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손은 젓가락을 쥐고 있고 왼손은 식탁 아래서 손가락 셈을 하고 있다. 약지 손가락을 접었으니 상대가 나에게 4번 질문했다. 앞서 물음에 적절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나는 등산, 골프, 테니스에 관심이 없고, 여행을 좋아하지 않았다. 성의 있는 대답을 하지 못했으니 5번째 질문을 하기 전에 내가 질문해야 한다. 나는 젓가락으로 쌀국수를 돌돌 말아가며 질문을 생각했다. 점원에게 물을 달라고 말하며 상대의 얼굴을 스치듯 관찰했다. 그녀는 가는 눈썹과 높고 날카로운 콧날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크고 예리한 눈매를 가진 삼백안이었다. 문득 전시장의 투피스 정장을 입은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곧바로 질문하기보다 조금 곱씹은 뒤 나는 그녀에게 질문했다. "혹시 아트테크에 대해 관심 있나요?" 그녀는 잘 알지 못하지만 광고계에 종사해서인지 지적 호기심을 탑재되어있었다. 나는 쌀국수 집에서 벗어나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다.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가까운 곳에 화랑이 있는데 함께 가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그녀는 좋다고 대답했다.
화랑으로 가는 동안 지난번 본 그림에 대해 여자에게 설명했다. 보랏빛 공간에 광활한 침엽수가 우거진 숲을 양팔 벌려 표현했고, 보도블록 위를 위태롭게 걸으며 좁은 길을 떠올리게 도왔다. 영화 '나니아 연대기'처럼 옷장문을 열면 나오는 세상 같았다는 말을 마쳤을 때 화랑 앞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검은색 투피스 정장을 입은 여자가 지난번처럼 다가왔다. 내 얼굴을 기억하는지 오랜만이라는 말을 했다. 소개팅 받은 상대를 의식하며 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불안함이 몰려왔다. 아는 것에 비해 능력이 부풀려지고 있다. 나는 지난번과 동일하게 간단한 개인정보를 적으며 여자에게 말했다. "사람은 모두 취향이 있으니 혹시 그림이 별로일 수도 있어요" 여자는 대답 대신 작은 미소를 지었다. 조금 안심하고 난 뒤 전시장 문을 잡아당겨 여자에서 먼저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귀에 신경을 집중했다. 미세한 숨소리나 감탄사가 여자에게서 들려오지 않았다. 당황스러웠다. 나 역시 지난번엔 분위기 탓에 그림을 좋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다시 한번 확인해보고 싶었다. 전시장에 들어가자 고개를 갸웃거리게 됐다. 보랏빛으로 물든 방은 그대로였지만 거대한 그림이 보이지 않았다. 먼저 들어간 여자는 방 한가운데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다 오히려 보라색 방 자체를 작품으로 생각하는지 무언가 생각하는 듯 보였다. 나는 여자에게 상황을 설명했고 여자는 그제야 이해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잠시 뒤 투피스 정장을 입은 여자의 구두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작게 목례를 하고 말했다. "지난번 작품은 작가님께서 회수를 요청하셨습니다." 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봤고 '특별한 보라색'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답을 들었다.
여자는 화장실에 갔다. 나는 오늘 만난 그녀의 얼굴을 상상해보고 기억해두려 애썼다. 어렵게 이어온 분위기가 식어버렸다.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다. 여자에게 실망에 대한 보상으로 작은 선물을 하기 위해 화랑에 마련된 굿즈샵으로 들어갔다. 포스터, 엽서, 휴대폰 케이스 등등 액세서리가 있었다. 나는 '가나가와의 거대한 파도'로 만들어진 작은 냉장고 자석을 골랐다. 그리고 주변을 더 둘러보는데 눈에 띄는 엽서가 보였다. 누군가 사용한 크리넥스가 그려진 엽서였다. 구겨진 정도와 휴지에 묻은 액체의 모양과 색이 누가 사용한 것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내가 사용한 크리넥스가 엽서로 만들어졌을까 고민하고 있을 때 화장실에 갔던 여자가 말을 걸었다.
"취향 참 특별하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