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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anna Feb 11. 2021

정신적인 암

우울증 일기 12

얼마 전 외삼촌으로부터 꽤 긴 문자를 받았다. 내가 SNS에 올린 우울증 얘기 때문이었는데,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약은 끊지 말고 먹어라.'였다. 우울증 같은 병이 '정신적인 암'이라면 의술의 힘을 빌리는 것도 나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사실 나는 약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몇천 원도 안 되는 알약들로 한 달을 편안한 마음으로 살 수 있다는 것에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외삼촌도 꽤 오래 신경정신과에서 치료를 받았다. 병명은 '알코올 중독'. 고등학교 때부터 술을 마셨다. 삼촌은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싸움도 잘하고, 외모도 훤칠한, 게다가 그때 당시에는 집안도 부유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술에 관대했던 외할아버지에게 일찍 술을 배웠고, 그 뒤로는 모든 일이 엉켜버릴 대로 엉켜버렸고, 삼촌 말을 빌리자면 이십오 년을 그렇게 낭비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몇 년 동안 삼촌과 같이 살았던 적이 있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삼촌은 안방에서 외할머니와 주로 생활했는데, 왜인지 자주 얼굴을 비춰주지는 않았다. 지금에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지만 어딘가 모르게 집안에서 흐르는 우울한 느낌을 당시에도 지울 순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삼촌이 술에 취한 모습을 종종 목격했다. 머리는 금발로 염색을 하고 바이크 옷들을 입고 다녔다. 내가 어렸을 적 그림을 가르쳐 주던 삼촌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어느 날은 삼촌이 술에 거나하게 취해 집에 들어왔다. 엄마는 누나로서 그 모습을 보는 게 속상했는지, 이제 술도 그만 마시고 바이크도 그만 타라고 소리쳤다. 부엌 냉장고 앞에서 남매끼리 고성이 오갔다. 외할머니는 싸우는 자식들을 옆에서 말리고 있었고, 나는 거실 한편에서 멀찍이 앉아 말리지도 못하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삼촌이 때리려는 엄마의 팔을 붙잡아 냉장고로 밀치고 나서야 싸움이 일단락되었다.  

    얼마 뒤, 늦은 밤에 집으로 전화가 왔다. 새벽 무렵에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심상치 않게 들렸다. 교통사고였다. 외삼촌이 교통사고를 당했고, 병원으로 후송되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삼촌은 다리에 큰 철심을 박아야 하는 수술을 할 만큼 다리를 크게 다쳤다. 한참 병원 신세를 지고 나서도 한동안 앉고 일어서는데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교통사고 이후로 삼촌은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할머니는 큰 아들의 치료를 위해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서울에 있는 병원을 오가셨다. 몇 년을 그렇게 치료를 받고, 삼촌은 스스로를 알코올로부터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진료 막바지에는 담당의로부터 '지금까지 진료한 환자 중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한 성과를 보여준'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아마 이 대목이 삼촌이 나에게 '약은 끊지 말고 먹어라'라는 말을 하게 된 이유일 것이다.) 

    부모에게 모든 자식은 소중하겠지만, 나는 그래도 유독 아픈 손가락이 있다는 이야기를 믿는 편이다. 삼촌은 매일 할머니에게 안부 전화를 한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그러면 할머니는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연락 줘서 고맙다'라고 말씀하신다. 매일 묻는 안부인데도 할머니 목소리에는 걱정이 한가득 담겨있다. 오늘은 날이 추워서, 어제는 눈이 와서, 그제는 비가 와서 걱정이시다. 전화가 오는 시간이 십 분이라도 늦어지는 날에는 벌써부터 안절부절못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언제까지나 할머니에게 삼촌은 아픈 손가락인 것이다. 

    정신적인 질환은 고혈압처럼 가족력이 있는 것일까. 외할머니의 막냇동생인 이모할머니 또한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으로 치료를 받으셨다. 몇 년 전쯤에 급작스럽게 미국에서 한국으로 큼직한 캐리어를 끌고 우리 집으로 오셨다. 마침 집에 있던 내가 마중을 나갔던 기억이 난다. 언제나 이성적이고 선명한 눈빛을 가진 이모할머니의 눈빛은 처음 보는 사람의 눈처럼 낯설었는데, 비행기 안에서 내내 와인을 마시셨던 모양이었다. 

    뇌종양 수술 후에 후유증으로 우울증이 찾아왔는데, 그 우울함이 결국 알코올 중독까지 이어졌다. 매일 어딘가에 소주병을 숨겨 두기도 하고, 혼자 바람을 쐬러 나간다고 하시고는 초록색 병을 사들고 오시기도 했다. 두 달쯤 한국에서 치료와 요양을 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셨고, 그 뒤로는 잘 지내고 계신다는 얘기를 전해 듣지만, 여전히 이모할머니가 그런 병에 걸렸었다는 사실이 믿기 힘들다. 

    결혼과 동시에 미국으로 건너가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훌륭하게 사업을 성공시켰고, 두 아들 모두를 의사로 키워냈고, 아들들 모두 좋은 짝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뤘는데도 말이다. 사실 우울증 같은 건 완벽해 보이는 누군가에게도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것임을.

    우울증이나 알코올 중독 같은 정신적인 암을 치료하기 위해선 마치 암 덩어리를 제거하듯이 무언가를 떨쳐내야 하는 것일까. 차라리 여러 번에 걸쳐서라도 눈에 보이는 것들을 떼어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정신적인 암은 그 뿌리가 도대체 어디까지 뻗쳐있는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암에 걸리고 싶어 '암'이라는 병을 얻은 사람이 없듯이, 우울증도 내가 원해서 생긴 병은 아닌 만큼, 어쩌면 내가 우울증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다행' 혹은 '행운'으로 여겨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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