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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세호 May 23. 2022

보라색 2

남자는 여자로 인해 성숙해진다.

  언젠가 친구들과 김환기 화백의 그림을 봤었다. 지루한 시간이었다. 침묵을 깨고 난  '나도 그릴 수 있겠다"라는 말을 뱉었다. 괜찮은 유머였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얼마 전 '이번 생은 망했어'라는 연애 팟캐스트를 들었다. 여자 진행자가 말했다. 남자 친구와 전시회장에 갔었다. 그런데 남자친구가  작품을 볼 때마다 "나도 그릴 수 있겠다"라는 말을 앵무새처럼 지져겨 정이 떨어질뻔했다고 말했다. 그 이후로 나는 그런 말을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남자는 여자로 인해 성숙해진다. 추가로 작품을 존중하는 법에 대해 진행자는 몇 가지 방법을 알려줬다. 작품 앞에서 안경 들썩이기, 미간 찌푸리기, 턱 괴기 나는 오늘 가위손의 조니 뎁처럼 뚝딱거리며 작품 앞에 섰다.


  전시장에 들어서자 방안은 온통 보랏빛이었다. 천장을 올려다보니 여러 개의 보라색 조명이 보였다. 전시장의 그림은 하나였다. 정사각형 방의 한 면을 다 차지하는 큰 그림이었다. 앞으로 다가갔다. 거대한 그림이었다. 우선 안경을 벗어 눈을 비비고 다시 오른손 검지와 엄지로 안경다리를 잡아 들썩였다. 그림은 침엽수들로 가득한 광활한 겨울 숲이었다. 눈이 내린 거 같았고 숲의 한가운데로 구불구불한 좁은 길이 있었다. 길의 끝에는 작은 점으로 무언가 다가오고 있었다. 미간을 찌푸리고 쳐다봤다. 사람인지 짐승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이 그림이 풍경화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보랏빛으로 물든 눈 내린 겨울 숲은 현실에 없는 곳이다. 이런 공간은 할머니방에 들어가 비틀어진 나무소리가 나는 옷장을 열고 들어갔을 때 나프탈렌 냄새가 나는 옷을 치우면 나오는 세상에서나 마주할 수 있는 곳 같았다. 그런 상상을 하니 저 멀리 있는 그림 속 무엇인가는 굳이 사람이나 동물이 아닐 수도 있다. 특별한 켄타우로스다. 상체는 말이고 하체는 사람인 이상한 동물이 사는 보랏빛 겨울 숲, 저 멀리서 켄타우로스가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건다. "이봐 여긴 어쩐 일이야 그나저나 너무 추운데 가디건좀 빌려줄 수 있어?" 나는 턱을 괴고 작품을 보며 그런 상상을 했다. 춥지도 않은데 콧물이 흐른다. 꽤나 몰입해서 봤던 것 같다. 


  두 손으로 코를 가리고 전시장을 빠져나왔다. 화장실을 찾아 아무도 모르게 콧물을 닦아내고 싶었다. 주위를 둘러봤지만 화장실이 어딘지 알 수 없었다. 구두 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우며 울린다. 아니길 바랬지만 투피스 정장을 입은 여자가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여자가 나에게 더 가까워지기 전에 조용히 휴지 아니 크리넥스를 부탁한다고 말했다. 그녀의 구두 소리가 나에게 멀어졌다. 잠시 숨을 들이마시며 콧물을 코 속으로 넣어보려 조용히 애쓰고 있었다. 다시 구두 소리가 들린다. 나는 포기하고 뒤를 돌아있다 그녀가 준 크리넥스를 받아 구석으로 가 조용히 코 주위를 훔쳐냈다. 개운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른쪽 신발을 벗어 바닥을 쿵쿵 치며 다시 고쳐 신는 시늉을 했다. 동시에 작게 코를 풀었다.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쿵쿵쿵 발 구르는 소리와 뿌앵뿌앵 코 푸는 소리가 나와 여자만 있는 공간에 작게 그리고 분명하게 퍼져나갔다. 나는 후회했다. 코를 푼 것에 대한 후회가 아닌 대차게 코를 풀걸 작게 코를 풀고 거짓으로 발 구르는 좀스러운 행동을 했다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마에서 땀이 흘렀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나무 상자가 보였다. 크리넥스를 급하게 상자에 넣은 뒤 전시장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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