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 메시지 알림 소리에 눈을 떴다. ‘지금 여기가 어디지?’ 잠에서 깨면 어디인지 헷갈릴 때가 많았다. 창 밖 칼리파 타워의 화려한 불빛이 반짝하고 비췄다. ‘두바이 내 방이구나…’ 오늘인지 어제인지 비행에서 돌아와 지금까지 죽은 듯 잔 것이었다.
핸드폰을 보니 친구 J에게서 온 문자였다. 결혼 후 영국에 살고 있는 J는 나의 영국 비행을 기다리는 친구였다. 나 또한 매달 스케줄을 받을 때마다 혹시나 찾아올 24시간의 행운을 기대하곤 했다. 이번 달에는 운이 따랐다. J를 만날 수 있는 영국 스케줄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 이번에 영국에 오면 감자탕 먹을래?’라는 친구의 짧은 메시지였다. 두바이 우리 집에 먹을 것이라고는 달랑 사과 몇 개와 감자칩이 전부였다. 그런 내게 음식 솜씨 좋은 친구가 끓여주는 감자탕이라니.. 당장 침대에서 일어나 영국으로 날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기운이 너무 없었다. 배도 몹시 고팠다. 침대 머리맡에 놓인 먹다 남긴 감자 통 뚜껑을 열며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영국에서 감자탕을 해준다고? 감동이야 ㅠ.ㅠ' 나의 메시지에 친구는 ‘오케이~그럼 감자탕 해놓고 기다리고 있을게!’라는 답을 남기고 메시지 창에서 사라졌다.
다음 날 두바이에서 영국까지 가는 일곱 시간은 진토닉을 물처럼 찾는 영국 사람들 덕분에 시계를 볼 겨를도 없이 지나갔다. 어느덧 나는 J네 집으로 가는 열차 안에 앉아 아직 남아있는 메이크업의 흔적을 손으로 지우고 있었다. 메이크업과 함께 비행의 흔적이 사라질수록 친구를 만난다는 기대감이 차올라 설레기 시작했다.
20대의 젊은 날, 같은 시기에 중동에서 승무원의 꿈을 이루며 시작된 친구와의 인연은 10년이 지나 영국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기차는 어느덧 친구가 사는 동네에 도착했다. 역에서 내리니 멀리 나풀거리는 빨간 치맛자락이 보였다. J가 좋아하는 그녀의 빨간색 주름치마였다. 나는J를 향해 뛰어가며 친구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오랫동안 소리 내어 부르고 싶었던 이름 세글자였자. 부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마법 같은 친구의 이름이었다.
친구는 포근한 봄 햇살과 같은 눈빛으로 나를 반기며 말했다.
“비행은 어땠어? 너 왜 이렇게 살이 빠졌니? 지난번보다 더 말랐네... 빨리 가서 밥 먹어야지 안 되겠다.”
J는 마치 배고픈 아이를 어르는 엄마처럼 말하며 집을 향해 바쁘게 차를 몰았다.
“영국에서 감자탕을 어떻게 끓였다니? “내가 J에게 물었다.
“여기 슈퍼마켓에서 바비큐용으로 파는 폭립 있지. 그걸로 끓이니까 한국 감자탕이랑 똑같아.” J는 뿌듯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런 친구에게 감탄을 하며 J를 바라보았다. 오래전 내가 그녀에게 '너는 사막 한가운데 떨어져도 김치찌개를 끓이고 있을 사람'이라고 하던 농담이 떠올랐다. 그 말이 맞았다.
J는 핸들이 오른쪽에 있는 영국 차를 능숙하게 운전하고 있었다. 급하게 나오며 질끈 묶은 J의 머리 사이로 삐져나온 잔머리가 자동차 유리창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살랑거렸다. 잠시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친구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내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감자탕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한데, 핏물 빼는 게 좀 힘들어. 등뼈를 찬물에 오래 담가 놓고 핏물을 제대로 빼야 고기에서 냄새가 안 나고 맛있거든 "
어제 J가 핸드폰 메시지 창에서 갑자기 사라진 것이 떠올랐다. 급하게 슈퍼마켓으로 달려가 폭립을 사다 핏물을 빼느라 정성을 쏟았을 친구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날 J가 정성껏 끓여준 얼큰한 감자탕은 싸늘한 영국의 저녁 날씨와 매우 잘 어울렸다. 친구의 마음이 녹아 있는 따뜻한 국물은 외국살이에 헛헛했던 나의 마음을 채워주었다. 아직도 나는 J에게 영국의 대표 음식은 ‘피시 앤 칩스’가 아니라 ‘감자탕’이라며 그날을 추억한다. 친구 또한 한국을 떠나 영국에서 타향살이를 하는 터라 그 시절 나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살뜰히 나를 챙겨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그 맛을 잘 알듯이, 비슷한 외로움을 겪어 본 사람은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보듬어 줄 수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