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회사 생활과 출력물은 불가분의 관계다. 부정하지 않는다.
이메일이 등장했던 2000년대, 우체국과 종이 편지가 멸망할 줄 알았지만 여전히 그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에 누군가는 종이를 완전히 버릴 수 없고, 프린터기는 결코 삐삐처럼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출력물은 필요하다.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
E-Book이 전통 서점을 완전히 잠식하기는커녕 사람들의 책장과 손에는 여전히 종이책이 들려있고,
언제든지 유튜브를 켜면 볼 수 있는 해외 팝스타의 공연도 결국 내가 콘서트장에 가서 보고 난 뒤에야 친구들에게 힘껏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된다.
종이는 면대면과 현장감을 대변하는 '상징물'로서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하루 종일 프린터기의 녹색 불빛이 바삐 좌우로 움직이고 잉크를 쏘아대는 기계음과 종이가 나오는 바스락 소리가 끊이질 않는 사무실은 여전히 매우 흔한 광경 아니던가.
그러나 문제는 결국에는 중용과 중도에서 벗어나면서부터 시작된다.
몸에 좋은 음식이라도 과식하면 독이 되며, 건강해지고 싶어서 하는 운동도 과하면 골병이 든다.
종이는 공짜가 아니다. 프린터기도 공짜가 아니고, 잉크도 마찬가지이며 결국 모든 것은 회사의 비용이다.
무엇보다도 출력하는데 드는 시간, 출력물을 정리해서 스테이플러(스테이플러)로 찍거나 제본하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사실 출력물로 인해서 낭비되는 가장 아까운 회사의 자산은 결국 '시간'이다.
긴 보고서나 줄글을 화면을 통해 직접적으로 읽는 것은 우리 윗세대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릴 때부터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등 화면에 익숙한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가 아니고서야, 실은 나도 종종 집중해서 읽기 위해 출력한 보고서는 적은 양이 아니다. 토익이나 인적성검사도 여전히 종이시험지와 OMR카드 아니던가. 토플을 어려워하는 학생들은 종종 '컴퓨터 화면'이라는 인터페이스를 그 이유로 들곤 한다.
나는 이게 편해~라는 말을 많이 들어보지 않았는가? (혹은 해보지 않았는가?)
전자계산기가 나왔다고 해서 주판이 곧바로 사라지지 않았으며,
PC와 엑셀이 보급되었다고 해서 손으로 들고 쓰는 전자계산기가 없어지지도 않았다.
신문물을 받아들이는 데에 시간이 걸리는 것을 혹자는 문화지체라고도 하며 혹자는 관습, 악습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도 생각한다. 둘 다 능숙/익숙해질 수는 없는 것일까?
출력물을 통한 보고나 결재가 편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새로운 방식의 전자결재나 온라인 인터페이스를 받아들이지 않아도 될 변명은 되지 않는다. 긴 글을 읽는 것이 불편하다면, 출력해서 밑줄 그으면서 읽더라도 필요할 때는 이메일도 쓰고 전자결재도 올릴 줄 알아야 한다. 둘 중 꼭 하나만 선택하라고 누가 강요하지도 않았다.
68일 뒤 나는 퇴사하고자 한다.
한 달에 한 번, 나는 200페이지 가까이 되는 출력물에 구멍을 꿇고 스프링을 끼워 표지를 만들어서 제본하는 일을 맡았던 적이 있다. 적게는 7부에서 많게는 15부 정도를 만들었으니, 낭비되는 종이야 말할 것도 없고 출력이 될 때까지(게다가 양면 출력이라 시간이 좀 더 걸린다)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나 아까웠다.
꼭 출력물로 제본을 해야만 하는 이유를 물었다.
"보안" 때문이라고, 차장님은 말씀하셨다. 보안이라.... 보안 때문에 개별 파일이나 이메일로 보낼 수 없는 것인가? 출력물의 스프링을 빼버리고 복사기로 가져간다면 이론상 무한대로 복사 및 전파/배포가 가능한 것 아닌가? 출력물이 보안을 보장하지는 않을 텐데.....
"보관" 때문이라고 하신 분도 있었다. 동의는 한다. 아무리 A4용지를 오래 두면 누렇게 변색되어 푸석푸석 해진 다지만, 사실 하드디스크나 플래시 메모리의 수명이 A4용지보다 낫다는 보장도 없다. 나은 부분이 있다면 결국 물리적 공간 차지 측면에서 우월하다고 볼 수 있다. 종이 신문 1년 치를 (지금은 찾아보기도 힘든) CD롬 하나에 넉넉히 담을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프린터기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1990년대부터 벌써 30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프린터기는 건재하다. 앞으로도 수십 년은 갑자기 종이매체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둘 다 능숙해지고 익숙해질 수 있다.
비록 예쁘지는 않더라도 우리는 손글씨를 쓴다. 자판의 시대인데도 말이다.
비록 책장에 자리를 차지하더라도 우리는 하드디스크 대신 서적을 그 공간에 채워 넣고 싶어 한다.
당신은 문화지체 현상에 앞장서겠는가? 아니면 과도기에서 슬기롭게 변화하는 미래를 이끌고 싶은가?
"나는 이게 편해~"를 주의하라!
종박의 퇴사까지 앞으로
D-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