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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세호 May 02. 2022

생각할 시간

  전철이 방배역을 지날 때면 늘 거슬리는 소리가 들린다. 철이 뱉는 날카로운 소리, 철로를 양팔 벌린 사람이 막아서면 전철이 내는 비명소리다. 거슬리는 소음에 나는 불안해진다. 이마에 땀이 맺히고 숨이 가빠온다. 견디기 어려워 눈을 감았다. 철로 위에 내가 서있다. 헤드라이트에 눈앞이 하얘지고 굉음에 고막이 요동친다. 소리나 지르려는 순간 가슴속에 숨겨둔 말이 쏟아져 나왔다.


"좋아하는 거 같아요"


사고였다. 물리적 충격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입을 두 손으로 감싸고 그녀의 표정을 살핀 뒤 바닥에 시선을 깔았다. 그녀가 듣지 못했을 수도 있다. 지하철이 사당역에 들어서자 객실은 조용해졌다. 원치 않는 고요함에 나는 초조해진다. 잠시 뒤 그녀가 말했다.


"생각할 시간을 줘"


낙성대역에 사는 그녀가 내리기 전에 나는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녀가 내민 손바닥 위에 내가 가진 모든 시간을 올려놓았다. 아무렇게나 녹아내리다 굳은 유리병에 모래알이 가득 담겨있었다. 산만한 내 시간이 그녀의 작은 손바닥 위에 있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시간을 감싸 쥐고 전철에서 내렸다.


  과격하게 현관문을 열었다. 고양이가 마중 나와 배를 뒤집고 쳐다본다. 그 모습을 외면하고 보폭을 넓혀 고양이를 건너뛰었다. 축축한 셔츠를 벗어던지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오늘은 찬물로 샤워하며 소리를 지를 것이다. 심장에 무리가 갈 수 있다. 손바닥에 찬물을 묻혀 손, 발, 가슴 순서로 두들겼다. 크게 날숨을 들이켜고 냉수를 가슴에 뿌리려다 온수 방향으로 미세하게 수전을 옮겼다. 수전을 조절하며 적당한 온도를 맞추려 했지만 물이 닿을 때마다 단발적으로 소리지르기에 지쳤다. 고양이가 화장실 문을 긁는다. 아무 일 없다고 소리쳤다. 수전을 온수 방향으로 완전히 돌려 따듯한 물을 틀었다. 몸이 나른해진다. 눈을 감았다. 나는 지금 와이키키 해변에 누워있다. 옆에는 내가 쓴 베스트셀러 '생각할 시간'이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헤드폰을 끼고 클래식을 듣는다. 무스비를 한입 베어 문다. 적당히 먹을만하다. 주변을 손으로 더듬었다. 텀블러에 몰래 담아온 위스키가 있다. 발베니였음 좋겠다. 한 모금 마신다. 입술자국이 남은 텀블러를 닦지도 않은 채 옆에 있는 사람에게 건넨다.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려 했다. 샤워기에서 찬물이 흘러나왔다. 흥이 달아났다. 노래나 부르다 샤워를 마쳤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낸다. 소파에 앉음과 동시에 캔을 딴다. 그 소리를 듣고 고양이가 탁자 위로 올라왔다. 맥주캔을 코에 가져다대니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뒤로 뺀다. 술을 먹기엔 어린 고양이다. 웃음이 나왔다. 웃음이 나온다. 웃어도 되는 상황인가 나는 고양이 엉덩이를 두드리며 가늠해봤다. 몇 년을 좋아한 여자에게 어떠한 증후나 예고 없이 고백했다. 지금 난 웃고 있다. 어쩌면 고백이란 건 별거 아닐 수도 있다. 그만 두들기라는 듯  고양이가 내 손을 문다. 맥주를 벌컥 마시고 가볍게 웃은 뒤 분리수거 상자에 빈 캔을 던졌다. 침대에 누워 머리맡에 있는 오르골을 찾았다. 태엽을 세 바퀴만 돌렸다. 오르골 소리는 5분도 안돼서 멈출 것이다. 노래가 느려지는 순간 내 정신도 덩달아 몽롱해진다. 찰나에 순간에 생각을 하면 꿈으로 이어진다. 노래가 늘어지기 시작한다. 와이키키 해변이 다시 떠올리고 다시 그녀를 떠올리고 입 맞추려는 생각을 하려 했는데 눈을 떠보니 아침이었다.


  멍하게 컴퓨터 바탕화면을 보고 있다. 평소처럼 업무에 집중이 안된다. 컨디션에 문제는 없다. 딱히 다른 것 없는 하루지만 방금 미묘한 차이가 무엇인지 알게 됐다. 업무 중 딴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입을 벌리고 볼펜이나 딸각거렸다. 파티션 너머에 있는 그녀를 곁눈질로 바라봤다. 웃고 있었다. 평소에도 명랑한 그녀지만 오늘은 더 즐거워 보인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 건지 궁금하다. 동료와 얘기하고 있지만 대화가 재밌어서는 아니다. 그녀의 초점이 동료를 향하지 않고 어긋나 있다. 그녀가 탕비실로 들어가면 물어봐야겠다. 나는 입으로 작게 탕비실을 연속해서 주문처럼 읊는다. 마법처럼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탕비실에 들어갔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따라나섰다. 탕비실 문을 열고 들어가 자연스럽게 그녀를 지나치며 대뜸 좋은 일이 있냐고 물어봤다.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곤궁한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아 커피머신에 한 손을 올리고 창밖에 하늘을 바라보며 느리게 셋을 세고 다시 질문했다.


"생각할 시간 더 드릴까요?, 저는 뭐 상관없습니다"


그녀는 대답 없이 날 빤히 쳐다봤다. 평소라면 당황해 뒷걸음질 치며 요란하게 헛기침을 해대겠지만 오늘은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었다. 그녀의 검은 동공에 비친 건조한 내 표정이 보인다. 그녀는 한참 뒤에 아까와는 다른 지루한 얼굴을 잠시 짓더니 이내 표정을 바꾸고 나에게 말했다.


"오늘 지하철을 반대방향으로 타고 같이 퇴근하자"


  지하철 탑승구 벤치에 그녀와 30분째 앉아있었다. 그녀는 손목시계를 한참 쳐다보더니 영화상영관에 들어가듯 전철을 타러 가자 말했다. 퇴근시간 북적이는 사람들 가운데 놀랍게도 붙어있는 두 자리가 비어있었다. 한참이나 주위를 둘러대고 눈치를 봤다. 임산부나 노약자가 보이지 않고 어느 누구도 앉고 싶지 않아 보였다. 그녀가 먼저 앉아 나를 잡아끌었다. 그녀와 나는 만원 지하철에 앉아 퇴근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잠시 뒤 전철이 다음 도착지가 당산역이라는 안내를 해줄 때였다. 눈이 부셨다. 한강이 보였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나는 별 감흥이 없었지만 그녀는 창문 밖을 바라보고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눈매와 입꼬리가 평소보다 미세하게 내려가 있었다. 나는 그녀가 눈물을 흘리려는 줄 알았다. 다시 보니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휴지를 줄까 물어보려다 그녀가 풍기는 기운이 묘해 쉽사리 말을 걸 수 없었다. 잠시 뒤 그녀는 나를 봤다. 나는 평소처럼 곁눈질이 아닌 고개를 돌린 채 그녀를 보고 있었기에 우린 서로 얼굴을 마주했다. 그녀는 에코백에서 어제 내가 준 시간을 꺼냈다. 작은 유리병에 두루마리 편지가 있고 적당히 모래가 차 있는 그녀의 시간도 함께 꺼냈다. 캐리비안의 해적이나 동네 문방구에서 봤던 모양이다. 그녀는 두 유리병을 내 주머니에 넣어주며 말했다.


"내 시간도 빌려줄게, 생각 없는 남자는 재미없으니까"


순간 습기를 머금은 나른한 바람이 불었다. 한강에서 아니면 와이키키 해변에서 불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전철이 노을에 붉게 물든 합정역과 당산역 사이를 지나칠 무렵이었다.


  몇 번인가 도어록 번호를 틀린 뒤 느리게 현관문을 열었다. 고양이는 이미 배를 뒤집고 날 노려본다 잠시 고양이 곁에 앉아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아닐 수도 있다. 내 초점은 고양이가 아웃포커싱 되어 흐릿하게 보였다. 습기 머금은 셔츠를 벗어던지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오늘은 처음부터 온수로 샤워를 시작했다. 적당히 몸이 데워져 눈을 감았다. 영화 같은 퇴근길에 본 한강은 와이키키 해변 같았다. 나는 와이키키 해변에 뜬 한강 유람선 선배드에 누워있다. 내가 쓴 베스트셀러 '생각할 시간'이 옆에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드뷔시의 음악을 틀어달라 선장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무스비를 한입 베어 물었다. 손을 더듬거려 분명한 30년 산 발베니에 물을 한두 방울 떨어트리고 마신다. 잔을 닦지 않고 옆에 누운 그녀에게 건넨다. 그녀의 목 넘김 소리가 들린 뒤 나는 입맞춤을 한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가슴에 손이 간다. 따끔한 감각이 느껴진다. 나는 눈을 뜨고 생각한다.




그녀의 생각을 빌려온걸 깜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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