낭창낭창한 몸을 가진 조앤은 집요한 성격으로 늘 올에이를 받았고, 취미로 춤을 췄다. 그녀는 스스로를 “쓰레기 종자들이 물려준 최선의 유전자의 집합체”라고 부르며 입술을 비틀어 웃곤 했다. 속이 비칠 듯한 흰 피부와 호수같이 푸른 눈을 지닌 렉시는 매우 온순했는데, 그 지극한 온순함이 집 나간 아버지와 남겨진 어머니의 상습적 히스테리와 자살 협박을 견디기 위해 그녀가 택한 철저한 침묵이자 방어기제임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사이에서 나는 별 굴곡 없는 캐릭터처럼 보였지만, 잘난 부모의 휘장과 말 못할 유년의 컴플렉스와 싸우며 어떻게든 스스로에게서 그나마 가치 있는 부분을 찾으려 발버둥치는 중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나란 인간은 조앤과 달리 좋은 유전자들이 한 차례 희석된 후 남은 침전물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우리 셋의 공통점이라면 적당한 모범생들이었다는 것과 각자의 이유로 불행했으며, 그 불행을 견디기 위해 창작에 몰입했다는 것이다. 조앤은 춤, 렉시는 그림, 내겐 노래와 글이 있었다. 스핀을 돌고, 아크릴 물감을 덧칠하면서, 시의 운율과 아카펠라 하모니에 묻혀 우리는 조용히, 하지만 필사적으로 깊숙한 곳에 묻어둔 응어리를 뱉어냈다. 밤이면 셋 중 하나의 방에 모여 작당모의를 벌이는게 하루의 즐거움이었다. 수업에 필요한 책은 안 읽으면서 나보코프와 케루악의 문장을 찬양하거나, 비틀즈의 ‘Hey Jude’나 빌리 조엘의 ‘Vienna’를 틀어놓고 한참을 멍 때리곤 했다. 노래 가사처럼, 언젠가는 모든 게 괜찮아 지기를 바라면서. 졸업식 전날 밤, 우리는 렉시의 방에 모여 마지막으로 그 노래들을 들으며 너나 할 것 없이 눈물을 쏟았다. 미완의 존재들이 서로 채우고 부딪치며 견뎠던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서로가 없는 세상에서 앞으로 어떤 영감들이 우릴 채우게 될지, 또 다른 작품이 된 서로를 어떤 얼굴로 마주볼지 어렴풋한 짐작만이 가능했다.
찰리의 말처럼 이제는 이 모든 것들이 이야기로만 남았지만, 서툴고 미욱한 시도로 자아를 찾아가던 십대의 마지막 3년은 여전히 눈 앞에 생생하다. 누구도 존재를 흔들고 쏟아 붓게 한 순간을 잊지 못한다. 터널을 달리는 차 위에서 두 팔을 활짝 펼쳐 살아있음을 만끽하는 찰리와 샘의 모습에서 나와 친구들의 이야기가 다시 한번 재생되는 것만 같다. 마지막 장면을 수놓는 데이빗 보위의 노랫말처럼 우리는 고통을 내쫓지 못했지만, 우리를 살아있게 만드는 세상에 온 감각으로 몰입하면서 고통에 맞설 수 있었다. 그러면서 영영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청춘의 1막이 완성됐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벽을 넘어 세상으로 뻗어나갈 월플라워들에게서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찬란하고 서글펐던 시절의 우리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