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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 Sep 13. 2022

어떤 설명은 무의미하다 (3)

#5. 


2011년 12월 25일. 아바나에 들어온 지 12일 차. 아바나를 떠나기까지 하루 남았다.


쿠바에서 맞는 크리스마스는 독특했다. 화려한 무언가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없어서였다.


1969년 피델 카스트로가 쿠바의 공휴일 목록에서 성탄절을 지웠던 게 한몫했다. 국민들을 종교 행사가 아니라 사탕수수 수확 임무에 동원해야 한다는 이유로 성탄절을 금지한 거였다. 이후 199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쿠바 방문을 기념해 성탄절은 다시 공휴일이 됐다. 하지만 현대사에서 30여 년간 부재했던 영향이 컸는지, 쿠바의 성탄절은 아직 고요했다.


붉은색 상하의를 입고 시원하게 코카 콜라를 들이켜는 산타 할아버지 이미지 같은 것도 쿠바에선 상상할 수 없었다. 쿠바에는 코카 콜라가 없었다. 미국의 무역 금수조치가 오래 지속되면서 쿠바에는 ‘미국적인’ 모든 것이 사라져 있었다. 지구상의 그 어떤 나라와도 구별되는 쿠바만의 유일성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된 부분이 커 보였다. 쿠바 사람들은 코카 콜라 대신 자체 브랜드인 뚜꼴라(TuKola)를 마셨다.


나는 모든 것이 쿠바다운 쿠바가 좋았다. 쿠바는 타인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내 갈 길을 가는 뚝심 있는 사람 같았다. 물론 그 지독한 강단이 쿠바 국민들의 처절한 희생을 야기했음을 떠올리면, 이방인으로서 견지한 내 낭만적인 시선이 아찔했다.


어느새 다시 일요일이었다. 아바나에서 일요일이면 마땅히 하멜 거리에 가야 했다. 나는 익숙하게 로컬 택시를 잡아 하멜 거리에 갔다. 여느 일요일처럼 관광객들과 현지인들이 뒤섞여 골목 안이 부산했다. 이제는 낯익은 공연자들이 무대에 올라 공연을 시작했다.


나는 집중해서 쳐다봤다. 무대 정중앙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미리암의 현란한 몸놀림을.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녀의 무용을 관람하는 것이 오늘로써 마지막이리라 생각하면 그녀의 동작 하나하나가 아까웠다.


“¡Mi china!”


미리암은 나를 발견하자마자 외쳤다. 미 치나! 나의 동양 여인이여!


중남미 사람들은 동아시아 사람들을 보면 으레 외쳤다. 치노 아니면 치나라고. 치노(Chino)는 중국 남자라는 뜻, 치나(China)는 중국 여자라는 뜻이었다. 여기 사람들 입장에서야 지나가는 동아시아인의 국적까진 알 바 아니니까 무조건 치노 아니면 치나로 뭉뚱그려 부르는 거였다. 이걸 불쾌해한 여행자들도 많았다. 그런데 난 아무래도 좋았다. 표현 방식이 조금 미성숙한들, 그들의 호명에 담긴 호의와 관심까지 무턱대고 경계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애당초 그들이 그렇게라도 나를 불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과 나 사이에서 어떤 우연하고 소중한 이야기들이 피어날 수 있었겠는가.


내가 그만 가보겠다고 손짓하자 미리암은 공연 중간에 무대를 박차고 나와 나를 배웅해줬다. 나는 내일이면 쿠바를 떠난다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녀가 목청껏 외쳤다. 사람들의 시선 따위 아랑곳 않고.


“¡Se me va mi china!”


한국에 돌아오고도 한동안 나는 아바나 앓이를 심하게 했다. 춤으로 노래로 자유를 향한 열망을 분출하던 그곳 사람들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끌라베와 콩가 소리가 곁들여진 룸바 음악이, 미리암이 목청껏 외친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쎄 메 바 미 치나! 나의 동양 여인이 나를 떠나가네!




#6.


2015년 8월 2일. 4년 만에 아바나로 돌아온 지 6일 차 되는 날이었다. 그리고 일요일이었다. 나는 줄곧 일요일만을 고대해왔었다. 아바나에서 일요일은 곧 하멜 거리에 가는 날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돌아왔다. 아프로 쿠반의 향기가 짙게 배인 이곳, 하멜 거리로.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있었다. 무대 위에 나의 룸베라가. 나의 미리암이.


미리암은 나를 한눈에 알아봤다. 그녀는 추가 비용을 낸 관객에게만 허락되는 그늘 상석에 나를 앉혔다. 나는 눈앞에서 펼쳐지는 선명한 룸바 공연을 감상했다. 이 순간이 꿈이 아니길 빌었다.


하멜 거리의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노래하는 남녀 공연자들도, 콩가 치는 건장한 청년들도, 미리암과 함께 묘기 같은 춤사위를 펼쳐 보이는 무용수들도. 4년 전에 여기서 찍어갔던 사진을 닳도록 봐온 탓에 공연자들의 얼굴이 전부 눈에 익었다. 벅차오르는 반가움은 속으로만 간직했다.


“어디가 제일 좋았어요?”


이 질문은 진부하다. 내가 여행을 많이 했던 걸 알게 된 사람들이 하나같이 물어오는 질문이라서다. 그런데 이 질문을 마주하는 것이 나는 아직 어색하다. 조금 과장하자면, 나는 이 질문을 받는 게 무섭다.


단답형으론 대답할 수 있다. 그곳은 쿠바다. 콕 찍어 말하자면, 쿠바의 아바나다. 그런데 이 질문을 던진 사람들은 나이와 성별을 막론하고 단답형 대답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것은 백 프로다. 그들은 기어코 나로부터 서술형 대답을 유도하고야 만다. 그들 입장에서야 단 한마디만 덧붙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왜요?”


그런데 이 ‘왜’라는 걸 설명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아바나를 향한 나의 다면적인 사랑을 짧은 몇 문장 안에 담아내기엔 내 화술이 능란하지 못하다. 그렇다고 그걸 구구절절이 설명하고 있자니, 그러면 상대방이 던진 질문에 비해 내 대답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져 버린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나는 결국 안 하느니만 못한 애매한 대답으로 대화를 얼버무리고 만다. “그곳의 흥겨운 분위기가 좋아서요.”


내가 아바나를 사랑하는 이유는 한 문장으로 표현될 수 없다. 절대로. 날밤을 새고 얘기할 게 아닌 바에야, 나는 아예 그 이유를 설명하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아니, 날밤을 새고 얘기한다 해도 그 뜨거움에 터질 듯한 감상이 온전히 전달될 수 있을까. 나는 결코 아바나를 내 능력의 언어 안에 담아내지 못할 것이다. 누구도 그의 언어 안에 아바나를 담아내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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