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회사에는 빨간펜 선생님들이 많다.
사실 전자결재의 도입이 늦어지는 주요 원인 중의 하나가 출력물과 빨간펜 선생님들의 환상적 콜라보가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늘도 회사에 온 것인지 논술교실에 온 것인지 착각이 들 정도로 혼란스러운 회사원들이 많을 것이다.
글을 수정하는 것에는 크게 두 가지의 방식이 있다.
하나는 구조적인 수정, 하나는 표면적인 정제이다.
직육면체의 구조물을 도넛 형태로 두들겨 바꿔버리는 것을 구조적 수정이라 하고,
도넛의 까끌한 표면을 사포로 깎는다든지 노랑 빨간 색을 칠하는 것을 표면적 정제라 한다.
개인적으로는 둘 다 중요하다고 본다.
아무리 뛰어난 천재 교수라고 해도 전달력이 구리고 말을 잘 못하면 그 재능이 묻히고 만다.
반대로 청산유수의 전달력을 가진 강사가 한 때 인기를 끌지는 몰라도, 속 빈 깡통은 금방 소리가 요란해진다.
회사 보고서는 여러모로 효율적이어야 하며 읽기도 쉬워야 한다.
이해도 쉽고, 보기에도 좋고, 길 때는 길고 짧을 때는 짧고, 간결하면서도 상세하게, 심플하면서도 화려하게, 여러 주문이 들어오곤 한다.
정말 양식을 잘 맞춰서 깔끔하게 잘 쓰인 보고서는 참 보기가 좋다. 나도 공감한다. 21세기에는 더욱 직장인을 승리로 이끄는 능력 중 하나가 '디자인 감각'이라고 믿는다.
문제는 빨간펜 선생님이 등판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자, 우선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넘어가야 한다.
제품의 중량이 상승했다.
이것을 좀 더 자연스러운 논리의 어법으로 고치면,
제품의 중량이 증가했다. 이것이 더 좋다. '상승'은 제품의 가격이 상승했다가 더 어울린다.
좀 더 회사 보고서식으로 마무리하자면 조사를 전부 빼버리고 "제품 중량 증가"가 될 것이다.
이런 것을 지적해주고 알려주는 선생님이라면 나는 괜찮다고 본다. 은근히 우리는 한국어 네이티브 화자이면서도 정확한 어법이나 글쓰기에 대해서는 수능 위주의 교육체계 때문인지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다음부터다. 갑자기 선생님은 아래의 여러 옵션을 두고 고민하기 시작한다.
펜으로 원본 보고서의 문장 위에 찍 긋고 다시 쓰고 또 긋고 다시 쓰고를 반복한다.
제품의 중량이 증가할 예정임
제품 중량의 증가가 예상됨
제품 중량 증가 전망
제품의 중량이 증가될 것으로 예상됨
제품 중량 증가 가능
제품 중량 증가를 예상할 수 있음..................
어떤 것이 가장 좋을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가장 짧은 것이 나은지, 모호함을 없애기 위해 조금의 조사를 보태면 되는지는 모른다. 사실 글쓴이의 입장에서 '중량 상승'을 '중량 증가'로 고쳐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그 이상 갑자기 보고 시간이 지체되기 시작하면 '짜증'의 싹이 땅을 뚫고 올라오기 시작한다.
사실 변하는 것은 없다. 제품 중량이 증가하든 상승하든 읽는 사람은 '아 무거워졌구나'를 알아먹는다.
내가 기대하는 이상적인 상사로서의 지적은 좀 더 구조적인 수정이다.
실은 제품 중량이 증가하진 않고 크기만 커지는 것이다.
실은 제품 중량은 중요치 않으니, 가격이나 품질에 대한 내용으로 적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혹은 제품에 대한 이야기는 중요도가 낮으므로, 이를 다루는 회사나 산업의 거시적 얘기를 적어주면 좋겠다.
.....라는 형식으로 사실에 대한 팩트체킹을 해주든가, 아니면 더 중요한 내용으로 구조적 개선을 해주는 피드백을 나는 언제나 바랐었다.
69일 뒤 나는 퇴사하기로 했다.
국어에 집착하는 사람이 있었다. 국어가 맞다 틀리다에 엄청난 시간을 쏟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에게 보고서의 내용은 중요치 않다. 본인이 만족할만한 조사와 동사 목적어 등등이 완벽히 마음에 드는 위치에 배치될 때까지 그는 빨간펜 선생님이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몇 번의 수정을 거친다. 당연히 시간이 든다. 노력도 든다. 빨간펜 선생님이 악필이라면 도대체 뭐라고 적어 놓으신 것인지를 해독하는 데에 또 에너지가 소비된다.
그러나 잊지 말아라, 이번 선생님께 OK 사인을 받고 통과해도,
그다음 보고하기 위해 찾아간 또 다른 빨간펜 선생님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니, 제품 중량 '증가'가 아니라 '상승'이라 적어야 하는 것 아니냐?"
그리고 그는 서랍에서 빨간 볼펜을 꺼낸다.
먼 길을 힘겹게 해쳐 나와 마침표에 도착한 줄 알았던 나는 사실 도돌이표를 밟아버린 불쌍한 이분음표였다.
종박의 퇴사까지 앞으로
D-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