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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지용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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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용 Dec 19. 2018

지용시선 두 번째

문학동네 시인선 002. 허수경 시집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울지 마, 라고 누군가 희망의 말을 하면
  웃기지 마, 라고 누군가 침을 뱉었어    

p. 44 '비행장 떠나면서' 中 



문학동네시인선 002. 허수경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한줄평
세상은 한없이 차갑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 따뜻할 수 있다.



시인 허수경  

   

1964년 진주 태생. 92년 독일로 이주. 뮌스터대학 고대 동방문헌학 박사. 앞으로의 소망이 있다면 젊은 시인과 젊은 노점상들과 젊은 노동자들에게 아부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라는 말을 뒤로한 채 2018년 10월 3일 암투병 끝에 생을 마감했다.           



매우 주관적인 시집 소개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이 시집의 제목에서 주목해야할 포인트는 어디일까. ‘빌어먹을’일까 ‘차가운 심장’일까. 개인적으로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둘 다 아닌 ‘쉼표’다. 빌어먹을 다음에 오는 쉼표. 삐침이 있는 점에 집중해서 제목을 다시 읽어보자.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그렇다. 이 시집은 차가운 심장 때문에 벌어진 비극에 대해 ‘빌어먹을’이라고 외치고 있다. 이 시집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들을 살펴보면 그 분위기를 잘 알 수 있다. ‘도시, 로커, 군대, 학살, 독재 등’ 시인은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주목할 만한 아니, 주목해야하는 일들에 대해 누구보다 민감하게 느끼고, 그것을 받아적는다. 차가운 심장이 아닌, 무거운 심장으로.      


심장이 차가워질 때 아이들은 어디로 가서 태어날 별을 찾을까.

아직은 뛰고 있는 차가운 심장을 위하여 아주 오래된 노래를 불러주고 싶었다    

 

p.5 ‘시인의 말’ 中     



나의 도시 나의 도시 당신도 젖고 매장당한 문장들 들고 있던 사랑의 나날도 젖고

학살이 이루어지던 마당도 폭탄에 소스라치던 몸을 쟁이고 있던 옛 통조림 공장 병원도 젖고

죄 없이 병에 걸린 아이들도 잠기고

정치여, 정치여, 살기 좋은 세상이여, 라고 말하던 사람들 산으로 올라가다 잠기고     


p. 12 ‘나의 도시’ 中     



아무도 첫 월경을 축하하지 않았습니다

첫 시험을 치르러 가는 어린 신부들

시험을 치르고 가까운 구리광산 옆에 선 중국루에서

엄마, 나 곧 돈 벌 거야, 라고 어린 신부들은 말합니다     

어이, 마누라 아직도 울고 있나, 라고

어린 신랑이 물어보면

여보, 우린 곧 멸망할 거야, 라고

어린 신부는 답합니다.     


p. 51 ‘아름다운 나날’ 中          




얼마전, 모 프로그램에서 유시민 작가가 허수경 시인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그는 피부가 아주 얇은 사람같다고. 그래서 아주 작은 것에도 극심한 감각을 느끼는 것 같다고. 그 말에 동감한다. 그리하여 모든 것에 민감했던 시인은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던 것 같다.


찬 물새, 오랫동안 잊혀졌던 순간이 하늘에서 툭 떨어지는 것을 본 양     

식물과 동물이 탄생하던 진화의 거대한 들판, 나라는 것을 결정하던 의지는 어디에 있었던가?     

울음으로 가득 찬 그림자였어요, 다리를 절던 까마귀가 풍장되던 검은 거울이었어요 (혹은 잠을 위한 속삭임)     


위 세 문장은 놀랍게도 시의 제목이다. 


+ 심지어 ‘카라쿨양의 에세이’라는 제목의 시는 한편이 14페이지에 걸쳐 서술되어 있기도 하다.     



     

언어

자연

과거     

여기에서 놀았다     


p.16 ‘여기에서’ 中     



나와 자연은 사실혼 관계     


p.20 ‘거짓말의 기록’ 中     



그럼에도 시인은 자연을 바라본다. 


차가운 세상 앞에서 언어로 자연을 노래한다. 진부한 대조라고 느낄지 모르나, 결국 인간은 자연을 차갑게 만들고, 자연은 그런 인간을 따뜻하게 감싼다. 발전되었다, 진화되었다 믿는 오만한 인간도 결국은 자연으로 귀결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어쩌면 자연에서 노는 일만이 차가운 심장으로 인한 빌어먹을 일들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는 듯하다.          



한때 그대도 여기에 있었으나

그러나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 순간

이 자연은 과거가 되었고     

지금 그대 없는 자연은 

언어가 되었다   

  

p.16 ‘여기에서’ 中 


    

그대 없는 자연을 시인은 언어로 남겼다. 자연을 바라보는 일. 그것은 곧 우리를 바라보는 일이다. 놀랍게도 우리는 자연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아야 한다. 서로의 속을 들여다본다면 우리는 따뜻할 수 있을 것이다.                    



시집 하이라이트


과거에도 내 눈은 그곳에 있었고

과거에도 너의 눈은 내 눈 속에 있어서

우리의 여관인 자연은 우리들의 눈으로

땅 밑에 물 밑에 어두운 등불을 켜두었다


p. 24 '너의 눈 속에 나는 있다' 中






 



한줄평


세상은 한없이 차갑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 따뜻할 수 있다.


평점 이유


이번 시집은 평점을 매기지 않습니다. 소신을 갖고 꾸준히 작품을 발표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엄청난 일입니다.

그가 우리에게 전해준 글들을 오래도록 곱씹으며 그를 기릴 것입니다.


추천 대상


현실적인 슬픔에 푹 빠져들고 싶은, 그러나 그 안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고 싶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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