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까지 앞으로 100일
Intro.
퇴사를 처음으로 생각한 것은 사실 3년차가 시작한 2017년부터의 일이었다.
마법의 콩깍지와 '뽕'이 제거되기까지의 평균 1년이 걸린다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소속된 집단에 대한 애정이 언제나 남다른 인간인지라 2년은 넘게 걸렸다.
입사 초기의 의욕과 기대감, 행복감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때문에 이 퇴사에 대한 결심의 무게감은 결코 충동적인 것이 아니며 오랫동안 형성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처음에는 push보다는 pull요인이 강했다.
소속한 집단이 싫고 미워서라기보다는, 다른 진로와 모험에 대한 호기심이 더 강했다.
그것이 지금은 MBA라는 형태로 실현되었지만, 나는 여기가 밉지는 않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단순히 월급이나 연수비용, 점심값 등 돈을 주는 차원이 아니라, 실제로 나는 성장한다고 믿었다.
남자들은 군대 이야기를 예로 많이 든다. 원치 않는 타이밍에 원하지 않는 곳에 끌려왔지만, 결국에는 순응하고 열심히 생활한다. 고생은 하지만 배우는 것이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지금도 변함 없는 생각이다.
군휴학을 제외하고 한 학기의 지체도 없이 나는 취업에 성공했다.
졸업식이 입사일보다 뒤였으니, 칼졸업-칼취업에 성공한 케이스였다.
학교 간판이 있지만서도 상경계열 전공이 아닌 인문학과 사회과학만을 학부생 수준으로 배운 내가, 그리고 변변한 인턴 경험도 없는 내가 곧바로 철강사에 입사한 것은 지금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참았다. 참아왔다.
남자 나이 스물 여섯이라 어리다고 받는 무시,
전공이 구리다고 받는 무시, 학교 간판이 주는 기대감 이면에 숨어 전달되는 압박감,
이어지는 회식과 술, 술, 술, 시키면 시키는대로 까라면 까는 조직문화.....
군대 시절을 수도 없이 돌이켜보며 참고 버텼다.
몸무게가 늘고, 표정이 어두워지고, 자주 울고 속상하고 가족과도 다투고, 여자친구와도 다투고 헤어지고, 그럼에도 나는 참고 버텼다. 언젠가는 보상받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으니까.
세상은 녹록치 않다.
내가 보기에 좋은 사람도 많았다. 고마운 사람도 많았다.
처음에는 정말 싫고 무서운 사람도 그 마음 속에는 후배를 챙기고 걱정하는 따듯함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정말 좋은 사람으로 보였다. 인생의 선배이자 멘토이자 스승들도 있었다.
그런 그들이 보상받지 못하고 때로는 희생만 강요받는 것이 회사였다.
내가 존경하던 임원이 승진 레이스에서 탈락해서 옷을 벗었다.
내가 믿고 따르는 선배는 매일 밤 남아서 잔업에 야근을 하면서도, 좋은 인사고과를 받지 못했다.
내가 아끼는 후배들보다, 아첨하고 허장성세를 부리는 쇼보트(Show Boat) 후배가 더 주목을 받았다.
내가 볼 수 있는 미래는 생각보다 어두웠다. 터널이 길더라도 저 끝에 작은 빛의 점이라도 보이면 나는 달린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빛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회사를 위해 헌신해야 하지만, 회사는 나를 위해 헌신하지 않는다.
무엇인가 고장나거나 위기상황이 닥치게 된다면 직원들은 불구덩이 속이라도 뛰어들어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직원의 정신이나 몸이 고장났을 때, 회사는 불구덩이 속에 종종 그들을 던져넣는다.
매출액, 영업이익, 이익률, 부채, 모든 것들은 결국 숫자로 환산되어 종이 위에 차갑게 기록된다.
의욕 충만한 신입사원도 "1"이고 베테랑 과장도 "1"이며 출근도장만 찍는 말년 부장도 "1"이다.
숫자는 인간성이나 조직의 문화나 행복도를 측정해주지 않는다. 사실 측정할 마음도 없다. 필요가 없다.
어쩌면 나만 그런 것일 수도 있다. 나만 적응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아웃라이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 그랬다면 진작에 그만두거나 튕겨져 나갔을 것이다. 5년은 우스운 기간이 아니다.
그러기에 다소 비판 받더라도 비웃음을 사더라도 나는 이 글들을 적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 나의 뇌세포 속으로 묻혀 사라질 수도 있는 기억들을 문자로 남기기로 정했다.
나는 굶어죽지 않을 것이다. 퇴사나 이직이 나를 백수로 만들지는 몰라도, 나를 파멸시킬 수는 없다.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일론 머스크, 제프 베조스 등 거물급 CEO들의 철학을 벤치마킹 하자고 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테슬라, 아마존의 기업문화와 조직문화, 일하는 방식과 성공요인을 분석하라고 한다.
그리고는 "우리랑은 달라, 적용시킬 수 없다"고 일축하면서 우리는 변화를 거부한다.
무기력과 냉소는 전염된다. 바이러스처럼 전파된다. 외부 환경이 조건을 갖춰주면 더욱 창궐하는 바이러스처럼, 임금동결이나 채용중단 같은 외부 소식에 더욱 빠르게 퍼져나간다.
나는 원점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질문을 던지고 싶다.
위에서 말했듯이 나는 운이 좋다.
아직 누군가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지 않다. 월급이 끊기면 당장에 먹을 것이 없어지지 않는다.
구차하지만, 만나이로 따지면 아직까지는 20대이다. 이 시점에 아직은 저런 건방진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명쾌한 대답을 내 마음속에서도 들을 수 없었기에 나는 이 직장을 뒤로하고 떠나고자 한다.
완전히 퇴사를 결정했을 때, MBA라는 확실한 발판이 있었던 것은 인정한다.
아무런 베이스도 없이, 다음 징검다리의 돌맹이를 찾지 못한 상태에서 결심을 갖고 퇴사를 정한 것이 아닌 것을 인정한다. 따라서 뭉클한 사명감이나 감동을 전달하지 못할 것도 알고 있다.
세간에는 무작정 퇴사하고 자신을 찾아 나서는 정말로 용기있는 사람들이 있다.
다음 징검다리의 발판 없이 정말 굳은 결심과 신념으로 잘 다니던 직장을 차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들과 다르다. 후배들이나 동기들,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직장인들에게 퇴사에 대한 조언을 건낼 처지가 못 된다. 조금 비겁하고 약아빠진 나의 퇴사 과정이 멋없을 수 있고 초라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그래도 나는 비용을 지불하고자 한다. 모험을 떠나고자 한다.
5년간 알뜰살뜰 저축한 모든 돈을, 아니 그 이상을, 빚을 지면서까지 이 유학길에 올라야 한다.
MBA무용론이 나온지는 이미 10년이 넘었고, 이 글을 쓰는 2020년 현재 세상은, 그리고 내가 가야 할 미국은, 코로나 바이러스 파동으로 경제가 멈추고 사람들의 생존이 위협받는 대 혼란기의 한 가운데에 있다.
처음 입사했을 때만 해도, 내가 이 회사를 5년이나 다닐 줄은 몰랐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5년 '밖에' 다니지 않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만큼 미래에 대한 예상과 예측은 현실과는 자주 맞지 않는다. 직장생활은 변수로 가득한 n차 방정식이다.
불구덩이 속에 뛰어드는 것은 나방같이 명백한 자살행위일 수도 있지만, 전설 속의 불사조는 오직 불구덩이 속에서만 찬란히 부활한다. 그리고 내가 나방일지 불사조일지는 뛰어들어봐야 안다.
나는 왜 일하는가?
일은 왜 하는가? 일해야만 하는가?
꼭 여기여야 하는가? 여기가 아니면 안 되는가?
나는 여기서 내 마음을, 꿈과 정신을, 그리고 건강한 몸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끝은 언제일까? 끝까지란 것은 임원인가? CEO인가? 결국에는 은퇴인가?
그것이 내가 바라는 형태의 은퇴인가?
그 어떠한 물음표가 달린 질문에도 나는 그렇다고 말할 수가 없다. 긍정할 수가 없다.
YES가 명확히 나오지 않는다.
이제는 브레이크를 걸고 다음으로 넘어가야 한다.
정확히 100일 전부터 이 연속되는 글들을 작성한 것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실 정확히 D-Day에 회사에서 떠날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하루 이틀, 길게는 1~2주의 오차가 있을 것이다. 다만, 내가 떠날 것이라는 사실에 변함은 없다.
"100일"이라는 정확한 시간을 설정하고 카운트다운을 하는 것은 그저 나의 컨셉일 뿐이다.
회사에 대한 나의 여러 생각들을 100가지는 거뜬히 적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설정한 제목일 뿐이다. 중점은 D-며칠보다는 각각의 Episode과 나의 추억, 소회, 감정, 기억, 그리고 교훈 등에 있다.
100일 뒤에 나는 퇴사할 것이라는 네러티브도 사실 의미 있지만,
나는 여러분들이 내가 퇴사하기 전에 꼭 얘기하고 싶은 이야기가 100가지는 있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란다.
마치 소설을 읽듯, 만평의 한 페이지를 읽듯, 만화책을 펴보듯, 인터넷 "썰(ssul)"을 훑어보듯이 나의 졸고를 편한 마음으로 탐독하기를 바란다. 미래의 나 또한, 그것이 퇴사 직후가 되든 혹은 10년 후가 되든, 죽기 직전의 노인이 되든 간에, 충분히 즐기고 추억할 수 있는 글을 쓰고자 현재의 내가 노력하겠다.
나는 이 직장을 사랑했다. 지금도 조금 사랑한다.
그러나 마음은 더 이상 이곳에 없다. 이곳에 있었다는 '잔상'과 '기억'만이 드라이아이스의 수증기처럼 떠돌 뿐, 언젠가 닳아 없어질 드라이아이스와 마찬가지로 곧 떠나서 사라질 마음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사랑이 깊은 만큼 증오가 깊어지고, 빛이 강렬할수록 그림자의 암흑이 짙어지듯이,
나는 이 직장을 너무나 사랑했고, 그만큼 나는 그 어떠한 후회의 감정이 없을 정도로 강하게 결심하게 되었다.
나는 100일 뒤에 퇴사할 것이다.
이것은 나의 마지막 기록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