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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다 Nov 12. 2023

아무것도 아니다


 몇 년 만에 가을 바다에 갔다. 잔뜩 흐린 공기를 헤치고 도착한 곳에는 풍랑주의보로 인해 용솟음치는 파도가 있었다. 강풍에 제멋대로 휘날리며 얼굴을 마구 때리는 머리칼과 정신없이 펄럭이는 옷가지를 대충 정리하고, 쉬지 않고 달려드는 거센 파도를 바라봤다. 휘몰아치는 회색빛의 바다를 보며 내 몸이 한없이 쪼그라드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 라는 묘한 안도감과 함께 나는 발밑의 모래알과 같은 존재가 되어갔다.  


   

 두 팔로 안을 수 없는 존재에 눈을 떼지 못하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물보라를 맞으며 섰다. 두 다리는 모래사장에 붙박여 있었지만, 파도의 움직임으로 인해 몸이 서서히 바다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격하게 꿈틀대는 바다와 모래에 흔적을 새겼다가 금세 사라지는 파도의 포말을 보며, 마음의 불편한 찌꺼기들도 쓸려나갔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의 걱정거리란 역시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그렇게 위로받았다.     



 바다를 떠나기 전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물결 한 번에 가벼이 지워질 흔적은 우리의 삶과도 닮아있다. 쪼그려 앉아 모래 바닥에 이름을 적어갔다. 미처 다 쓰기도 전에 커다란 파도가 덮쳐 얼굴을 때렸다. 순간 정지된 뇌 회로는 머리부터 뚝뚝 떨어지는 짠 바닷물에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섰다. 추위가 몰려 왔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덜덜 떨리는 몸에서는 웃음이 리듬을 타고 쉴 새 없이 흘렀다. 걱정과 불안은 어디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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