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함의 비범함 02
나는 B형 남자다.
스스로를 표현할 때, 나의 혈액형을 과거 10대 시절과 20대 초반 시절에 자주 말했던 기억이 있다. 적혈구 항원의 형태, 수적 이상 및 가계의 유전적 차이 등의 원인으로 구분되는 이 혈액의 카테고리가 어쩌다가 한국에서(그리고 일본에서) 성격과 성향을 가르는 잣대가 되었는지는 도무지 알 방도가 없다. 개인적으론 관상학이나 사주보다도 과학적 근거가 떨어지는 ‘유사과학’의 대표주자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한때 자기소개에서 주로 쓰던 Icebreaker였고, 개인적으로 B형 남자에 대한 곱지 않은 평가와 시선으로 인해 말하기를 꺼려했던 기억도 선명하다.
미국 유학시절, 그래봤자 1~2년 전이지만, 주구장창 다른 외국인 친구들의 혈액형을 물어보는 한국인 동기가 생각난다. “What is your blood type?”이라는, 그들의 입장에서 어떻게 보면 병원에서 수혈이 급한 응급상황에나 들을법한 기상천외한 질문에 적잖이 당황하던 외국인 친구들의 물음표로 가득한 얼굴이 생각난다. 나는 이런 질문이 나이브(naïve) 하긴 하지만 멍청한 질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회문화적 배경의 차이니까. 서양인들에 비하면 한국 사람들이 여전히 별자리와 그 궁합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도 쓰지 않고 의미도 부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결국 효과적으로, 단시간에, 상대방의 특성에 대한 무언가를 파악하고픈 인간의 욕망이었을 테니까.
그렇게 세월이 흘러, 러시아 월드컵(2018년) 전후로 우리나라에서 혈액형을 완전히 밀어낸 것이 있으니, 바로 마이어스-브릭스 유형지표, MBTI였다.
이제 4가지가 아닌, 2x2x2x2=16가지 경우의 수로 사람의 성격과 성향을 나누었다. 게다가 멋들어진 네 글자 알파벳의 조합… ENFJ, INTP, ISFP, ESFP … 한국 사람식으로 읽는 방식도 점점 일반화되고 있지 않은가. 엔프제, 인프피 등등 말이다. 문득 든 생각이지만, 혈액형이 “A, B, AB, O”가 아니라, “갑, 을, 갑을, 병”이었다면 2000년대, 감성의 시대에 그렇게 유행했을까 싶기도 한다. (나는 을 형 남자야…갑을 형이면 천재 아니면 사이코네… 마치 면허증 종류스럽고 영 구리다.)
어쨌든 유행할 요소가 많으니 유행한 것이며, 사람들도 나름 “와 정말 소름! 나랑 맞는 것 같아”라며 공감하고 따르게 된 것이 아닐까?
“와 소름! 나랑 맞는 것 같다”란 느낌을 설명하는 심리학적인 용어는, 바넘효과(Barnum Effect)라고 하며, “인간은 사람들이 대체로 갖고 있는 성격이나 심리적 특징을 자기 자신만의 특성이라 느끼는 심리적 경향”을 말한다. 쉽게 말해 어떤 사람이든 얼추 외향적(E)과 내향적(I) 어딘가에 있으며, 인식(P)과 판단(J) 어딘가에서 의사결정을 내리기 마련이다. 누구나 감각(S)과 직관(N)을 갖추고 있으며, 어느 정도 사고할 줄 알고(T) 감정적(F)이 될 줄도 안다. 사람은 개개인이 정말로 다채로운 면과 각도, 스펙트럼, 상황에 따라 컨디션에 따라 바뀌는 유동체이기 때문에 역으로 ‘해석을 갖다 붙이기에 좋은’ 존재인 것이다.
4가지 혈액형, 16가지 MBTI, 12가지 띠(혹은 별자리)를 비롯하여 정말로 많은 테스트와 사주팔자 메트릭이 당신을 설명해 주겠다고 나설 것이다.
그럼 이 중에서 가장 우월하거나 혹은 가장 피해야 할 유형의 사람이 도출될 수 있을까? 소위, 순위나 등수를 매길 수 있을까?
지난 편에서 말한 “표준정규분포표”에 저 어떤 기준을 가져와서 세울 수 있을까? (맨 왼쪽에는 ISTP, 맨 오른쪽에는 ENFJ 이런 식으로?) 아마 그럴 수 없으며, 그렇게 하려는 시도에 동의하는 사람도 없으리라 믿는다. 이것이 우생학(優生學)이고, 인류가 수백 년에 걸쳐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고도 그 이후 수십 년에 걸쳐 겨우겨우 극복할 듯 말 듯하고 있는 죄악이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을 잣대로 사람의 우열을 나누는 행위는 되도록이면, 가능하다면,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행위라 생각한다.
내가 추구하는 ‘보통 사람’ 그리고 ‘평범함의 비범함’ 철학의 출발점은 결국 인간의 근본적 다채로움과 동시에 갖는 보편성에 있다. 우리는 0과 100 사이 눈금 어딘가에 위치한 정수(Integer)가 아니라, 때로는 그 위치를 바꾸기도 하고 법칙에 따르지 않기도 하고 가끔 좋은 짓도 나쁜 짓도 하는 ‘인간’이다. 위에서 언급한 ‘해석을 갖다 붙이기에 좋은 존재’인 것은 결국 말랑말랑하기에 가능한 것이지, 이미 굳어버린 돌멩이 위에는 별이든 우산이든 하트든 어떤 달고나 틀을 갖다 꽂아도 꽂히지 않을 것이다.
혹시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하는 말이지만, 나는 MBTI나 혈액형을 멍청하다고 생각하거나 혐오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생각보다 잘 사용하면서도 재밌다고 느끼며, 어린 시절부터 심리 테스트를 이것저것 종종 즐기곤 했으니까. 다만, 동시에 경계하기도 한다. 한 인간에게서 더 발견될 수 있는 특성, 극복할 수 있는 단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스펙트럼을 발견하는 데에 장애물이 될까 봐 두렵다. “재미로 보는”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가끔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보았기 때문에 조심스레 표하는 우려이다.
인간은 분류학(Taxonomy)을 오랫동안 발전시킬 정도로 세상 만물을 구별하고 구분 지으며 학문의 한 축을 발전시켜 왔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우열을 가리고 차별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 무언가를 “이해” 하고 싶은 욕구로 가득 차있기 때문이다. 이해에 대한 욕구는 지구상에서 오직 인간만이 갖고 있는 습성이다.
여러분이 혈액형을 좋아했었고, MBTI에 열광하는 것도, 서양인들이 별자리를 구분하는 것도, 결국은 자신과 타인, 인간에 대해 이해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무의식과 의식의 저변에 깔려있었기 때문이리라.
우리는 몇백만, 몇십억의 평범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무언가 4가지, 16가지 등의 소수의 비범한 잣대들로 정의되지 않는다. 그러한 잣대들은 인간 이해의 출발점이나 참고 자료일 뿐, 우리들의 속내를 깊이 들여다보려면 스스로의 의지와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동영상 링크: https://youtu.be/_xO9MiHZR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