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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anna Jan 29. 2021

<조용한 희망> - 스테퍼니 랜드

우울증을 위한 책 - 2

내 아이는 노숙인 쉼터에서 걸음마를 배웠다.

작년 연말 서점에서 유난히 눈에 띄었던 핑크색 표지의 책을 펼쳐 읽은 첫 문장이다. 표지에는 눈에 띄는 몇 개의 단어가 있었다. 스물여덟, 싱글맘, 청소부. 나는 그녀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별 고민 없이 곧장 책을 구입해 집으로 향했다.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와 나 사이에 공통분모는 찾기 어려워 보였다. 나는 아이를 가져본 적도 없고, 청소부로 일해본 적도 없으며, 심지어 그녀는 미국 워싱턴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어느새 그녀의 삶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인 것 같은 기분으로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몇몇 대목에서는 엄마의 모습이, 어떤 대목에서는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와 함께 작년 한 해를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고 있다.

    그녀는 나와 다르게 용기 있는 사람이다. 스물여덟 살, 그녀는 작가가 꿈이었다. 몬태나 대학의 문예 창작학과를 꿈꾸며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는 예기치 못하게 당시 만나던 남자 친구의 아이를 갖게 된다. 


나는 이제 엄마였다. 남은 생에 엄마로서의 책임을 영광으로 여길 것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학 지원서를 찢어버리고 일터로 향했다.(p.46)


    그녀는 과감히 꿈을 접고 아이를 낳아 기르기로 결심하지만, 남자 친구는 이를 반대하며 그녀에게 폭언과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남자 친구는 양육비를 감당해야 하는 것에 전혀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면서도, 직업이 없는 그녀가 아이를 맡는 것을 반대했고, 그녀의 부모도 도와줄 여건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처음으로 안전한 울타리 없이 세상에 던져진다. 

    그녀는 온갖 정부 지원 단체를 기웃거리며 돈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서류 뭉치들을 끌고 때로는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 틈에서 긴 줄을 서서 기다리며 고군분투한다. 우리는 가난하면 가난하다고, 아프면 아프다고 언제 어디서나 '증명'해야 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울증 환자가 정신과 진료를 받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비슷하게 느껴진다. 고통스럽게 나의 아픔을, 우울함을 꺼내 보여야 그제야 내 손에 항우울제 몇 알이 주어지는 것처럼.


돈이 없어서 가난하게 사는 것은 보호관찰을 받는 것과 사뭇 비슷해 보였다. 생계수단이 없다는 것이 내 죄목이었다.(p.26)


    자본주의 사회에서 집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약물 중독에 빠졌거나 인생이 제대로 엉망진창이 된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그녀가 무주택자들을 위한 주택 당국이 마련한 임시 주택에는 다음과 같은 규칙들이 있다.


-이곳이 임시 거주지라는 점을 주지하십시오. 이곳은 당신의 집이 아닙니다.
-아무 때라도 무작위 소변검사가 진행될 수 있습니다.
-임시 거주지에 방문자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예외 없음. (p.25)


    무주택자들을 위한 주택 당국이 마련한 임시 주택에 살면서 바닥에 기어 다니며 잡초를 뽑는 일을 하다, 딸아이가 조금이라도 더 나은 환경에서 자라기를 바라며 그녀는 청소 업체 직원으로 일을 하게 된다. 그녀는 누군가의 집을 청소하며 집주인의 내밀한 삶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침실에 항상 포르노 잡지가 놓여 있는 집, 암에 걸려 앞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여자의 집, 슬픈 광대의 그림들이 잔뜩 걸려 있는 광대의 집 등. 그녀에게는 그저 이룰 수 없는 꿈같은 멋진 집에 사는 그 사람들조차도 그녀보다 더 행복하고 나은 삶을 살고 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죽을병에 걸렸거나, 아내를 일찍 여의고 혼자 무의미하게 살아가고 있거나, 남들에게 말 못 할 비밀을 껴안고 살아간다. 나에게 진정으로 의미 있는 삶은 어떤 삶일지 생각하게 된다.

    청소 일은 온몸이 혹사당할 만큼 힘든 일이다. 어느 집주인의 화장실에 있는 진통제를 보며 훔쳐먹고 싶은 충동이 들 만큼 고통스럽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아픈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해 병원에서 핀잔을 듣기도 하고, 혼자 감당하기에는 벅찬 하루하루 속에 바닥에 주저앉아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고통을 느끼기도 한다. 포기하고 싶을 만큼 힘든 순간들을 그녀는 묵묵히 견뎌낸다. 사랑하는 딸을 위해.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 또한 부모님, 가족, 주변 사람들로부터 받은 조건 없는 애정 덕에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 책에는 온통 절망스럽고 원망스러운 일들이 넘쳐 나지만 나는 이 책이 위로로 뒤덮여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많은 일들을 이겨냈고, 지금은 그녀가 꿈꾸던 작가로서 멋진 삶을 살아가고 있다. 물론 우리 모두에게 사회적 약자에 대한 모순된 제도들을 개선해야 할 책임감을 느끼게 해주기도 한다. 나는 한 번이라도 그들의 편에 선 적이 있었던가? 그녀가 만났던 무수히 많은 사람들 중에 몇몇 사람들의 작은 배려들이 쌓여 그녀가 끝까지 달릴 수 있었다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나도 누군가에게 한 번의 배려를, 더 나아가 위로가 되는 존재일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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