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클래스 첫번째 과제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명명했다. 여기서 언어는 존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하고 그것을 자신 안에 깃들게 하는 시적 언어를 가리킨다. 사유는 “존재의 진리를 말하도록 요청하는 존재에 응답하여 존재의 감추어진 진리를 인간의 언어 안에 보존한다.” (하이데거, 「이정표」) 존재의 울림, 그러니까 존재가 내게 증여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 실체 없는 소리를 흰 바탕 위 검은 글자로 구체화하는 과정은 가장 지고한 자기표현 방법이다. 마음과 머리, 수백 번 망설인 손을 거쳐 태어난 글은 내 고유함을 명백하고 구체적으로 세상에 알린다. 글을 쓰는 행위가 곧 존재를 내어주는 일이라고 믿는다면 단 한 문장도 허투루 쓸 수 없는 건 당연하다. 나는 글을 통해 타인에게 나를 이해하고 인정해달라고 말을 건다.
이게 나야. 나, 이렇게 기어이 살아있어. 나를 긍정해줘.
쓰였다, 지워졌다를 반복하며 마침내 텍스트라는 형태를 갖추게 된 존재의 산물이 누군가의 고개를 끄덕이게 하거나 오롯이 헤아릴 길 없는 그의 마음에 실오라기 같은 위안이 되어준다는 건 내게는 “계속 살아가도 좋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 들린다.
처음 ‘내 글’을 쓰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때였다. 당시 나를 지배하던 생각들은 도저히 말로 할 만한 것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글로 적었다. 친구들이 신나는 것들을 찾아 헤맬 때 나는 원인 모를 불행감에 천착했다. 누구도 공감할 수 없는 혼란과 고통에 대해 구구절절 늘어놓는 건 외톨이가 되는 지름길이기 때문에 낮에는 웃는 낯으로 지내다 밤만 되면 일기장을 열고 참았던 숙취 같은 감정을 토해냈다. 필립 로스는 마지막 수필집에서 그에게 “글쓰기는 자기 보존의 과업”이며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쓴다”고 고백한다. 평생 밥 안 먹고 글만 써도 그처럼 훌륭한 작가는 될 수 없겠지만,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쓰는 심정만은 거장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채워지지 않는 구멍에 대해, 언제까지나 쫓아다니며 삶을 고달프게 만들 것만 같은 천성의 근원에 대해, 그 누구도 이해해줄 것 같지 않은 마음에 대해 실체를 부여해야 조금은 숨이 트였다.
고등학교 영문학 수업 시간에 본격적으로 고전 문학을 접했다. 사방이 막힌 타국에서 호소할 데 없이 물크러져가던 내게 문학은 안정제였다. 일기장에 휘갈긴 내 글이 배설물에 가깝다면, 대문호들의 작품은 정성스레 조탁한 언어로 모든 인간적 결함과 고통을 유의미한 것으로 승화시켰다. 내가 느낀 바와 흡사한 감정을 마치 가슴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정확하고 능란하게 표현해낼 때면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일급 작가들의 글을 보며 의미의 깊이는 언어가 완성한다는 걸 깨달았다. 저렇게 쓰고 싶었다. 결핍이든, 욕망이든 나를 추동하고 매혹하며 놓아주지 않은 것들에 제대로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존재의 소리에 정확한 이름을 붙여 세상으로 내보내고 싶었다. 배설물이 아닌 창조물이라고 부를 수 있는 글을 쓰겠다는 욕망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사그라지지 않고 시시각각 꿈틀댄다.
일기장에 몰래 끄적이던 이전과는 달리 지금은 누군가 내 글을 읽어줄 것임을 상정하고 쓴다. 글과 나를 동일시하는 이상, 이해와 인정에 대한 욕구를 배제하고 쓰기는 불가능하다. 글에 대한 긍정은 곧 내 존재에 대한 긍정이다. 내 관점을 담은 카피 한 줄이 팔려 버스와 지하철 역에 걸릴 때, 장광설에 가까운 독후감을 감명 깊게 읽었다고 누군가가 언급해줄 때, 브런치에 열심히 끄적인 글에 ‘좋아요’ 알림이 뜰 때, 진심을 눌러 담은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사랑하는 이의 눈시울이 붉어질 때, 나는 내가 무언가를 이루고 또 일으킬 수 있음을 확신한다. 나처럼 걱정 많고 자기 수용성이 낮은 사람에게 그런 확신의 순간은 허락이자 계시처럼 느껴진다. 그런 순간들이 쌓이다 보면 언젠가는 글로 더 넓은 세상의 문을 두드리는 날이 올 것이다.
원대한 포부를 늘어놓은 것 치고 내가 쓰는 건 세상에 미욱한 보탬조차 되지 않는 성격의 글이다. 자가당착이나 자책감 같은 지질한 감정을 붙잡고 후벼 파는 내용이 대부분이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보탬보다는 위로가 되는 글을 쓰고 싶다. 존재가 존재에게 건네는 위로는 말보다 글로 행해질 때 몇 배로 강한 힘을 발휘한다고 믿는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좋은 글은 독자를 덜 외롭게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문학이 내게 준 선물은 정확한 이해와 위로였고, 그걸 누군가에게 돌려주고 싶어서 종이 위에 흩뿌려진 마음을 다듬고 또 다듬는다. 가식이나 위선 없는 솔직한 고백이 정확하고 유려한 문장으로 쓰일 때 가까스로 읽는 이의 마음에 닿을 테니까. 그렇게 탄생한 글이야 말로 요청하는 존재에 대한 내 응답이다. 그러니 한 번 더 다짐해본다. 잘 못 쓰는 일은 있어도 제대로 쓰지 않는 일은 없으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