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인석 Oct 15. 2023

11 슬로건과 소프트 파워

 지난 조선업 편에서 주인공격으로 등장한 HD현대중공업 울산공장에는 유명한 캐치프레이즈가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걸려있다.



국가주의 시대의 흔적, '국뽕' 슬로건


HD현대중공업 울산공장에 걸려있는 표어, "우리가 잘되는 것이 나라가 잘되는 것이며 나라가 잘되는 것이 우리가 잘될 수 있는 길이다"

 이 문구가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2023년에 어울리는 표어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국가가 개인과 동일시되던 시대, 전체주의와 국가주의가 지금보다 짙던 시대에는 이만큼 멋진 표어도 없었을 테다. 나조차 어린 시절, 그러니까 2000년대에 이 표어가 보이는 대로를 차로 지나갈 때마다 멋진 문장이라고 생각했다. 1990년대와 1980년대는 이 표어가 주는 강렬함과 자부심이 더 컸으리라.


 기업 혹은 조직의 표어는 문학의 영역을 아득히 넘어있는 철학의 집약체이다. 한 문장 안에 그 조직이 가진 것과 지향할 방향을 극한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HD현대중공업 울산공장 정문에서 보이는 '우리가 잘되는-'이 표어는, 이 회사가 어떻게 성장해 왔고 어떤 방향을 지향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직원은 회사, 국가와 동일시되고 그래서 잘되어야 한다. 잘 되지 않으면 나라가 잘 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유명사와 보통명사를 넘나드는 강렬한 슬로건


1993년 에이스침대의 광고 문구로 쓰인 표어,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 침대는 과학입니다"

 이 유명한 슬로건은 에이스침대의 광고에 사용되었다. 초등학교 때 친구들끼리도 유행어처럼 자주 입에 올렸던 말이다. 오죽하면 '다음 중 가구가 아닌 것을 고르세요.'라는 저학년 시험문제에 '침대'를 정답으로 고른 아이들이 수두룩 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에이스침대의 인지도를 높여줌은 물론 '우리의 기술은 다른 수준이다'를 소비자에게 각인시켰다. 소프트 파워가 강하기 위해선 우선 인지도가 높아야 한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정말 좋은 광고였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도 모든 이가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다. 에이스침대에서도 이 카피의 대단함을 잘 인지하고 있는 모양이다. 2023년 광고에서도 다시 사용했을 정도.




'Again'으로 결집층을 확고히


2016년 미국 대선 후보였던 도널드 트럼프가 사용한 구호, "Make America Great Again"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2016년 대선 구호로 이 문장을 활용했다. 이 문장은 짧고 강렬하면서도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슬로건이 해야 할 역할을 고려했을 때 잘 만들어진 슬로건임이 확실하다. 국민들의 자부심에 불을 지피는 문구를 단 네 단어만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경쟁자인 힐러리 클린턴의 득표수가 더 많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강렬한 표어로 갖출 수 있었던 정체성의 기여를 인정해야 한다.


 재밌게도 Microsoft, Apple, Google, Amazon은 미국의 4대 거대 IT기업이자 세계에서 가장 브랜드 가치가 높은 상위 4개 브랜드이기도 하다. (순서는 Apple, Microsoft, Amazon, Google 순) 트럼프의 캠프에서도 이를 인지하고 있었고, 선거운동 때 언급하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MAGA' 슬로건은 이목을 집중시키고 결집층을 확실히 하는 효과도 있지만, 반대편을 지지하는 이들에게는 오히려 부정적인 이미지를 더 각인시킨다. 'Again' 때문이다. 

 글로벌화된 시대와 거스르는 느낌과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대만을 기억한다는 이미지를 굳혀버리기 때문이다. 자칫 '옛날 사람들'만' 모여라'라는 느낌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 같은 점을 트럼프 캠프에서도 인지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이 구호를 밀고 나간 이유는 우파적 성향의 공화당 후보가 좀 더 중도 방향의 표를 얻을지, 아니면 아예 우회전을 확실히 할지의 선택지 중 후자를 선택했다고 볼 수 있겠다.




말장난 같지만 의미를 담아, 지역을 재밌게


여수의 브랜드 '섬섬여수', 창녕의 브랜드 '안녕 자연의 창녕', 대전의 과거 브랜드 'It's Daejeon'

 문장은 아니지만 짧은 단어만으로 지역 브랜드를 잘 살린 사례도 있다. 


 '섬섬여수'는 섬이 많은 여수의 특징을 훌륭하게 표현한다. 

 '안녕 자연의 창녕'은 '라임'으로 마음을 파고들었다. 창녕이 가진 자연환경도 잘 살리면서 말이다. 

 현재는 폐지된 'It's Daejeon'도 대전의 지향점을 잘 드러냈던 브랜드이다. IT 도시로의 방향성을 짧은 단어로 보여주었다. 대전의 브랜드는 현재 Daejeon is U로 바뀌었는데, It's Daejeon보다 다소 추상적인 느낌을 준다. 




'Over the MIT', 좋지 못한 슬로건의 대표적 사례


UNIST 조무제 초대 총장의 인터뷰 기사(출처 : 매일경제)

 좋지 않은 슬로건의 대표적인 예시다. UNIST에서도 이 점을 인지했는지,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가 없어서 사진도 싣지 못했다. 건립 당시의 넓은 포부는 이해되지만, 매우 구체적이면서 인지도나 아웃풋의 차이가 확연한 어떤 대상을 슬로건에 언급해 버리는 순간, 모 아니면 도가 된다는 사례가 된다. 


 가령 '포스트 메시', '포스트 호날두'가 지난 십여 년간 어마어마하게 많은 유망주에게 붙여졌지만 대부분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사라졌다는 사실과 비교할 수 있겠다. 


 현재 UNIST의 주요 슬로건은 First in Change로 보인다.




부정문으로 만든 긍정적 이미지


HD현대일렉트릭 정문의 표어는 최근에 바뀌었다. "우리 회사에는 당신이 다치면서까지 해야 할 중요한 일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HD현대중공업의 슬로건에서 시작한 이야기이므로 다시 여기로 돌아온다. 구 현대중전기라고 불렸던 현재의 HD현대일렉트릭 정문에는 '우리가 잘되는-' 슬로건이 없다. 대신 이런 슬로건이 있다. 


 최근 본 그 어떤 슬로건보다도 이렇게 강렬하고 마음을 움직이는 슬로건을 본 적이 없다. 개인주의화된 시대, 글로벌화된 사회, 선진화된 나라의 기업에 필요한 슬로건이다. 

 부정문을 슬로건에 활용하여 오히려 긍정적인 소프트 파워를 극대화시킨 훌륭한 캐치 프레이즈 아닐까.


('슬로건과 소프트 파워' 편 끝)

매거진의 이전글 10 막강한 하드 파워로부터(4)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