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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endy An Apr 04. 2024

오감 그리고 수퍼센스

여행은 감각하는 거야

여행은 어떤 세계를 향한 동경이다. 어딘가에 분명 존재하는 나만의 세계를 찾아 나서는 여정인지도. 여행을 거듭할수록 나만의 낙원을 발견하는 ‘순간’을 만난다. 순식간에 스러지지만 강렬한 느낌으로 그때임을, 그리고 그곳임을 알 수 있다. 그때와 그곳이라 함은 잊고 살았던 마땅함을 상기시키는 시간과 장소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지금 이 순간’에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라는 그 마땅하고도 선명한 감각. 숫자와 날짜 외우기에 영 소질 없지만 2018년 8월 29일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아니, 간직하고 있는 게 더 정확할까. 아니, 기념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만난 아날로그 공간 수퍼센스(Supersense)가 바로 그 기억과 간직과 기념의 주인공이다. 결국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되는 인연이란 거, 그게 바로 삶의 묘미 아니겠나. 빈과 나, 나와 수퍼센스가 그 운명적인 인연 같더란 것. 


초여름의 어느 날 녹색창에 검색어를 넣고는 별 기대 없이 스크롤을 내렸다. 무어라 검색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어쨌든 탁월한 시도였다. 정보와 소음의 숲에서 가까스로 발견한 글의 제목이 무려 ‘비엔나와 나’였던 것이다. 훗날의 빈과 나 사이를 예견하듯 계시의 분위기를 띤 제목에서 마음이 꿀렁거렸다. 당시 매거진 GQ의 에디터였던 장우철 님의 글이었다. 에디터 특유의 간명한 세련미로 빈의 매력을 꽤 여럿 기술하고 있었는데 내 마음과 시선의 닻은 오직 단 한 지점에 내려졌다. 평범하지만 비범한 세 문장과 함께 수퍼센스 홈페이지 링크가 걸려 있었다. 홀린 듯 접속한 수퍼센스 홈페이지의 부제는 아날로그의 집(Home of Analogue)이다. 하루가 다 지나도록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수퍼센스는 아날로그 그 자체이자 아날로그만으로 가득 채워진 공간임을 알 수 있었다. 아날로그로 세상을 변화시키고픈 사람들이 만든 곳이라고 한다. 


호기심은 어느새 증폭되어 짙은 관심과 애정으로 진화했고고, ’왜’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일까? 관심과 주목보다는 대체로 무관심의 대상인 아날로그를 왜 이토록 사랑하는가? 어떤 생각과 힘으로 아날로그를 지키고 지속시키려는 걸까? 수퍼센스에 발길 닿기도 전에 많은 생각과 질문이 오고 갔다. 반드시 가보고 싶다는 마음은 그 기저에 서린 정신과 철학을 향한 순도 높은 열망으로 발전했다. 결국 수퍼센스와 창업자의 모든 것을 알고 싶은 마음에 미디어 및 매거진 기사와 영상 등을 폭식하듯 찾아보며 탐색과 예습에 빠져들었다. 스스로를 창업자이자 메이커라 칭하는 플로리안 캅스(Florian Kaps)의 인터뷰를 열심히 찾아 읽었다. 흥미롭게도 그는 본래 거미를 연구하던 생물학 박사라고 한다. 동시에 아날로그 제품을 만들어 니치 마켓에 진입해 성공적으로 두 개의 회사를 이끈 기업가이기도 하고. 가장 흥미로운 건 그가 네덜란드에 남아 있던 마지막 폴라로이드 필름 생산 공장을 인수했다는 것이다.  


생산이 중단된 필름 공장에서 무엇을, 어떤 기회를 본 것일까? 사라져 가는 것들을 향한 관심과 열정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 걸까? 그리고 그는 사람들에게 아날로그 경험이 왜 필요하다고 생각한 걸까? 몇 년 간의 헌신 끝에 필름 재생산을 성공시킨 그는 프로젝트에서 손을 떼고 고향인 빈으로 돌아왔다. 빈 2구의 중심에서 이상적이고도 아름다운 공간을 발견하고는 ‘아날로그를 경험하는 세계’를 창조했다. 그가 묘사하는 수퍼센스는 ‘육감(the 6th sense)’이다. 거미의 뛰어난 감각 체계에서 힌트를 얻은 이름이라고. 어쩐지 어감도 좋다. 그냥 센스도 아니고 수퍼센스라니. 내게도 당신에게도 분명 수퍼센스가 있다고 믿고 싶다. 그 센스를 자극하고 깨어나게 하기 위해선 아날로그와 만나면 된다.

늦여름 무렵 많은 질문을 품에 안고 수퍼센스로 드디어 발걸음 했다. 마치 오랜 세월 편지만 주고받던 펜팔 친구를 드디어 직접 조우한 기분이었다. 공간과 나, 이런 만남이라니. 이때만큼은 나와 내 여행이 제법 근사해 보였다. 19세기말에 지어진 바로크 양식의 건물은 누군가의 취향이 진하게 배어 있는 저택 같았는데 알고 보니 어느 공작이 살았던 작은 성이었다고 한다. 층고가 높고 우아한 아르누보 스타일의 내부는 전체적으로 따뜻한 크림색을 띠고 있다. 천장에는 화려한 금장식 사이로 예스러운 샹들리에와 모던한 조명이 함께 달려 있다. 이질감 없이 조화를 이룬 모습을 보노라니 마음이 흐뭇해졌다. 부드러운 곡선을 뽐내는 아치와 직사각형으로 길고 크게 자리한 창문이 만들어낸 분위기는 어딘가 낭만적인 데가 있더라. 점점 시간 감각을 상실하고 공간 속으로 빠져들었다. 입구에 있는 주크박스에 한동안 마음을 빼앗겼지만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안으로 들어섰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야말로 아날로그 테크놀로지의 향연이었다. 


태어나 처음 본 어마무시한 크기의 대형 폴라로이드 카메라와 빈티지 프린팅 프레스, 아날로그 연주 및 녹음 스튜디오와 나만의 레코드판을 제작할 수 있는 붐 박스를 한 공간에서 한꺼번에 보다니. 각양각색의 오래된 타자기, 빈티지 폴라로이드 카메라와 필름 카메라가 사용해 볼 수 있게 전시돼 있었다. 그리고 그야말로 화룡점정은 유겐트스틸(아르누보) 양식의 모양을 한 옛 엘리베이터였다. 처음엔 전화 부스 아닐까 생각했는데 글쎄 엘리베이터라는 거다. '저 문을 열면 19세기로 여행을 떠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이상할 거 하나 없게 느껴졌다. 놀라움과 신기함에 의식은 조각나 버렸지만, 시선과 손이 아날로그로 닿는 족족 모든 감각이 일제히 깨어났다. 혼미한 정신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나만의 향수를 만들어볼 수 있는 스멜 랩(SMELL LAB)이 있는 거 아닌가. 직관적인 이름인데 이토록 재밌다니. 그윽한 향기가 코끝을 기분 좋게 건드렸다. 

감성이 충만해진 채로 창가를 바라보니 빛이 새어들고 있었다. 빛을 잔뜩 받은 레터프레스 포스터가 여럿 걸려 있었고, 바로 그때 잊을 수 없는 순간이 일어났다. 포스터에 찍혀 있던 한 문장 때문이다. 


“Trust Your Senses” 

찰나이자 영원 같은 시간이었다. 귓가에서 큰 징소리가 울렸고, 마음이 동요했다. 평생 찾아 헤매던 한 문장을 이렇게 여기서 만나는가 싶었다. 이 순간을 위해 여기로 이끌려 왔구나 확신했다. 코끝이 시큰해졌다. 내 인생에 터닝 포인트 따위의 순간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영혼의 팔다리가 너덜거렸다. 이게 웬 유난스러운 일인가. 그런데 너무 행복했다. 내 모든 감각이 활짝 피어나 축제를 벌이고 있는 파라다이스 같았다.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은 내 감각을 믿고 가는 것이라 생각하니 개운하고 통쾌했다. 마음속에 품고 있던 비밀스러운 욕망과 꿈을 밖으로 꺼내 화분에 물을 주듯 믿음을 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감각이 쉴 틈 없이 아날로그 파티는 계속됐다. 다이어리 가죽 커버를 고른 다음 알파벳 틀과 망치로 가죽에 이름을 각인했다. 속지 디자인을 고른 후 수십 개에 달하는 우드 스탬프 중 몇 가지를 골라 앞뒤로 문양을 새겼다. 마지막으로 중앙에 달아줄 끈을 고른 다음 묶어주고는 나만의 다이어리를 완성했다. 연인과 함께 각자 완성한 다이어리를 감상하며 커피를 한 잔 마시는데 웃음이 배시시 새어 나왔다. 이게 뭐라고. 어디서든 할 수 있는 경험인데 왜 이곳에서 한 이 경험이 이렇게나 즐거운지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눴다는 거 아니겠나. 온통 아날로그에 둘러싸인 환경과 평소라면 깨우지 않았을 감각의 문을 두드려주고 열어준 덕분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2019년에도 수퍼센스를 찾았다. 과연 나를 빈이 끌어당긴 건지 수퍼센스가 끌어당긴 건지 알 수 없지만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으니 진정한 승리다. 모든 게 있어야 할 자리에 묵묵히 있는 듯한 모습을 보니 뭉클했다. 낯선 각도로 수퍼센스 공간을 음미하기 위해 전과는 다른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셨고, 오스트리아식 사과 파이인 아펠슈트루델도 먹었다. 그럴 리 없지만 나를 기다려준 공간 그리고 여전히 벽에 걸려 있는 나를 일깨워 준 한 문장에 비밀스럽게 고마움을 전했다. 언제든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염원을 공기 중에 띄웠다. 힘들고 지난했던 역병의 종식에 다다르던 2022년의 가을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다시 발걸음 했다. '어떤 세월을 보냈을까, 과연 여전히 그곳에 있을까' 생각하며. 여전히 나만의 파라다이스로 남아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카페만 열려 있었고 아날로그 공간은 커튼으로 닫혀 있었다. 


아쉬움과 슬픔이 찾아들었다. 격리와 단절의 세월을 보낸 지 오래이니 체험하고 감각해야 하는 아날로그 세상이 버티기엔 힘들 거란 걸 짐작했지만 마음이 아팠다. 마침 점심 식사를 하려던 참이었기에 일단 자리를 잡고 커피와 음식을 주문했다. 슬퍼하는 나를 보며 연인은 따뜻한 위로를 건네주더니 지나가던 카페 점원 분에게 나 대신 물어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며 영원히 닫힌 것인지. 누구에게든 물어보면 되는 일인데 아쉬움에 잠겨있던 나를 그가 구해준 것. 다정한 그녀는 ‘이 카페는 수퍼센스 카페가 아닌 새로운 곳이고, 수퍼센스 공간은 코로나시기에 문을 닫았지만 여전히 비즈니스는 하고 있다’라고 설명해 주었다. 변함없이 슬펐지만 한편으론 기쁜 소식이었다. 아날로그로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창업자의 꿈은 여전히 진행 중이란 거니까. 수퍼센스가 할 수 있는 일은 여전히 남아있으니 응원과 기대로 마음을 전환시켰다.


고마움을 표하고 거기에서 그냥 끝내려던 나를 연인은 또 한 번 구해주었다. 친절한 그녀에게 나를 가리키며 ‘이곳을 너무 좋아했던 사람이다. 혹 안쪽 공간을 구경할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느냐’고 물어준 것이다. 그 덕분에 감정에 잠식되면 이성을 잃고 문제 해결을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엉뚱하게도 그 순간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 몇 년 간의 여행으로 키워진 그의 ‘감각’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나. 연인에게 감사 인사 대신 감탄을 건네며 화답했다. 괜히 긴장되는 마음에 커피를 홀짝 거리고 있던 차에 마침 내부 공간에서 일하고 있었다는 수퍼센스 직원분이 나와 주었다. 그의 허락과 안내를 받고 오랜만에 수퍼센스와 다시 조우했다. 무거운 커튼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순식간에 환희와 안도감이 밀려왔다. 공기와 냄새마저 그대로인 듯했고, 나를 살린 한 문장이 여전히 빛을 뿜어내며 벽에 걸려 있었다. 수퍼센스도 나도 이렇게 계속 가면 되겠구나 생각했다. ‘내 뜻이 아니더라도 잠시 멈춰야 하는 때 혹은 방황의 때를 만나는 게 삶일진대 그저 다시 걸어가면 되겠구나’ 싶더라. 오랜 세월 이렇게 함께 서로의 안위와 성장을 공유하며 가고 싶다. 

첫 빈 여행을 앞뒀던 즈음 수퍼센스 창업자의 스토리에 한참을 매료돼 있었다. 급기야는 비즈니스 소셜미디어 플랫폼 링크드인(Linkedin)에서 그의 프로필을 찾아 일촌 신청을 했다. 기대 반 무덤덤 반 기다리고 있었는데 며칠 후 일촌을 수락하는 거 아닌가. 기쁜 마음에 인사를 건네고, 여행 일정을 공유하며 ‘수퍼센스가 너무 기대된다, 나도 아날로그를 사랑한다, 당신을 혹 만날 수 있느냐'는 두서없는 메시지를 보냈다.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할지 생각해보지도 않았으면서 덜컥 팬레터처럼 보내버린 것. 그런데 그에게 답장이 왔다. 어쩌면 내 삶의 터닝 포인트는 그의 메시지를 본 그 순간에 시작된 게 아니었을지. 만날 수 없었지만 만난 것처럼 강렬했다. 그가 건네준 화답은 이러했다.


“나는 당신의 비전이 아름답고 이 세상을 더 아날로그적이고 더 실제적인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당신과 같은 스토리텔러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기에 당신을 직접 만나고 싶습니다. 아쉽게도 지금 저는 포르투갈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고 이달 말까지는 빈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면 기쁘게 스카이프 미팅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거듭 향하고 있는 빈으로의 여행도, 수퍼센스와의 만남도 이미 예견되고 완성된 채로 나를 기다렸던 스토리인지도 모르겠다. 아날로그 수호자와도 같은 그가 내게 부여해준 이름 ‘스토리텔러’를 팔에 완장을 두르듯 마음에 이고 다닌다. 내가 추구하는 삶의 모습과 가장 닮아있는 도시와 공간과 철학을 만나는 행운은 아무리 생각해도 여행만이 줄 수 있는 선물이다. 애틋하게 애정하고, 그리워하며 추억하는 공간을 꼭 만나자, 아니 발견하자. 나와 깊이 공명하는 도시를 꼭 만나자. 여행에 나를 맡기고 감각의 문을 열어젖히자. 언제 어디서 만나게 될지 모를 ‘삶을 흔드는 순간’을 열렬히 기다리고 맞이하자. 

매거진의 이전글 Time Travel to the Cast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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