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러버
내 손으로 일을 해서 처음 돈을 벌었던 때. 고등학교 3학년 때, 대입수학능력시험을 마친 후였다. 12월에 화정역 배스킨라빈스에서 처음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마침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24일 밤늦게까지 시린 손을 호호 불어가며, 매장 밖에서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열심히 팔았던 기억이 난다. 중고등학교를 통틀어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슬기와 슬기의 남자친구가 먼저 일을 하고 있었고, 이후에 나를 스카우트(?)해서 셋이 함께 일을 했다. 우리가 꽤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일을 해서 점장님이 예뻐하셨던 기억이 난다. 첫 월급을 받으려면 본인 이름으로 된 은행 계좌가 있어야 해서, 인생 처음으로 개설한 나의 신한은행 계좌.
배스킨라빈스에서 대학교 1학년 말까지 꽤 오랜 기간 파트타임으로 일했었는데, 매달 월급날이 되면 통장에 들어온 돈 30만 원을 보며 어찌나 흐뭇하던지. 그때만 해도 ATM기에 가서 통장을 직접 넣어야 이체 확인이 되고, 온라인상에서 물건을 사려면 미리 발급받은 공인인증서로 암호 입력을 한 후 보안카드 넘버까지 다 맞아야 쇼핑이 가능했다. 그런데 지금은 휴대폰 화면의 금융앱으로 로그인하면 예금 조회도, 이체도 순식간에 완료다. 옷이나 음식, 가전, 책 기타 등등 내가 원하는 쇼핑 앱에 들어가서 버튼 몇 개만 누르면 결제 및 주문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진다. 미국의 '페이팔' 서비스로 인해 우리나라도 전자결제가 보편화되면서 가능하게 된 디지털 세상의 핵기능이 아닐까. 전자결제가 없다면 카카오톡에서 이모티콘 사는 것도 맘대로 안될 거다.
마침 카카오톡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런 면에서 '카카오뱅크'와 '토스'의 등장은 금융의 혁신과도 같다. 오랜 세월, 전통적인 은행들을 통해서만 모든 돈의 흐름과 각종 상거래, 대출이 이루어졌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뀐 것. 카카오톡을 쓰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전 국민의 필수 메신저앱이 되어버린 '카톡'을 힘입어 실로 다양한 서비스들이 카카오톡 안에서 새끼를 치듯 생겨났다. 기존의 은행들처럼 영업점은 존재하지 않지만, 영업이 가능한 '카카오뱅크'는 실체 없는 온라인 은행을 대표한다. 간단하고 편리하고 쉽다. 모임 통장으로 쓰기도 아주 적절하다.
'토스'는 같은 온라인 은행은 맞지만, 약간 결이 다르다고 봐야 한다. 카카오뱅크는 그냥 개개인의 계좌 개설만을 담당하지만, 토스는 국내 은행들을 대통합(?)시켜서 본인들의 앱을 통해 조회도, 이체도 가능케 했다. 처음 토스를 쓰던 날, 다 같이 먹은 점심 값을 1/n 하여 계산한 친구에게 보내기 위한 용도로 썼었는데 그 무지막지한 편리함에 나는 또 한 번 디지털 충격을 받았다. 지폐도, 동전도 필요 없이 휴대폰 앱에 숫자만 입력해서 전송 버튼을 누르면 깔끔하게 계산이 끝나는 시대에 살고 있구나. 나는 바야흐로 디지털 시민, 디지털 러버라고 스스로를 칭하게 됐다.
얼마 전부터는 우리나라에서도 애플 페이를 쓸 수 있게 됐다. 아이폰 오른쪽 홀드 버튼을 두 번만 누르면 1초 만에 결제를 할 수 있다고. OMG. 최근 국내 애플 페이 광고처럼, 결제를 하러 카운터로 갔더니 헤어진 전 여자 친구가 캐셔인 경우, 이보다 더 유용한 페이가 또 있을까. 1초 만에 일을 치르고 매장 밖으로 줄행랑칠 수 있으니까. 아참! 미국에는 애플 통장도 나왔단다. 애플 페이가 미국 최고 투자은행 중 하나인 골드만삭스와 손잡고 야심 차게 만든 통장이라나. 각종 수수료도 없고, 돈을 넣어두면 이자가 연 4.15%나 된다고. 이밖에 애플 카드, 애플페이 레이터(선구매 후결제)도 있다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란다.
애플뿐 아니라 페이스북, 아마존 같은 빅테크 기업들도 금융 시장에 뛰어들고 있는데, 디지털 시대에 이런 대기업들이 너도나도 금융 서비스를 잡는 건 필수 불가결한 흐름이 아닌가 싶다. 기존에 보유한 데이터가 많을수록 금융 마케팅 하기도 쉽고, 자사의 플랫폼 서비스 안에 계속 머물게 할 수 있으니까. 누가 더 많은 데이터와 더 많은 금융 서비스 사용자를 확보하느냐가 디지털 경제의 패권을 잡는 데 가장 확실한 key가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