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종박 Mar 24. 2022

에필로그 : 사직서 전문

존경하는 실장님, 팀장님,

그리고 저와 함께 했던 선후배 여러분께도 말씀 올립니다.


저는 2020년 9월 1일 부로 회사에서 떠나게 되었습니다.


생에 첫 직장경험을 할 수 있어서 기뻤고, 20대의 후반을 가득 채울 사람과 사건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제 저는 어린 시절부터 쭉 꿈꿔왔던 미국으로 떠나고자 합니다. 

예상치 못한 코로나 사태로 인해 앞날은 불투명하고 불확실하지만, ●●●●에서 배운 모든 것을 동원하여 이 난관을 헤쳐나가고자 합니다. 우리에게 위기는 변수가 아니라 상수 아니겠습니까?


퇴사는 멋지고 떳떳하게 하고 싶었지만, 제가 만족할 만큼 해냈는지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무엇이 멋진 퇴사인지 정의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모두가 동의할 만한 기준이나 정의가 있기도 어렵겠지요.

5년 전, 입사할 때만 해도 반드시 CEO까지 올라가 보리라는 다짐을 했던 순간이 아직도 기억에 선합니다. 아직까지도 'CEO가 되면 따자'고 약속한 입사 선물 와인은 저희 집에 누워서 5년의 세월을 먹으며 숙성되고 있습니다. 열심히 하고 싶었고, 열심히 했습니다. 때로는 기대에 못 미치는 모습도 보여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후회는 없습니다. 죄송스러운 마음은 있지만 그것은 후회와는 먼 감정입니다. 


너무나 좋은 선배님들과 후배님들을 만났습니다.

칭찬해주시고 격려해주시고, 때로는 저를 바로잡아주시고 가르쳐주셨던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많이 부족하고 어렸던 저를 선배라고 불러주시고 잘 따르고 또 함께 즐거운 시간을 해준 후배님들도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퇴사를 한창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는 좋지 않은 부분만 보이고, 또 정말 미웠던 것들도 많이 있었지만, 막상 정말로 떠나게 되니 돌이켜보면 그 또한 추억의 일부로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관심이 큰 만큼 애정도 커지고, 큰 애정의 그림자에는 그만큼 증오도 싹튼다고 합니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가 강하듯이, 제가 너무나 많은 것을 기대하고 바라고 마음대로 실망한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법인은 개인과 다르고 회사의 변화 속도가 인간의 기대치에 맞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정말로 회사가 발전하기를 바랐습니다. 저의 작은 행동과 업무가 단 1원이라도 회사 실적 증진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했습니다. 제가 베풀 수 있는 도움이 누군가에게 영감을 주기를, 그리고 제가 열심히 사는 것에 후배들이 그리고 동료들이 조금이라도 좋은 기분이 들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회사에 깊게 몰입했었습니다.


"덮어놓고 깊게 푹 빠지지 말라"라고 언제나 저희 외할머니께서 여자 친구를 사귈 때에 해주시던 충고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성적 판단이 어렵고 관계를 오히려 그르칠 수 있다고 말이죠. 

회사에도 그것을 적용했어야 했나, 우스운 얘기지만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그 충고를 따랐어야 했을까, 회사를 대할 때, 그랬어야 했을까 굉장히 복잡한 심정이지만, 이번만큼은 외할머니의 조언을 조금은 듣지 않았기에 다행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괴로워하는 선배, 동기, 후배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책임매니저와 매니저를 가리지 않습니다.

꼰대와 신세대를 가리지 않습니다. 임원과 직원도 가리지 않습니다. 한 꺼풀 벗기면 우리들은 모두 사람입니다.

아랫사람의 말에 윗사람이 상처 받기도 합니다. 감정의 골은 너무나 쉽게 깊어지기도 합니다. 그 골 가운데 매워지고 해결되는 것들은 극히 소수이며 누군가가 이 회사에서 떠나갈 때까지 더 깊어지고 험해질 뿐입니다.

제가 퇴사하는 날까지 저는 이들을 위해 이야기를 들어주고 미천하지만 의견과 조언을 건네주고자 노력했습니다. 때로는 그것이 오지랖일 수도 있고 또한 꼰대의 '나 때는 말이야'같은 꼬장질로 비쳤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후회는 없습니다. 미안한 감정은 느껴지지만, 그 또한 후회라고 해석하기에는 많이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항상 공손하고 예의 바르게, 그리고 밝게 살고 싶었지만 언제나 그럴 수 없었던 점 사과드립니다.

때로는 싹수없게, 건방지게, 그리고 어떨 때는 시니컬하게 빈정댔던 기억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사고도 치고 실수도 하고 속도 썩이고 마음도 상하게 하고 제가 착하기만 한 사원은 절대 아니었던 것으로 압니다. 그럼에도 저는 언제나 예쁨 받는 직원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 마음은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에게 상처 주고, 지치게 하고, 슬프게 했던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사직서라는 자리를 빌어서 그들의 이름과 직급, 그리고 저에게 해왔던 행위나 발언들을 정리하여 고발하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원수를 구태여 만들지 말라"는 주변 어른들의 말을 귀담아듣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팀장님, 실장님, 그리고 본부장님께 간곡히 드리는 말씀은,

저희 조직 내에 암적인 자들은 존재하며, 동료 직원을 깎아내리고 중상모략하고 헛소문과 험담을 서슴지 않는 파렴치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사회생활의 페르소나라는 가면을 쓰고 그 뒤로는 등에다 칼을 꽂는 자들이 수 명 존재합니다. 그들을 적절히 통제하고 관리하시어 소중한 조직원들이 상처 입고 의욕과 정신적인 안정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들과 맞서 싸우며 힘써온 저였지만, 아직 계급도 직급도 낮아 힘을 발휘할 수 없었던 것이 아쉽습니다.

멋진 선배이자 훌륭한 멘토로 성장하여 그런 자들과 계속해서 싸워나가고 조직문화와 일하는 분위기의 개선을 꿈꿨지만, 그때까지 스스로의 건강을 지키지 못할 것이 두려운 비겁한 겁쟁이인 저는 한발 먼저 떠나게 되었습니다. 죄송스럽고 면목없습니다.


저 또한 누군가에게는 골치 아픈 존재이자 성가신 사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저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저와 친하지 못한 분들이 갖고 계신 인식과 인상에 따라서, 

오히려 제가 사라져야 할 사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런 가능성을 배제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라도 떠나는 제 마음이 "그렇다면 내가 떠나면 되겠지"라며 스스로에게 위안을 주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혹시라도 저와의 관계나 사건, 혹은 그런 것 없이 오해 등에 의해 피해 입으신 분이 있다면 

떠나는 길에 고개 숙여 진심으로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세상은 굉장히 넓으면서도 또 작습니다.

개인의 관점에서 바라본 세상은 무한대로 넓지만, 우주의 관점에서 본 지구는 하나의 점에 불과합니다.

저희가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시 만날 날이 다시는 오지 않을 수도, 금방 다시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는 인연의 존재를 믿습니다.

5년간 저는 멋진 여러분들과 여러 종류의 인연을 맺었고, 그것은 제가 기억하는 한, 아니면 여러분의 머릿속에서 남아있는 한, 존속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게 저는 선배이거나 후배였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는 팀원이었고 파트원이었을 것이고, 부하였겠지요. 누군가에게 저는 인상이 옅은 사람이었을 수도, 기억에 남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저를 얼간이나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으로 기억하실 수도 있습니다.

어떠한 형태로든 기억에 남는 것은 저로서는 기쁜 일입니다. 아무쪼록 이 인연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만 줄이겠습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 빠짐없이 제 인생의 스승이자 멘토이자, 은인이셨습니다. 

여러분들의 성공과, 행복과, 건강을 기원합니다.

하지만 건강이 가장 중요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0년 9월 1일 

●●●● 기획실 박●● 매니저 올림








매거진의 이전글 Interim: 퇴사를 결심한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