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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anna Sep 12. 2021

병원

우울증 일기 15

문이 닫힌 병원들이 줄지어 서있는 복도에 내 걸음걸이에 맞춰 구두 소리가 울린다. 방금 전까지 진료를 받은 병원도 내가 마지막 내원자다. 병원을 옮긴 것은 한 달쯤 되어간다. 삼 개월 전쯤 직장인으로 복귀하면서 나는 다시금 나의 나약한 내면과 마주하게 되었다. 여전히 사람이 많은 곳은 두렵고, 남들과 마주 보며 대화하는 것이 즐겁지만은 않았다. 그동안 간신히 수면 위로 끌어올린 나 자신을 내려놓을 방법을 찾아야 했다.

    단시간 내에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은 '약'이었다. '필요시'라고 쓰여있던 약봉투는 '자기 전'으로 바뀌었다. 신경안정제는 항시 가방에 넣어 두고 다니기 시작했다. 불편하면서도 익숙한 패턴이었다. 살기 위해서 돈을 벌고, 돈을 벌기 위해서 약을 먹고, 약을 먹기 위해서 병원에 갔다.

    의사는 매 번 같은 말을 반복했다. 사람들과 마주하기 힘들고 이야기하기 힘들더라도 결국엔 극복해야 하는 일이기에 작은 것부터 연습을 해야 한다, 너무 힘들면 약의 도움을 받는 것도 방법이다, 스스로 불안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 등. 병원에 갈 때마다 숙제를 다 못하고 학교에 가는 기분이었다.

    병원을 마지막으로 방문한 날은 유난히 더운 토요일 아침이었다. 진료 시작 시간을 잘못 알고 삼십 분을 일찍 도착했다. 다행히 방금 문을 열고 가방을 내려놓고 있던 간호사가 대기실 소파에 앉아 기다릴 수 있도록 해주었다. 십분 뒤쯤 문을 열고 의사가 들어왔다. 의사가 눈길 한 번 없이 진료실에 들어가는 동안, 나는 구석 소파에 앉아 휴대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정식 진료 시작 시간보다 오분 정도 일찍 내 이름이 불렸다. 오늘 이 병원에 첫 진료 환자가 나라는 것이 조금은 신경이 쓰였다. 너무 일찍 방문한 것에 대한 민망함을 안고 진료실에 들어갔다. 문을 열고 인사를 하니 의사가 말했다.


"진료 시작 시간 몰라요?"


한 두 번 오는 병원도 아닌데 삼십 분이나 일찍 도착한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일 년 가까이 같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병원을 방문한다는 것은 의사나 환자 모두가 지치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평일 저녁에도 퇴근 후 방문할 수 있는 병원들을 알아보았다. 그중에 버스환승센터와 가까운 지하철역 근처 병원이 눈에 들어왔다. 이십층이 넘는 주상 복합 건물에 위치한 병원은 이전 병원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잔잔한 피아노 음악과 베이지 톤으로 깔끔하게 꾸며진 내부 인테리어가 칙칙한 마음을 조금은 밝게 해주는 것 같기도 했다. 태블릿으로 진료 접수를 마치고 책장 옆 소파에 앉아 꽂혀 있는 책들을 살펴보았다. 내가 읽은 책도 두세권, 많이 들어본 책들도 여러 권 있었다. 대부분 우울증이나 공황장애를 극복한 사람들의 사연이 담긴 에세이들이었다. 잠시 동안 책들과 함께 어색한 병원의 공기에 적응하며 기다리니 하얀색 진료실 문이 열렸다.


“OOO님? 안녕하세요. “


의사가 직접 진료실 문밖으로 나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은 처음이었다. 부담스러우면서도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진료실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저는 OOO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삼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의사는 진한 눈썹과 동그란 눈과는 대비되는 날카로운 눈빛, 또 그와 상응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나는 환자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의사에게 최대한 정직하게 내 상태를 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오셨냐는 의사의 질문에 그동안 수년간 우울증을 겪으면서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에 두서없이 떠올랐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럴 땐 입 뻥긋하지 않아도 속마음이 전달되었음 싶다.  


"제가 병원이 처음은 아닌데요, "


막상 말을 시작하고 나니 물 흐르듯 처음 병원을 방문했던 시기부터 마지막 약을 먹은 것까지의 대략적인 히스토리와 혹시나 싶어 엄마에게 부탁해 놓았던 약통 사진도 보여주었다. 의사는 내가 하는 말의 전부를 기억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빠른 속도로 키보드를 두드리고는, 몇 번의 상담치료가 필요할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럼 우선은 최대한 비슷한 성분의 약을 소량 처방해드리는 것으로 할게요. 다음은 언제 시간이 괜찮으실까요?”


모든 진료는 예약제로 진행되는 것 같았다. 나는 J와 함께 가기 위해서 토요일 점심쯤으로 예약을 부탁했다. 토요일 데이트를 정신과 방문으로 시작하는 것을 J는 너그럽게 이해해주었다.

    두 번째 진료부터 본격적인 상담치료가 시작되었다. 우울증이 최고점을 찍었을 때처럼 요 근래엔 사람들과 대화하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다. 조금만 당황해도 걷잡을 수 없이 뜨거워지는 낯빛이 날 더 당황스럽게 만들었고, 그걸 바라보는 상대방도 여간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여전히 나는 나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나는 있는 그대로 의사에게 이야기했다. 그간의 우울증 치료를 받았던 이력 때문인지, 의사는 이렇다 저렇다 결론 비스름한 말도 일절 하지 않고 내 이야기만 들었다.

    남자 친구의 부모님을 처음 뵙는 일과 정신과 의사와의 첫 상담의 유일한 공통점은 아마 이 질문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되세요?"


나는 아빠, 엄마, 그리고 남동생, 외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의사들은 가족 한 명 한 명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는데, 나는 아빠를 많이 닮았다고 했고 내가 아는 이 세상 사람들 중에서 가장 예민한 사람이라고 했다. 엄마는 어려우면서도 제일 대화를 많이 하는 존재라고 했고, 할머니는 소녀 같은 감성을 가지고 계시지만 약간의 강박증이 있다고, 동생은 네 살이나 어려 아직도 걱정이 많이 된다고 했다.


"아버지 이야기를 좀 더 해볼까요?"


이 질문이 나올 것을 예상했다. 아니, 이 질문이 나오지 않기를 바랐던 것 같다. 분명 아빠 이야기를 하는 순간, 나의 증상의 원천을 유년시절에서 찾아내려고 할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의사가 기대하는 이야기들을 전달했다. 어렸을 때 기억은 대부분 내가 울고 있는 장면들로 가득하고, 아빠가 장난감 책상을 엎어버리거나 리모컨을 벽에 집어던지던 일들이 생생하다고. 나는 밤마다 엄마 아빠의 싸움을 어두운 방 안에서 들으면서 그저 기도를 하며 잠에 들었다고. 학교 다닐 때도 그다지 좋은 기억은 없으며 친구들도 별로 없는 편이라고 말이다. (사실 정해진 상담시간을 고려해 최대한 압축해서 이야기했다.)


"많이 힘들었을 것 같네요."
"괜찮아요. 지금은 아무렇지 않아요."
"그래도, 그때 당시의 본인은 그렇지 않았을 거예요."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의 기억들은 흐릿해진다. 사실 이렇게 성인이 되고 난 후에도 기억 어딘가에서 아무렇지 않게 그런 이야기를 꺼내어 말하고 있는 것 자체가 마음 아픈 일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의사에게 지금의 나는 아빠를 이해하고 있고, 지금은 정말 괜찮다는 말로 이야기를 성급하게 마무리했다. 그리고 나는 다음 예약을 부탁했다.


    이어진 몇 번의 상담을 통해서 나는 꽤나 많은 기억들을 소환했다. 그중 하나는 유치원 시절 에피소드였는데, 깜빡하고 실내화를 신고 유치원 밖으로 나갔다가 스스로 너무 창피해 그 자리에서 울어버렸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정말 툭하면 울어댔는데, 아직도 종종 그때 기억이 떠오른다고 했다. 그리고 동시에 유치원 버스에서 내리지 못해 한참 뒤에 집에 돌아와, 집에서 난리가 났었던 일이 생각났다.


"하지만 그때 저는 울지 않았어요. 무언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요."
"왜 울지 않았을까요?"
"제 잘못이 아니니까요. 선생님 잘못이지."


나는 내가 말을 내뱉고도 스스로 놀랐다. 온 가족이 놀란 일을 겪고도 너무나 의연하게 앉아 있던 어린이는 지금은 버스에서 벨을 누르고 내리는 일이 그때보다 더 힘들다. 의사는 내가 너무 많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닐지 물었다. 집에서는 가족들의 눈치를, 직장에서는 동료들의 눈치를, 어딜 가든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것이 너무 습관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도 때론 나 자신을 무엇 때문에 그렇게 들들 볶는지 알 수가 없다.

    상담을 마치고 진료실을 나오니, 내가 유일하게 눈치를 보지 않는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의사는 J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다.


"혹시 남자 친구 눈치를 보거나 러지는 않나요?"
"남자 친구가 제 눈치를 보죠."
"다행이네요."


그날따라 옆에 있어준 게 고마운 J와 함께 빗속을 걸으며 생각했다. 그동안 나에겐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것들 중에는 내가 도무지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런 일들은 시간이 지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조각조각 나뉘어 마음 어딘가에 박혀 있을지 모른다고. 어쩌면 이제야 그것들을 꺼내어 소화할 수 있는 때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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