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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효준 Dec 06. 2019

<벌새>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1994년, 가장 보편적인 은희로부터

벌새는 날아오르기 위해 1초에 90번 이상의 날갯짓을 한다. 

누군가에게 '하나의 작은 몸집'에 불과하지만, 벌새에게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치열한 투쟁일 것이다. 

 

은희는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고, 누군가가 발견해주길 바라며 끊임없이 누군가를 부른다. 

하지만 그녀의 부름은 왠지 모르게 공허하다. 사랑받기 위해 부지런하게 움직인들, 아무도 그녀의 부름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어느 날, 은희의 곁에 영지가 찾아온다. 은희의 부름에 처음으로 귀 기울여준 사람이었다.

 


#1. 부름

은희는 1남 2녀 중 막내다. 성적을 맞추지 못해 강북으로 학교를 다니는 집안의 문제아 언니, 서울대를 지망하는 오빠, 그리고 떡집을 운영하는 부모와 함께 산다. 은희의 부모는 녹록지 않은 살림이었지만, 그 시절 여느 부모처럼 자녀의 교육을 위해 무리해서 강남의 8 학군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가부장제가 만연하고 어찌 보면 거스를 수 없었을 그 시절, 은희는 사춘기를 보냈다. 오로지 '고등교육'에 혈안이 되어 높은 성적을 내지 못하는 언니와 자신을 차별하는 아버지. 자신에게 무신경한 엄마. 가족에 대한 폭력이 당연한 것인 양 행동하는 오빠까지. 은희의 둥지는 결코 튼튼하지 않았다.



또한 자신을 떠나 금세 새로운 여자를 사귄 남자 친구, 가장 믿었던 친구의 배신,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하다 대뜸 식어버렸다는 후배까지. 은희는 끊임없는 '관계의 단절'을 경험하며 무너진다.  


은희는 그저 존중받고 싶었고, 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으리라.    


#2. 응답 


은희의 부름에 누군가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은희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고, 이를 통해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사람이 생겼다. 바로 은희가 다니는 한문 학원의 아르바이트 강사 영지였다.


은희를 '아이'가 아닌 '동료'로써 바라봐주고, 자신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공감해주는 영지라는 존재.  

은희가 그토록 불러왔던 대상이 아니었나 싶다. 


은희는 영지와 교감하며, 자신을 둘러싼 견고한 알을 깨려고 시도하였다.

은희는 알에서 나와, 또 다른 세계를 마주하려 노력하였다.


부조리에 맞서 사회 운동에 참여하던 대학생이었던 영지, 그녀 역시 은희처럼 벌새였다.


억압적이고 가부장적인 가정의 피해자. 

자신이 목놓아 외치는 '정의'를 '젊음의 객기'로 치부하는 사회의 차가운 시선. 


이러한 압박 속에서 겪는, 영지의 상실감과 무력감은 어쩐지 은희의 그것과 많이 닮아있었다. 

그렇게 열패감에 못 이겨, 도피한 곳에서 만난 은희. 영지 역시 은희의 존재가 커다란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힘들고 우울할 땐 손가락을 펴 봐. 그리고 움직이는 거야.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손가락은 신기하게도 움직인다?

영지가 은희를 향해해 주었던 위로들. 어쩌면 그녀 자신이 누군가에게 절실하게 듣고 싶었던 말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3. 성장통

성장은 고통을 동반한다. 은희는 혹이 생겨 침샘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게 된다. 심하면 안면마비가 올 수 있다는 말에 내심 두렵지만 그 고통을 감내하기도 한다. 


그 과정 속에서 은희는 영지와 떨어져 있게 되고, 그 와중에 얽히고설킨 관계들이 조금씩 풀리게 된다.

어떤 관계는 완전한 단절을, 또 어떤 관계에서는 서로를 더욱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경험하며 은희는 차츰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영지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제야 비로소 참아왔던 내 이야기를 분출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음을 말이다. 


#4. 붕괴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가 붕괴되었다. 아무도 이리 쉽게 무너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쉴새 없이 흔들리는 은희의 내면을 단단히 받쳐주던 영지는, 그렇게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은희에게 미처 전하지 못한 편지 한 장을 남긴 채로.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 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5. 증명


영지와의 이별 후, 그래도 은희는 살아간다. 하지만 은희는 알을 깨고 맨 몸으로 맞설 준비가 되었다.  

넘어져도 다시 툭툭 털고 걸을 수 있는 용기가 생겼기에, 작지만 단단한 날갯짓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은희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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