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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지용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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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용 Mar 10. 2019

지용시선 아홉 번째

문학동네 시인선 010. 조동범 시집 <카니발>

오늘은 축제의 밤이야
검은 피와 불꽃이 빛나는

카니발 너머에는
동굴처럼 길고 막막한
어둠이 기다리고 있지

어둠을 향하면서도
끊임없이 즐겁고 유쾌한
카니발의 행렬

p.112 '카니발' 中


 문학동네시인선 010. 조동범 <카니발>



시인 조동범


1970년 안양 출생. 시집과 평론, 산문집 등을 출간했다. 20번이 넘는 본심 경력을 스스로 밝힌 바 있으며, 자신을 강의집필노동자로 규정하고 있다.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를 역임하고 있다.



매우 주관적인 시집 소개


화려한 축제가 끝나고, 가득했던 사람들이 모두 떠난 빈 공터를 본적이 있다. 유흥의 흔적이 곳곳에 시체처럼 널려있는 적막의 공간. 이 공간은 우리의 일상에도 때때로 찾아온다. 일상의 짐을 털어내기 위해 무리한 날, 들뜬 기분으로 각자의 축제를 즐기다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운 순간. 시끄러운 주변의 소음도, 친구의 웃음 소리도, 신나는 음악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그런 순간.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며 스스로의 숨소리에 집중하면 어딘가 공허해진다. 


'나 무엇을 위해 이렇게 애쓰고 있는거지'


이 시집은 그런 순간에 대한 이야기다. 축제의 이면에 대한 이야기. 웃음의 이면에 대한 이야기. 가장 많은 에너지를 쏟아내는 동시에 가장 힘이 빠지는 순간에 대한 이야기.



당신의 힘은 진실이었을까

누구도 신뢰하지 않는 힘은 누구에게나 진실이기도 했다

당신을 관통하던 힘은 고단했고

어쩌면 당신은 

급소를 앞에 두고 잠시

망설였는지도 모른다


p.22 '차력사' 中



우리가 믿는 '진실'이라는 것들은 과연 우리를 지탱하는 힘이 될 수 있을까. 아니, 그 이전에 그 진실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어떻게 정의되는 것이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세상은 과연 정말 '진실'이라 믿는 것들로 돌아갈까. 이런 질문들에 확고한 대답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우리가 진실이라 믿던 것들은 때때로 우리를 배신한다. 삶의 시간이 누적되면서 늘어가는 건 확신이 아니라, 확신이 낳은 배신들인 것 같기도 하다.



당신은 피를 흘리고 있고. 그것은 불운이었을 뿐! 이라는 당신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당신은 불길 속에 있고. 아직은 견딜 만하다고 생각한다.

...

인생이라고 당신은 말을 한다.

슬픔이라고 당신은 말을 한다.

찬란이라고 당신은 말을 한다.

...

당신은 과연

무엇을 배웠을까. 즐거운

드라이빙 테크닉 스쿨


p.36 '즐거운 드라이빙 테크닉 스쿨' 中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간다.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없을 때면, 시간을 되돌리거나 원하는 때로 돌아가는 초인적 능력을 가진 상상을 하곤 한다. 잠시 즐거우나, 오래 괴로운 상상이다. 이내 현실로 돌아오면 삶은 좀 더 버거운 것이 된다. 


시간에 밀려, 세상의 규칙들에 밀려 언젠가 더 나이가 들면, 그렇게 삶에 핑계들이 하나씩 쌓여갈 때 우리는 어떤 말을 하게 될까. 그것이 인생이라고, 인생은 원래 슬픈 것이라고, 아니 그럼에도 찬란한 것이 인생이라고 서로를 위로하게 될까. 


시간을 되돌리는 상상의 끝에 얻는 깨달음이라면, 우리에게는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어도 시간이 흘렀을 때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나간 시간으로부터 비롯되며 그 상상 속에서 아주 조금은 앞으로의 시간들을 준비해볼 수도 있다는 것.


생의 마지막에 우리는 무엇을 배웠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늘은 어린이날

...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깔깔깔

화창한 웃음이 해맑게 날아가는 날이지

...

엄마 아빠 없인 가지 못하는,

우리들 세상

...

아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어린이를 위해 준비된

행복한 메뉴를 먹고

...

엄마 아빠 없인 가지 못하는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p.116 '오늘은 어린이날' 中



다시,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진실이라고 믿는 것과 우리가 배웠다고 할 수 있는 것. 어른이라 불리는, 혹은 스스로를 그렇게 규정하는 사람들끼리 나누는 이야기들은 대체로 세상의 논리 속에 가두어져 합일점을 찾기가 쉬울지도 모른다. 그것이 진실인 것일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런데 그 대화에 '아이' 혹은 '아이와 같은 존재'가 끼어든다면 대화는 한층 복잡해진다. 아니, 단순해지면서 복잡해질 것이다. 주제는 1차원적이 될 가능성이 높으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무엇도 단정할 수 없다. 본질에 가까운 이야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시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라는 뜻이다. 우리는 아이들 앞에서 어떤 것을 진실이라고 말해줄 수 있을까.


이면을 들여다보는 일은 축제의 끝에 힘을 발휘한다. 공허의 순간, 중심이 무너져버리는 순간에 잡을 수 있는 갈대같은 것. 우리가 믿었던 것들을 의심하고, 재정의하는 일만이 그리고 그것을 반복하는 일만이 우리를 둘러싼 이 급박한 시간의 흐름의 가닥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일지도 모른다.



축제는 언제고 끝날 것이다. 적막한 공터 앞에서 당신은 무엇을 바라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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