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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Sep 01. 2024

중요한 건 여행력이야

#중국 윈난 리장고성(丽江古城)

낮에 녀석은 길에 앉아 지나가는 자동차들을 지켜보거나, 상점들을 들락거렸다.

도시의 늙은 고양이, 점잖은 고양이, 이것저것 요구하지 않는 고양이였다.


-에세이집 '고양이에 대하여' 中, 도리스 레싱





짧건 길건 여행을 떠난 순간, 여행력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여행의 이력을 뜻하는 '여행력(旅行歷)'이 아니라, 여행지에서의 흥분과 의욕을 유지하는 '여행력(旅行力)' 말이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 때문에 여행지에서 의욕이 꺾이면 몇 개월 전부터 준비하고 애써 돈과 시간을 들인 우리의 여행이 매우 손쉽게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밤, 리장고성(丽江古城).


고성의 남쪽 출입구 근처에 있던 숙소에서 출발해 중심으로 들어가면서, 사람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그냥 많아진 정도가 아니라 "어? 이게 뭐지?"라고 입밖에 낼 정도다. 7월 말이었고 아마도 중국도 여름휴가기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19년 전 여행 기억으로 다시 돌아가자면, 그때는 이만큼의 사람들은 없었다. 하지만 당시에도 잘 정비된 돌길과 수로, 전통 양식으로 매끈하게 지어진 건물들을 보면 상업화를 얘기했었다.


지금은 그 단계를 훌쩍 지나, 하나의 거대한 관광 유기체가 된 느낌이랄까.


사람들은 몰려오고 몰려오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사람들은 노련해졌다. 노련해진 사람들은 세련된 상품을 만들고 눈에 띄는 서비스를 만들어내려 애쓰는 중이다. 당연히, 나쁘게 볼 일은 아니다. 우리나라도 어느 지방을 가건, 비슷한 맛에 이름만 다른 다양한 'OO빵'들이 있으니까.



사진 스폿과 상점들이 모여있는 메인 로드에서 벗어나, 옆의 골목으로 빠진다. 이곳에도 사람은 여전히 많지만 그나마 좀 한적하다. 사진 찍는 사람들을 조금 구경하다가 라이브 음악을 하는 작은 카페에 자리를 잡고 맥주를 시켰다.



'南方姑娘 (남방 아가씨)'


짧은 중국어 실력으로 겨우 알아들은 후렴구로 노래 제목을 찾았다. 윈난이 중국의 남쪽 끝이고, 고성 곳곳에 전통 복장을 입은 여자들이 사진을 찍으며 돌아다니니 매우 적절한 노래 선택이었다. 가수의 앞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던 여자가 노래를 경청하던 우리 테이블을 보며 뿌듯한 표정을 짓는다. 아마 저 가수의 친구 혹은 연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카페 창문 밖에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런타이뚜어(人太多, 사람이 너무 많다)'는 표현을 떠올린다.


조정래의 소설에서 이 표현을 봤었는데, 그리고 이곳에서는 직접 그 말을 들었다. 카페에 오기 전 메인 로드, 사람들에 휩쓸려 가는 기분이 든 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내 뒤의 누군가가 그 말을 입에 올렸다. "사람이 너무 많아"


이 말 자체는 불평일 수도, 감탄일 수도 있는데, 내가 들은 뉘앙스는 살짝 지친 불평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희소한 여행지를 간다, 는 사실만으로 여행을 채울 순 없다. SNS에 올릴 사진이 필요하게 되면서 남들이 가지 않는 차별화된 여행에 대한 욕구가 크지만, 오지만을 찾아다니거나 특별한 주제를 가지고 새로이 여행지를 발굴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보통의 여행지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희소성은 한계가 있다.


하지만, 사람이 이렇게나 많으면 쉽게 지칠 수 있는 건 사실이다. 앞서 말한 '여행력'이 꺾일 만한 상황이 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애써 떠나온 곳에서 다른 사람들 때문에 김이 빠지거나 여행의 흥분을 훼손할 수는 없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나와 비슷한 이유로 이곳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동지애를 갖거나,  

다른 사람들을 풍경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다른 사람들 역시 나처럼, 수많은 여행지 중에 이곳을 선택하고 몇 달 전부터 숙소와 비행기표를 예약했을 것이다. 그러한 여행의 흥분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얼굴들을 보면서 내가 불편해할 이유는 딱히 없다. 사람이 많아서 인프라가 부족하다면 나의 여행이 물리적으로 지장을 받겠지만, 리장고성의 상점들은 물건이 풍부했고, 식당과 숙소는 충분했다. 이 거리를 채운 사람들은 나처럼 그걸 즐기러 온 사람들이기에 동지애를 갖는 건 쉬운 일이었다.



다른 사람을 풍경으로 만드는 건 더 쉽다.

평소에도 사람 구경을 좋아하지만, 특히나 이곳은 나의 일상과 단절된 곳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의 언어능력은 이곳 사람들의 일상 대화를 거의 알아듣지 못하는 수준이었기에, 별다른 간섭 없이 거리의 사람들을 눈으로 충분히 구경할 수 있다.


'고성'하면 떠오르는 고즈넉하고 깊이감이 있는 풍경은, 사람들이 없는 아침 산책 때 보면 될 일이다. 며칠의 수고를 거쳐 이곳에 왔으니, 여행자가 할 일은 풍경을 즐기는 일뿐이다. 아마, 거리를 메운 사람들도 나를 하나의 풍경으로 여기로 지나가고 있을 것이다.



카페 건너편 가게서 한 여자아이가 화장을 받고 난 후, 엄마의 치장을 기다린다. 아이는 화려한 소수민족의상을 입고 있다.  아마 잠시 후에 사진기사와 함께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포즈로 수백장의 사진을 찍을 것이다. 하지만, 남들과 비슷한 과정이면 또 무슨 상관일까. 아이는 번잡함을 누군가와 공유하면서 자신의 한 시절을 저장했으니 그걸로 된 게 아닐까.


카페를 나서 숙소 쪽으로 향했다. 물론 조금 덜 복잡한 골목을 택해서.



* 이 노래가, 카페에서 라이브 가수가 렀던 '南方姑娘 (남방 아가씨)'

https://www.youtube.com/watch?v=0ixmB3KlP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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