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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타치는 권작가 Feb 26. 2024

평범한 하루여서 눈물나는 날

티브이를 봤다. 채널을 돌리다가 유퀴즈를 봤다. 일반인 여성이 출연했다. 이름과 직업을 보니 낯익었다. 그랬다. 책을 쓴 작가였다. 예전에 브런치에서 그 사람의 글을 본 적 있었다. 책을 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세바시에서 강연을 했다는 소식까지 들었다. 이후로 소식을 몰랐다. 잘 먹고 잘 살겠지. 그런 그녀가 티브이에서, 그것도 유퀴즈에 모습을 드러냈다. 멍한 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마음이 심란했다. 시기, 질투, 부러움 따위의 감정 때문이었다. 첫 책을 출간한 뒤 5년째 이렇다 할 결과물을 내지 못하고 있는 초보작가의 볼썽사나운 시기심이다.


헬스장에서 운동한 후 집에서 밥을 먹었다. 내가 좋아하는 예능 프로그램인 뭉쳐야찬다 시즌3를 보면서 맛있게 먹었다. 밥을 다 먹었다. 뭉찬도 끝났다. 9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집에 있으면 소화도 안 되고 시간만 허비할 것 같아 집을 나섰다. 슈퍼에서 바나나를 사고 카페를 갈 예정이었다.


슈퍼마켓 문이 닫혀있었다. 오늘이 휴무일인 걸 깜빡했다. 미리 알아보고 출발할걸. 날은 춥고 카페는 가기 싫었다. 계속 글을 안 쓰면 글쓰기가 더 싫어질까 봐 어떻게든 써보려고 했는데 마음이 안 내켰다. 차를 돌렸다.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제2의 직장인 것마냥 맨날 가던 카페를 떠나 일탈을 하고 싶었다.


근처에 있는 동전노래방으로 향했다. 노래를 들으면서 운전해서 가는데 갑자기 마음이 서글퍼졌다. 슬픈 감정이 부풀어 오르더니 속에서 울컥하고 뭔가가 올라왔다. 눈물 주머니가 터지고 말았다. 차를 세웠다. 혼자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6년 전부터 글을 썼다. 두 번째 책도 쓰고 싶고 인기있는 작가도 되고 싶고 돈도 벌고 싶었다. 목표가 그렇다면 더 열심히 쓰면 되는데 글이 쓰기 싫어졌다. 언젠가부터 글만 쓰면 피곤하고 귀찮고 짜증이 났다. 덮어두고 글을 쓰고 싶을 때만 쓰자는 생각으로 며칠 그냥 살았다.


오늘도 운동하고 밥 먹고 티브이 보고 폰 보고 시간 보내는 그런 평범한 하루였는데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불편했고 불안했다. 뭐라도 해야 하는데 이렇게 의미없이 시간을 허비하면 안 되는데 어서 빨리 글을 써야 하는데 글을 써서 내가 원하는 목표를 이뤄야 하는데 이렇게 생각만 하고 무기력하게 있는 내가 싫었다. 글 쓰기는 싫고 안 쓰고 있자니 하루하루가 너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저 사는 대로 사는 바보 같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낙오자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그래서 눈물이 났다. 눈물이 날 정도로 글쓰기가 내 삶에서 이렇게도 중요한 부분이었던가. 나도 모르겠다.


그냥 그런 날인거 같다. 괜히 눈물이 나는 날. 슬픈 마음이 올라올 때가 있다. 특히 운전할 때. 운전하다보면 여러 생각이 떠오른다. 웃을 때도 있지만 울 때도 있다. 예전에 알던 사람들이 그리워서 울고 옛 시절이 그리워서 울고 엄마 생각에 울고 어릴 적 나를 떠올리며 또 운다.



지갑을 열어 천 원짜리 지폐 2장을 꺼내 주머니에 꾸깃꾸깃 접어 넣은 뒤 동전노래방으로 갔다. 카운터에 한 남자가 앉아있었다. 촉촉해진 내 눈을 들킬까 싶어 고개를 숙이고 입장했다. 적당한 방을 골라 들어갔다. 지폐를 넣었다. 노래를 시작했다. 우느라 코가 막혀 노래부르기가 힘들었다. 적당히 울적한 발라드 세 곡을 부르고 나왔다.


간식을 사러 편의점에 갔다. 갑자기 술 생각이 났다. 오늘 같은 날 술을 마시면 마음이 좀 나을려나. 주류코너로 갔다. 어떤 술을 마실까. 막걸리를 집어들었다. 소주 같은 쓴 술을 캬~하며 마시고 싶어 막걸리를 내려놓고 예전에 즐겨마시던 청하를 골랐다.


집에 오자마자 소주잔을 찾았다. 없다. 그 흔한 소주잔도 없다니. 그럴 만도 하다. 소주 안 마신 지가 몇 년이 됐으니. 집 창고를 뒤졌다. 종이컵 소주잔이 있었다. 일회용품 안 쓰고 싶었는데 오늘 만큼은 어쩔 수가 없다. 청하를 따랐다. 한 잔 쭉 들이켰다. 쓰지만 기분 좋게 쓰다. 캬~ 하고 신음할 수 있을 정도로 맛있게 쓰다. 적당히 취한다. 오랜만에 느끼는 취기다. 맥주 마시며 책 읽는 가게가 있다는 얘기 들었을 때 그거 꽤 낭만있네 하고 생각했는데 술 마시며 글쓰는 것도 꽤나 낭만적이다.


출근해서 일하고 퇴근하고 운동하고 밥 먹고 예능 보고 웃고 집에서 빈둥거리다가 동전노래방 가서 노래부르고 편의점에서 간식 사고 집에서 술 마시고 하루를 보냈다. 맨날 시간을 알차게 써야한다는 강박과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며 몇 년을 살아오다가 오랜만에 남들처럼 평범한 하루를 보냈다. 평범하게 하루를 보냈는데 왜 이렇게 허무하고 마음이 슬픈 건지. 요즘은 평범한 게 잘사는 거라고 하는데 나에겐 전혀 잘산 것 같지 않은 낯선 하루다.


조금만 마시려 했던 술이 어느새 동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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