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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세호 Jun 06. 2022

보라색 4

  침대에 누워있지만 잠에서 깬 지 오래됐다. 가만히 눈을 감고 늦게 밥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새우버거가 좋을 것 같다. 밥과 곁들여서 볼거리가 고민됐다. 넷플릭스에서 '프렌즈'를 보고 싶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뒤척거렸다. 침대 발치에서 축축함이 느껴졌다. 몸을 일으켜보니 고양이가 침대에 오줌을 쌌다. 냉장고 위에서 자고 있는 고양이를 노려봤다. 느긋한 주말 계획을 취소하고 침대 시트와 이불을 말아 코인빨래방으로 나갔다. 턱을 괴고 드럼세탁기가 돌아가는 걸 멍하니 쳐다봤다. 세제의 거품이 파도처럼 철썩였다. 문득 어제 선물한 '가나자와의 거대한 파도' 냉장고 자석이 떠올랐다. 조금 더 자세히 바라보니 티슈가 보인다. 건조기용 드라이 티슈를 세탁기에 넣어버렸다. 한숨이 나왔지만 이불이 조금 더 향기로워졌으니 됐다.


  양손 가득 이불을 들고 있어 현관문을 쉽게 열지 못했다. 어렵게 문을 열고 발로 벌려 들어갔다. 고양이가 마중 나와 쳐다보고 작게 입을 연다. 얼핏 보면 미안한 표정이지만 사실은 별다른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 고양이의 시선을 가볍게 외면하고 침대에 시트와 이불을 깔고 다시 누웠다. 따듯하고 잘 마른 이불에서 좋은 냄새가 났다. 드라이 티슈의 코튼 향에 눈이 감겼다. 잠이 들었는지 아니면 깨어있는 건지 모르겠다. 바지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전화를 받았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화랑에서 만난 투피스 정장을 입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어떻게 내 번호를 알았는지 궁금했다. 그녀가 말했다.


 "개인 정보지에 적힌 번호를 보고 전화드렸습니다. 어제 사용한 크리넥스가 그려진 엽서를 사셨죠?"


 그녀에게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려는 찰나 수화기 너머 기분 좋은 소리가 들렸다.


"특별한 엽서를 산 사람은 한 명 밖에 없으니까요"


  화랑 직원의 정중한 부탁에 예정에도 없는 외출을 했다. 버스 뒷자리에 앉아 창문을 살짝 열었다. 미지근한 바람이 얼굴에 불었다. 느긋하게 주말을 보내려 했는데 요 며칠 예측할 수 없는 하루들이 찾아온다. 지루하지 않으니 그거면 됐다. 화랑에 도착하니 투피스 정장을 입은 여자가 미소로 인사했다. 지난번 작품이 걸려있던 전시장에서 작가님이 날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손끝이 떨린다. 나도 모르게 긴장을 했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여자가 작게 마실 것을 먹겠냐고 물었다. 나는 오미자차가 먹고 싶다고 말했고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시장 문을 열었다.


  전시장 가운데 나뭇결을 살린 원목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있었고 어떤 여자가 날 바라보고 앉아있었다. 조금 더 다가가자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검은색 긴 머리는 숯이 많았고 히피펌을 했다. 피부는 하얗다기보다 밖에 나가본 적 없는 사람처럼 창백했고, 작은 입이지만 입술은 두꺼운 편이라 고집이 느껴졌다. 여자는 큰 눈으로 앉으라는 듯 눈동자를 위에서 아래로 움직였다. 나는 자리에 앉으며 여자는 사회성이 떨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고 무례함에 대한 각오를 했다. 여자가 말했다.


"굳이 인사하지 않아도 제가 누군지 알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각오하길 잘했다. 여자는 나를 재촉하듯 계속 질문했다. 


"크리넥스에 묻은 액체는 제가 찾던 완벽한 보라색이에요. 전 그 색을 찾기 위해 엽서까지 제작해야 했어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주 감성적인 나의 직원이 제안한 아이디어였죠. 단 한 명만 그 엽서를 샀고요." 


나는 헛기침이 나왔다.


여자는 계속 질문했다. 


"크리넥스에 닦은 액체는 뭐예요? 볼펜의 잉크, 포도의 과육, 음료를 쏟은 건가요?"


나는 말할 수 없었다. 그럴싸한 거짓말을 하려 했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이 원목 책상이 마호가니 나무일까라는 생각을 했다. 마호가니 나무를 세게 누르면 움푹 파인 뒤 다시 복구된다고 한다. 여자의 목소리가 커져간다. 나의 심장을 누군가 손으로 누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어디서 났냐고요!"


"콧물이에요 저는 보라색 콧물을 흘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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