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 대한 단상
지난 금요일, 성수동에 다녀왔다. 쉬는 날이면 하루를 빈틈없이 보내야 할 것 같은 역설적 강박에 사로잡힌다. ‘인두겁을 쓰고 어떻게 저렇게까지 종일 놀 수 있지?’라는 생각이 들만큼 놀아주겠다는 보상심리를 원동력 삼아 햇살이 드리운 거리를 누볐다. 남들 일할 때 노는 게 이렇게 달콤할 일이라니. SNS에서 난리라는 복합문화공간 앞에는 사진 찍고 찍어주는 사람들로 붐볐다. 똑같은 장소에서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는 이유는 뭘까? 고개는 사십오도 각도, 눈은 무심한듯 내리깔고 슬로모션으로 걸음을 내딛는 것처럼 바깥 쪽 다리를 앞으로 뻗고 있으면, 거의 땅바닥에 달라붙기 직전까지 자세를 낮추고 한껏 손목을 꺾은 일행이 촬영 버튼을 연타한다. 열과 성이라는 건 바로 저런 거구나. 저런 각도로도 인간의 신체는 꺾이고 접히는구나. 십등신으로 나온 사진 한 장을 건지려면 2인 이상의 필사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이미 짐작 가능하겠지만) 사진 찍히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포토제닉하지도 않을 뿐 더러 노골적으로 나를 향해 있는 카메라 렌즈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이만큼 살았어도 모르겠다. 모임에서 단체사진이라도 찍자고 누군가 한 군데로 모이라는 손짓을 하는 순간 곤혹스러워진다. “좀 자연스럽게 웃어봐.”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 자연스럽게 웃으란 말이야? 피사체가 되는 걸 유난히 즐기는 사람을 보면 저 정도로 자기 자신을 긍정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그들에게 “넌 진짜 스스로가 좋은가 보다”고 얘기하면 “야, 그냥 기록하는 거지”라는 답이 돌아온다. 그냥 기록하는 거라면서 필터는 왜 쓰고 얼굴은 왜 깎는 건데. 왜 내가 찍어준 사진 보고 “더럽게 못 찍는다”면서 황급히 지우는 건데. 못 나온 게 네 얼굴 탓이지, 내 손가락 탓이냐? 자기들이 좋다는데 이렇게까지 시비 거는 나도 어지간히 문제가 많구나 싶으면서도 카카오톡 프로필이 수십장의 셀카로 도배된 사람을 보면 어디서도 우리의 접점을 찾을 수 없으리라는 묘한 확신이 든다.
그렇다고 모든 사진을 무조건 싫어하는 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설정샷’에 깃들어 있는 연극적 나르시시즘이 당혹스러운 거다. 전시에 집중하는 척, 메뉴를 고민하는 척, 음식을 음미하는 척, 읽지도 않는 책에 푹 빠진 척, 행복하게 대화를 나누는 척. “고개를 좀 더 숙일까?”, “최대한 길어보이게 찍어줘”, “그 각도는 안 예쁘게 나와” 등의 말들을 표정을 일그러뜨리지 않으려 복화술 하듯 내뱉으면서 투철하게 설정에 몰입하려는 모습은 우스우면서도 이질적이다. 사진의 사 자도 모르는 문외한이지만 내 맘에 드는 사진들은 하나같이 무방비한 피사체에 담는 이의 애정이 얇은 비단처럼 덧대진 느낌을 품고 있다. 그런 사진에서는 첫째로는 피사체를, 다음으로는 피사체를 통한 작가를 보게 된다. 셔터를 누를 때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지를 짐작케 되는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한 시절의 해석이 담긴 몇 없는 사진을 보면 애틋해지고 만다. 언제 찍었는지도 모르게 하나같이 날 것이다. 이제는 타인의 그것처럼 앳되고 낯선 얼굴에서 시절을 공유한 이들을 본다. 그들의 눈길 속에서 때로는 강직하게, 때로는 혼란스럽게, 때로는 천진하게 얼굴을 갈아입는다. 내게 이런 얼굴이 있었던가. 인물 사진의 퀄리티를 좌우하는 건 피사체에 대한 애정이라는 말은 그러므로 참이다. 애정은 앎에서 시작되고 깊이 앎이 곧 애정이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어떻게든 남기고 싶은 순간이 곧 결코 남기고 싶지 않은 순간이다. 초현실적인 장면 앞에서, 진부한 회색의 일상 속에서 광휘를 뿜어내는 그 몇 초의 순간동안 내 마음은 빠르게 줄다리기하다 주로 남기지 않는 쪽을 택한다. 본능에 의한 선택이었지만 얼마 전 들은 사람의 기억에 대한 정보 한 조각으로 인해 내 선택이 옮았음을 믿게 됐다. 인간의 뇌는 절전형으로 설계되어 있어서 무언가를 기록하면 기록을 했다는 사실을 남기고 내용은 덜 중요한 정보로 간주한다고 한다. 기록은 기억과 등가교환 되는 것이다. 돌이켜보니 정말 그랬다. 여행지에서 사진 찍은 장면들은 사각 프레임 안에 얌전히 맞춰진 부동의 이미지로 남아있다. 반면, 사진으로 남기려는 시도조차 무력하고 하찮게 느껴져 조용히 휴대폰을 내려놓고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침잠하던 순간들은 지금까지도 파노라마로 재생된다. 센느 강변을 따라 걷다 문득 고개를 드니 모네의 주홍빛으로 물들어가던 하늘이 눈 앞에 펼쳐져 있던 순간, 홍콩 뒷골목에서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바이크 위에 걸터앉아 새벽의 공기를 한껏 폐에 채워 넣으며 지금을 영영 잊지 말자고 약속하던 순간, 새카만 밤을 수놓은 불빛을 가르며 브루클린 브릿지를 지나던 순간. 사진 찍는 습관이 들지 않아 휴대폰을 꺼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어린아이가 찬장 맨 위에 숨겨둔 사탕을 꺼내 보는 심정으로 이 순간들을 떠올릴 수 있어서.
기록과 기억 사이에서 팽팽하게 부풀어오르는 마음을 불과 얼마전에 다시 느꼈다. 오랜만에 찾아온 감정이었다. 그 애는 깊을 대로 깊어진 가을과 싸늘하고 맑은 초겨울 공기 사이 어느 지점 같은 느낌을 준다. 어디든 걔가 나타나는 순간 공기가 바뀐다. 죽음을 고지하는 천사가 사람의 형상으로 내려온다면 저런 모습일까. 그렇다면 그 순간이 별로 두렵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저 친구는 자기 위력을 알까, 종종 속으로 생각한다. 몇 걸음 떨어져 있을 땐 겨울 같다가 가까이서는 봄처럼 웃었다. 누구든 눈으로 웃는 사람이 좋다. 싸늘하고 맑은 눈이 순식간에 휘어져 봄이 되는 일초 남짓의 순간을 영영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삶을 덜 외롭게 만드는 웃음이었다. 사진 같은걸 허락 해줄 리도 없었지만 이번에도 기억 속에 남기기로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으나 덕분에 그 웃음은 지나버린 봄의 절정처럼 내 눈꺼풀 안에 남았다. 다행 쪽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