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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 Nov 02. 2021

Everybody knows Rosa (1)

「맥간 인연 1」

2015년 1월 10일. 특이한 여자를 만났다.


여자는 옆방 사람이다. “몽골인가 어딘가”에서 온 여자가 그 방에서 석 달째 체류 중이란 사실은 숙소 주인 링키가 귀띔해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링키는 정작 중요한 부분을 쏙 빼먹었었다. 바로 그 여자가 지독히도 유별난 사람이라는 사실. 짐작컨대 그건 링키의 실수가 아니었다. 술수였다. 아무도 그 여자 옆방에 묵고 싶어 하지 않으리란 것을 링키는 알았다. 그 사실을 의도적으로 숨긴 채 나를 숙박객으로 덥석 받고 봤던 거다. 분명하다.


여자의 이름은 로사. 그냥 로사가 아니라 스페인어의 자음 ‘도블레 에레(RR)’를 발음하듯 혀 끝을 한껏 굴려 부르는 로사다. 르르르르르르로오사아. 힘주어 제 이름을 소개하는 로사의 눈빛이 매서웠다. 무엄하게 발음을 허투루 했다가는 한 대 맞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냥 그 이름을 입에 담지 않기로 했다.


통성명이 끝나기가 무섭게 로사는 나에게 제 인생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초면부터 고역이었다. 문법은 엿 바꿔 먹은 듯한 그녀의 이상야릇한 영어를 해석하는 것도 힘들었거니와, 그나마 알아들은 이야기도 팔 할이 새빨간 거짓말 같아 경청할 기운이 도무지 나질 않았다. 친언니가 맥간에서 큰 식당을 운영해서 이 도시 공동체의 여자 보스쯤 되고 티베트 불교 내에서도 달라이 라마에 비견할만한 신임을 받는 존재란다. (맥간은 티베트 망명 정부가 들어선 이곳 북인도의 마을 ‘맥그로드 간즈’를 줄여 부르는 이름이다.) 티베트 불교에서 달라이 라마에 비견되는 몽골 여인의 존재는 내 평생 들어본 일이 없거니와,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 잘난 언니는 어디다 두고 이토록 허름하기 짝이 없는 게스트하우스에서 나 같은 평민과 함께 지내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았다. 자기 엄마가 부산 출생의 한국인이라는 말도 했는데 이제 보니 그 말도 영 못 믿겠다.


로사는 몽골의 울란바토르에서 일하고 매년 휴가 때마다 맥간을 찾는다고 했다. 몸이 안 좋지만 병원과 의사를 무지 싫어하기 때문에 맥간의 ‘내추럴 에너지’로 치유받기 위해 이곳에 꾸준히 오는 거라고. 묻지도 않은 이 이야기를 그녀가 꺼낸 것은 내가 의대생이라는 말을 내게서 듣자마자였다. “아이 해이트 닥터! 닥터스 배드 피플!” 뒷목에 꽂혀오는 햇볕이 뜨거워 패딩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 쓰려해도 로사는 내 모자를 강압적으로 벗겨댔다. 막무가내였다. 나도 이곳의 ‘내추럴 에너지’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란다.


로사의 무지막지한 너스레에 정신이 혼미해진 사이. 눈 떠보니 나는 어느덧 그녀 손에 이끌려 다른 장소에 와있었다. 그곳은 우리 숙소 근처에 있는 호텔 겸 식당 겸 구멍가게 겸 아쉬람. 로사는 그곳 직원들과 이미 막역해 보였다. 그녀는 나에게 여기서 커피와 팬케이크를 시켜 먹을 것을 종용했다. 이건 또 무슨 신종 사기 수법인 걸까. 로사와 직원들 모두가 한통속일지도 몰라. 나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과일 커드만 주문했다. 잠시 뒤, 시키지도 않은 커피와 정체 모를 과일 주스가 함께 나왔다. 대체 나한테서 얼마를 뜯어가려는 속셈인 거야. 순간 질겁했다. 하지만 접시를 모두 비우고 식당 문을 나설 때, 비용 일체를 로사가 지불했다.


괜히 호텔 겸 식당 겸 구멍가게 겸 아쉬람이 아니었다. 이곳에 정말로 신전이 딸려 있었다. 아까부터 우리를 지켜보시던 인도인 할아버지께서 신에게 기도드리고 명상하는 작은 공간. 공간의 신성성을 드높이기 위함인 듯 신전까지 가는 길은 험난했다. 낭떠러지 같은 길을 네 발로 엉금엉금 기어 내려갔다. 죽는 줄 알았다.


신전에 불을 피우며 신과의 교감을 기다리는 할아버지. 경건한 자세로 그 모습을 지켜보려는데 로사는 자꾸만 내게 사진 촬영을 강요했다. “포토! 포토!” 신전도 찍으라 하고, 할아버지도 찍으라 하고, 그 옆에 앉은 죄 없는 개도 찍으라 하고. 다만 자신은 앵글에 담지 말고 콕 집어 할아버지만 찍으라며 구체적인 촬영 주문까지 했다. 그녀의 윽박에 겁을 먹은 나. 찍으라는 대로 다 찍었다. 고요하고 엄숙한 공간 안에 셔터음이 멈출 줄 몰랐다.


불을 다 피운 할아버지께서 아코디언처럼 보이는 전통 악기를 꺼내 드셨다. 악기를 켜며 나지막이 노래하셨다. 긴 기도문도 읊조리셨다. 비틀스의 노래를 통해 익숙한 “guru deva”라는 말 외에는 단 한 구절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절대적 존재에게 가호를 간구하는 동서고금 인류 보편의 성심에 나는 공감했다. 그리고 감동했다.


감동한 것은 나뿐이 아니었다. 로사 역시 마음속이 감격의 도가니로 달아오른 듯 일순 말을 잃고 조용했다. 하지만 숙연함도 잠시. 그녀는 갑자기 나를 격렬하게 껴안았다. 꽈아아아악. 그리고 흐느꼈다. 으엉엉으앙앙. 다짜고짜 내 상의의 칼라를 내리고는 내 어깨에 입을 맞추기까지 했다. 쪼오옥.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로사는 무턱대고 제 어깨를 노출하더니 (‘으악!’) 내게도 그 부위에 입을 맞출 것을 요구했다. 어지러웠다. 여긴 어디인가. 나는 누구인가. 처음 보는 몽골 여인의 오동통한 어깨를 두 눈앞에 두고 나는 그만 아득히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감격의 눈물을 한바탕 쏟아낸 걸로는 모자랐던 걸까. 로사는 기도 의식이 끝나기가 무섭게 할아버지와 또 다른 한바탕을 했다. 할아버지가 로사에게 건강 생각해서 술 좀 적게 마시라고 한마디 하셨기로서니,


와이 유 스피크 쏘 머치? 유 구루! 저스트 프레이! 유 싯다운 히얼 앤드 띵크 포 미! 노 스피크! 저스트 띵크! 드링크 노 유어 프러브럼. 마이 프러브럼. 노 스피크 머치!

라고 특이한 영어로 특이하게 소리 지르며 할아버지를 다그쳤다. 로사는 꼬박꼬박 할아버지를 "구루"라고 칭했지만, 백 번 천 번을 양보해도 저건 도무지 구루를 모시는 태도라고 봐줄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로사의 이런 행동거지에 이미 익숙하신 듯 지그시 눈을 감고 묵묵히 고성을 견뎌내셨다. 옴 마니 팟메 훔. 어쩌면 할아버지의 수련은 로사의 존재로 말미암아 그 깊이를 더해가는 것인지도.


평소보다 몇 갑절 길게 느껴지는 하루가 저물었다. 밤이 깊어도 로사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귀를 맴돈다. 아니, 이것은 환청이 아니다. 실제다. 벽 너머로 하루 종일 들려오는 저 우렁차고 괄괄한 목소리. 안 그래도 거칠게 느껴졌던 몽골어가 로사로 인해 한층 더 공격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몽골 대초원의 기개란 기개는 로사의 목청이 죄다 흡수한 걸까. 로사는 매일 전화기를 붙들고 누구랑 저렇게 싸우는 걸까. 


맥간을 떠날 즘엔 저 왁자한 탁성마저도 내 귀에 감미로운 자장가 소리로 들려올는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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