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를 돌아보며 앞을 바라보다
5월. 아침마다 “와, 오늘 날씨 죽인다”는 진부한 감탄사에 진심을 실어 내뱉게 하는 달. 4월의 꽃샘추위가 떠나고, 모든 생명체가 햇살의 축도를 받아 푸르름으로 차오르는 달. 6월이 폭력적인 생기를 내뿜는다면, 5월은 다가올 날들에 대한 다정한 희망을 불어넣는다. 그야말로 앞을 바라보게 하는 달이다.
지난 주말, 광주에 다녀왔다. 미뤄온 숙원을 이룰 때였다. 버스에 올라 티켓에 찍힌 도착지 두 글자를 한참동안 들여다봤다. 광주, 빛고을. 연고도 없는 나를 하염없는 메아리로 부른 곳. 계획 없이 떠났지만 5월의 그곳에서 나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일 것임을 어렴풋이 직감했다. 518국립묘지에 가려면 518번 버스를 타야 한다. 어떤 역사는 시공간을 뛰어넘어 끊임없이 현재로 소환되며 결국에는 비가역적 정체성으로 자리잡는다. 세 개의 숫자는 이 도시의 유전자다. 거기 아로새겨진 기억들이 하나의 의미가 되어 세대에서 세대로 전달된다.
수채화처럼 파란 하늘 아래, 추모곡이 울려 퍼졌다. 구슬픈 선율과 어울리지 않는 눈부신 날. 거리에서 죽어간 이들이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을 햇살도 이토록 찬란했을지를 상상한다. 추모관에 전시된 희생자의 손목시계는 42년 전에 멈춰 있다. 부지런히 분침과 초침을 돌리며 삶에 필요한 때를 알렸을 시계에 선연하게 묻어 있는 주인의 흔적이 천근만근으로 짓눌러왔다. 수십년 전 제 기능을 상실한 물건에 고스란히 밴 한 사람의 시간은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역설이다. 열흘 간의 항쟁 일지는 당신들이 지키고자 했던 게 당시의 시간이 아닌 다가올 시간이었음을 말해주었다. 누구나 미래를 모르고 살지만, 미래를 빼앗긴 채 살 수는 없다. 삶과 죽음이 혼재한 순간에도 당신들은 앞을 내다봤고, 당신들에게 예정된 시간을 기꺼이 내어놓았다. 수많은 이들의 봄이 멎어 앞으로 살아갈 이들은 봄을 맞는다.
얼떨결에 여수에서 온 고등학생들과 함께 참배를 했다. 돌아 나가는 길, 앞서 걷던 학생 한 명이 졸리다고 투정을 부리니 함께 가던 친구가 단호한 목소리로 꾸짖는다. “야, 넌 저걸 보고 잠이 오냐?” 천진과 성숙이 공존하는 광경에 피식 웃음이 나오는 동시에 이상하게 목이 멨다. 너희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앞으로’를 위해 나는 어디까지 기꺼이 내어줄 수 있나?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얼굴’의 사회적 기능은 존재의 정체를 인식하게 한다고 정의했다. 즉 타인의 ‘얼굴’은 나로 하여금 그를 하나의 인격으로 인식하고 그 존재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게 하는 ‘타인의 전부’다. 5월의 광주에서 본 수많은 얼굴들, 역사의 저편으로 저물었거나 나와 동시대를 살아갈 그 얼굴들은 내게 나 아닌 누군가의 시간과 세상에 대한 선택의 여지없는 책임감을 심어주었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편지를 썼다. 수신인들은 나와 성격이 다르지만 바라보는 삶의 방향이 비슷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우리 만을 위해 살지 않겠다는데 뜻을 같이 한다. 하루동안 보고 느낀 바를 힘주어 적으며 내게 힘겨운 다짐으로 남은 낯선 얼굴들의 형체를 떠올렸다. 그 얼굴들에 내 단상을 오롯이 이해해줄 익숙한 얼굴들을 조심스레 겹쳐보았다. 역에 도착하자 햇살이 두 뺨 위로 쏟아졌다.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다정한 속삭임이 들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