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공간이 주는 힘
우진아! 이제 자러 가자!
오후 9시. 아이가 잘 시간이다. 아이는 졸린 눈을 비비며 작은 방으로 향한다. 만 두 살이 지난 아이는 이제 재워주지 않아도 스스로 잘 잔다. 게다가 늦은 낮잠을 자는 바람에 초저녁에 깨더라도 9시에 잠이 든다. 외출을 오랫동안 한 날에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이불과 아늑한 자기만의 공간만 있으면 말이다.
이러나저러나 9시만 되면 곯아떨어지는 아이가 잠을 늦게까지 못 자는 날이 1년에 2번 있다. 바로 설날과 추석이다. 누구나 그러하듯 명절에 우리는 시댁과 친정을 다녀온다. 적어도 2박 3일의 일정으로 다녀오는데, 아이는 2박 내내 잠을 일찍 자지도, 깊게 자지도 않는다. 나는 아이가 어디에 눕든 9시만 되면 잘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공간이 매우 중요했다. 기상 시간은 또 어찌나 빠른지. 아이에게 우리 집 작은 방이 ‘잠을 자는 곳’이었다. 사실 성인들도 환경이 바뀌면 자신의 원래 패턴대로 생활하기는 쉽지 않다. 잠자리가 바뀌어서, 어수선해서 등 갖가지 이유로 평상시와 다른 생활 방식을 가지게 된다. 도대체 이 공간이 주는 힘이란 무엇일까?
<해리포터 시리즈>를 써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조앤 롤링 (Joan K. Rowling)은 딸을 낳은 지 4개월 만에 남편과 이혼했다. 이후 심각한 생활고를 겪었다. 정부에서 주는 보조금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나가야만 했다. 그러나 그녀는 딸에 대한 책임감에 카페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이와 산책 중 유모차에서 잠이 들면 카페에 들어가 글을 썼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바로 <해리포터 시리즈>이다.
그녀에겐 카페가 어떤 곳이었을까? 사람들이 붐비고 이야기 소리가 흘러넘치는 시끄러운 공간이지만 그녀에게는 카페란 ‘글 쓰는 행위’를 더욱 강화해주는 장소였다. 카페에 있는 테이블, 카페의 커다란 조명, 쇼케이스 등 그곳에 있는 용품들만 봐도 그녀는 ‘원고 집필’에 집중하는 힘을 가졌다. 주변에 누가 있건 말건, 자신의 미래가 불안하건 말건 그 공간에만 가면 그녀는 아이디어가 마구 솟아올랐다고 했다.
<아주 작은 습관의 힘>에서 저자 제임스 클리어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주변 환경에 존재하는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들과 맺고 있는 관계에 따라 행동한다. 행위에 미치는 환경의 영향을 고려하는 것은 습관을 만들기 위한 유용한 방법이다. Our behavior is not defined by the objects in the environment but by our relationship to them. In fact, this is a useful way to think about the influence of the environment on your behavior.
그의 말에 의하면 환경은 물건이 채워진 공간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과 그 공간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관찰하고 그것을 잘 이용하면 좋은 습관을 만들 수 있는 이야기다. 누군가에겐 집 근처 커피숍이 매일 책 읽는 장소가 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거실 소파가 퇴근 후 책 읽는 장소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어떤 공간과 행동을 연결지어서 우리가 원하는 습관을 꾸준히 유지할 수 있다.
아이가 특정한 공간에서 잠을 잘 자는 것처럼, 조앤 롤링이 카페에서 글을 쓰는 것처럼, 내게도 어떤 행동이 저절로 나오게 되는 공간이 있다. 바로 거실 구석에 있는 나만의 책상과 식탁이다. 나는 거실에 있는 책상에서 첫 번째 책을 썼다. SNS에 글을 연재할 때도 이곳에서 글을 쓴다. 그리고 지금 현재 나만의 공간에서 두 번째 책 원고를 집필하는 중이다. 그리고 식탁은 내가 영어 원서나 영자 신문을 읽고 필사를 하는 공간이다.
나만의 공간이 주는 힘은 강력하다. 다른 영역이 섞이지 않은 공간이기 때문에 그곳에 가기만 하면 저절로 ‘글쓰기 모드’와 ‘독서 모드’로 바뀐다. 어떤 날은 글감이 없어서 도저히 원고를 써 내려갈 수 없을 것 같을 때가 있다. 하지만 나만의 글쓰기 공간으로 들어오는 순간 모든 게 해결된다. 머릿속으로 ‘무슨 메시지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라는 생각을 계속 떠올렸지만, 책상을 마주하는 순간 불안한 마음이 싹 사라진다. 나는 어느새 노트북 화면의 하얀 바탕 위에 까만 글씨들로 빼곡히 채워나가고 있다.
영어공부는 어떨까? 처음엔 거실 구석에 있는 내 책상에서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원서를 펼쳐서 읽으려고 아무리 애써도 빨리 내용에 집중하기가 어려워졌다. 옆에 펼쳐진 노트를 괜히 들춰보기도 하고 책장에 꽂힌 책들에도 눈길이 갔다. 글쓰기를 할 때와는 달리 어수선한 느낌이 들었다. 왜 그런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책상이 있는 공간은 이미 글쓰기를 위한 공간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되었다. 아이를 낳기 전부터 이곳에 앉아 블로그 글을 썼다. 그 후로도 나는 책상 앞에서 글감을 떠올리거나 노트북에 글을 쓰는 일을 늘 해왔었다. ‘책상 = 글쓰기 공간’이 너무 익숙해져 버린 후였다.
결국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부엌 쪽으로 향했다.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히려 공간이 넓어서 좋았다. 영어 원서, 필사 노트, 펜, 전자사전, 물컵 등 다양한 물건을 올려놓고 공부하기에 딱 좋았다. 그 후로 지금까지 식탁에 자주 앉아서 영어 원서를 읽는다. 아이와 함께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아이와 놀다가 잠시 틈이 생기면 슬쩍 식탁으로 향한다. 언제 아이가 나를 찾을지 모르기 때문에 의자를 빼서 앉을 여유도 없다. 그저 선 채로 허리만 살짝 숙여 식탁에 올려진 원서를 펼쳐 읽는다. 어떻게 해서든 정해진 장소에서 한 가지 일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밥을 먹을 땐 식탁 위에 모든 책을 정리해서 한쪽으로 치워둔다. 어차피 식사가 끝나면 식탁 위는 말끔히 정리되기 때문에 온전히 책 읽는 공간으로 변신하게 된다.
그렇다면 외출했을 경우는 어떤가. 우리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새로운 환경에서 글을 쓰거나 책을 읽어야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1시간 정도가 여유가 생겨 카페에 들릴 경우, 차량 정비하는데 시간이 30분 이상 걸릴 경우,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 등이 있다. 전문가들은 오히려 평소의 환경 밖으로 나가게 되면 새로운 습관을 형성할 수 있다고 한다. 과거의 생활 방식이나 방해꾼이 없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은 종종 “나는 카페에서 공부가 잘 돼.”라고 말한다. 카페에 커피 마시러 가면 ‘카공족 (카페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매장 테이블을 꽉 채우고 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아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중에 ‘애랑 있는데 무슨 외출이야?’, ‘집에 내 공간이 어딨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보통 어린아이를 데리고 있는 엄마들은 외출이 어렵고 아이의 물건으로 가득 찬 집에서 뭘 하려니 어수선하기만 하다. ‘영어공부’나 ‘독서’와 같은 새로운 습관을 형성하기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매일 외출을 할 수도 없고 자신을 위한 공간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될까? 나는 여기에 대한 답을 <아주 작은 습관의 힘>이라는 책에서 찾을 수 있었다.
전반적으로 새로운 환경에 접근하기 힘들 때는 현재의 환경을 다시 설계하거나 배치해보라. 일하고, 공부하고, 운동하고, 취미 생활을 하고, 요리하는 공간을 분리하라. When you can't manage to get to an entirely new environment, redefine or rearrange your current one. Create a separate space for work, study, exercise, entertainment, and cooking.
이 책의 저자는 자신만의 공간을 직접 조성하라고 이야기한다. 그렇다고 집을 리모델링 하라거나 방이 하나 더 딸린 집을 장만하라는 것이 아니다. 내가 공부할 책, 혹은 읽을 영어 원서 한 권과 펜 하나 올릴 정도의 공간만 만들면 된다는 말이다. 같은 장소, 즉 나만의 공간에서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면 시작할까 말까에 대한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그냥 하게 된다. 그게 바로 습관의 힘이다.
습관은 어떤 신호를 알아차리는 순간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영어공부를 습관으로 만들고 싶다면, 영어공부에 관한 신호를 자주 인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자리에 앉자마자 ‘영어공부’가 저절로 떠오르게끔 하는 그런 공간이 있어야 한다. 자신만의 공간이라 하여 거창할 필요는 없다. 아쉬운 대로 부엌 한쪽 공간을 활용해도 좋다. 안방에 있는 화장대 위를 정리해서 책을 올려둘 공간을 만들어도 된다. 가족들이 잘 안 다니는 방 한구석에 작은 교자상을 펴도 된다. 나만 앉을 수 있고 나만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거긴 내 자리야.”라고 말할 수 있는 공간을 지금부터 만들어 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