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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박 Sep 04. 2020

D-67 : 못된 애인 같은 회사

34.

회사가 못된 애인처럼 느껴진다면, 그것만 한 퇴사 시그널은 달리 없다.

데이트 비용 다 내주고, 차도 태워주고 밥도 사주고 용돈도 쥐어주는 애인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런데도 그 애인이 참 못됐다고 느껴지고 내가 존중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회사는 종종(어쩌면 꽤 자주) "너에게 경력과 월급을 주는데 어쩔 거야?"라는 태도로 직원들을 대한다.

불합리하거나 어이없는 조치를 내리면서도, 직원들은 모를 것이라고 짐작하고 강행할 때가 많다.

은근슬쩍 복지혜택을 줄인다든지, 복잡한 말로 늘어놓으면서 임금을 사실상 동결 혹은 삭감시킨다든지, 마치 야바위꾼의 손놀림처럼 화려하지만, 결국 그것은 상대방을 어느 정도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사기'에 가까운 행위에 불과하다.

경기가 어렵고 회사가 힘들다며 한 번 얼어버린 임금은 빙판처럼 미끄러져 내려가기 십상인데,

"우리 회사가 최대 실적을 달성했습니다!"라고 언론에 자랑스럽게 떠들 때조차 월급은 동결되곤 한다. 

"너흰 이미 업계 최고 수준의 보상을 받고 있습니다"라는 이메일을 CEO의 이름으로 회사 전체에 뿌렸을 때, 나는 확신했다. 이곳은 나를 인격체가 아닌 하나의 '비용'으로 보고 있구나. 실적과 수익성을 높일 때에는 많이 파는 것도 중요하지만 씀씀이를 줄이는 것도 중요하다. 회사는 인적자본을 자본(Capital)이 아니라 비용(Expense)로 본다. 인건비 인건비 인건비, 듣기만 해도 짜증나는 단어다. 


여기 한 애인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꽤 잘 나가고 명성도 있는 데다가 든든한 재력이 있는지 매달 빠짐없이 나에게 용돈도 주고 이런저런 경험도 하게 해 준다. 

어디 가서 "제 애인은 OOO에요"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반응이 뜨겁지는 않더라도 "오~"하면서 알쫑거려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 때는 내가 그 애인이라는 것이 맘속 깊은 곳에서부터 자랑스러웠던 때도 있을 정도다.


문제는 그 애인이 정작 나에 대한 존중은 찾아보기 어려운 나쁜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밖에서 보는 평가나 시선은 나쁘지 않은데, 정작 나는 행복하지가 않다.

오랜 시간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콕 붙어서 있는데도 이 애인은 나의 발전이나 행복보다는 본인에게 내가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만 끊임없이 묻는다. 행여나 내가 "나도 꿈이 있고 마음이 있다"라고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려 하면 "그럼 헤어지든가,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라는 태도로 일관한다. 

더 열 받는 것은 "너 아니어도 사귈 사람 많아, 줄 섰어"라고 한 마디를 보탠다는 것.


회사생활을 연애라고 생각하면 참 닮은 구석이 많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고 나의 시간과 열정과 에너지를 쏟아내고, 크고 작은 보상을 받는다.

시간이 쌓이면 '진도'도 쭉 빠진다. 초기에는 설렘으로 유지되고, 나중에는 정 붙이고 지낸다.


가진 자원이라고는 인재밖에 없는 이 대한민국에서, 기업과 사람은 각별한 관계여야 한다.

뛰어난 사람들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이 발전했지, 그 어떤 천연자원을 토대로 성장한 것이 아니다.

때문에 기업은 사람들을 원했고, 대규모 공채의 전통이 이어져올 수 있었다.


2010년대 중반 이후부터 기업은 점점 사람 뽑기를 부담스러워했고,

청년들은 점점 좁아지는 취업문턱에 더욱 가열하게 뛰어들기 시작했다.

수요와 공급. 경제학을 전혀 모르더라도 원하는 사람은 많고, 해줄 사람은 적으면, 자연스럽게 원하는 사람들만 아쉬운 시장이 되어버린다. 


회사가 사람이라면, 사귀어달라고 이성들이 줄을 길게 서있는 사람이지 않을까?

그런 사람과 연애를 해야 하는 직장인인 우리는, 존중받기 굉장히 어려운 상황에 놓이기 십상이다. 


지금의 회사를 의인화하여, 내 애인이라 생각해보라.

그(그녀)는 당신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사랑과 존중이 느껴지는가? 아니면 정말 이런 애인이라면 질색인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질문,

당신은 그 애인을 사랑하는가?

계속 사귈지 말지, 답이 나올 것이다. 


종박의 퇴사까지 앞으로

D-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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